[시토회] 당신자신에게 전적으로 현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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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토회] 당신자신에게 전적으로 현존하라
  • 에스터 드 왈
  • 승인 2017.05.1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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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의 길] 시토회 수도자들의 전통 -20

시토회 신학은 영혼의 본성, 영혼 안의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알기 원했다. 그들은 또한 그분의 형상과 닮은 영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본성을 알기를 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사랑으로 그분 자신과 일치시키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사랑의 작용의 본성과 단계들을 알고자 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사랑의 신비, 하느님의 사랑, 다른 사람들의 사랑,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사랑의 신비에 대한 그들의 접근에서 무엇인가를 알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관하여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첫눈에는 모순일 것 같지만, 시토수도자의 본질적인 관심은 인간 본성을 다시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현대의 수도원장의 말에 있듯이 ‘시토회 교부들의 접근은 인간에 대한 사려 깊은 회복과 쇄신이다.’

하느님, 사랑이신 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시토 수도자의 첫 번째 단계는 수도승이 자기 자신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생각은 아가서 1,7에 대한 호소로서 베르나르드에 의해 알려졌다:

"어디서 우리가 왔는지, 어디에 우리가 서 있는지, 어디로 우리가 가는지 아는 것은 우리가 무엇이었고 현재는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무엇이 될 지 아는 것- 우리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가 사랑의 길로 걸어가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참된 과학이고 시토 수도자에게 필요한 것이다."

가르침의 시작에서, 그러므로, 베르나르드는 사변적인 철학에서 벗어나 이 내적인 연구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그 연구는 물론 희랍인들 가운데서 형성되었고 교회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에 의해 계속된 오랜 전통이다. 우리의 거룩한 닮음을 덮고 있는 이 층들 그리고 우리의 참된 위대함을 덮어씌우고 있는 이 층들을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하고, 우리 스스로 무엇이 되고 있는지 알 때까지 어떻게 벗겨낼 수 있을까?

따라서 우리는 이 임무에 마주하고 있다: 즉,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기 시작하려면 우리 자신의 자아를 알아야 한다는 요구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인간 본성이 일하는지, 그리고 삼위일체의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으로 만들어진 인간 존재에게 무엇이 자연적인 것인지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아마 가장 의미 있고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어렵고 긴, 아마도 일생동안의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가장 깊숙한 자아들이 한 층씩 노출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한 진리에 직면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중성의 한계를 인식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변명하려는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를 찾고 있는 사랑의 하느님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한가지 과제이고,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12세기 시토회 수도자들의 매우 큰 도움을 받은 내 자신을 발견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 문제는 매우 남다른 매력을 끌어왔기 때문이다.

사진출처=english.bethleem.org

베르나르드가 다룬 추락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사람은 그의 창조주와의 닮음을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형상은 간직하였고, 그 형상은 영혼의 본질 안에 그리고 분리될 수 없이 새겨졌다. 형상과 닮음의 주제에 대한 베르나르드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영적인 인류학이다. 인간의 비극은 이것이다: 끊임없는 자기대립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본질적인 형상과 잃어버린 닮음 사이에, 혹은 죄에 의한 손상 사이의 대결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 우리가 원래 창조되었던 그 형상과 닮음의 전체를 다시 얻을 가능성이 있다.

창세기 첫 장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각자를 그분의 형상과 닮음으로 만들었다고 듣는다. 그러나 죄를 통해, 타락을 통해, 우리는 그 닮음을 잃었다. 죄는 인간 존재가 은총이 아닌 자연적인 권리로 신이 될 수 있다는 교만의 죄였다. 이 형상은 파괴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손상되었어도 영혼 안에 남아있고, 숨겨져 있다. 머튼은 ‘이중’ 옷이라는 구절을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위선의 거짓말, 혹은 거짓말의 이중 겹으로 산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그것은 우리의 참된 자아가 아니므로 우리자신들로부터 그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형상을 간직했지만 물론 우리가 형상 자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형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형상의 모방일 따름이다. 여기에 회복 가능성의 근거가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이 있고, 그분과 일치할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형상은 파멸되지 않는다. 어떤 시점에서 베르나르드는 그 형상을 ‘거룩한 관용의 이 명백한 표지’라고 부르면서 경탄할 구절을 사용하였다. 말씀은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지만 되돌아 갈 수 있다고 끊임없이 상기하고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지금 불균형 속에 살고 있다면 또한 우리는 회심을 통해 되돌아가려는 가능성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이 거룩한 이미지는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자유, 즉 우리가 갖고 태어난 의지의 자유인데 그곳은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은 곳이며; 우리의 자연적인 단순함과 우리의 자연적인 영원성이다. 인간 존재의 위대성은 단지 우리 자신의 단순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완전한 말씀의 단순함에 참여하기 위해 일어서는 우리의 능력 안에 있다.

때때로 우리는 더욱 삼위일체를 강조하게 되고,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인 하느님의 형상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사람은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레드가 썼다. ‘사람의 기억은 잊어버리지 않고 하느님을 꽉 붙잡았고, 사람의 이해는 잘못 없이 그분을 알아보았고, 그리고 사람의 사랑은 어떤 것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욕구 없이 그분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선언으로 끝맺었다. ‘그래서 사람은 행복하였다.’

세인트 티어리의 윌리암은 창조의 순간부터 거룩한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영혼을 사로잡아서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내부에는 우리를 삼위일체로 향해 이끄는 이 ‘자연적인 구조’가 있다. 하느님의 의도에 따라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요소들, 기억, 이성과 의지가 있고, 그것들이 영혼의 더 높은 부분을 형성하며 우리 안의 거룩한 삼위일체의 형상이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항구한 기억, 지식, 그리고 사랑에 전념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삼위일체의 삶을 나누게 될 것이다. 1135년 그가 썼던 노래하며 중에서 윌리암은 말하고 있다, ‘당신자신에게 전적으로 현존하라, 그리고 당신자신을 사용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분 안에서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이 본연의 불멸의 자유는 이를테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접촉, 일치, 영혼과의 만남의 지점이다. 발생한 일은 우리가 이 자유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베르나르드가 우리의 존엄성이나 가치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우리의 자유의지를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자유가 우리에게 다른 모든 살아있는 창조물들보다 우월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왜곡되고 빗나가고 있다.

머튼의 말에 의하면, ‘자유의지가 스스로 구부러져서 하느님의 은총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자유의지와의 접촉을 시도할 수 없다.’ 그래서 비록 이 이미지가 유지되고 있지만- 또는 길슨이 사용한 말로, 뒤틀리고 있다. 한편 라틴어 단어 curvatura는 나에게 손상이나 기형에 대한 시각을 주고 있다. 나에게는 이 뒤틀린 자아와 나의 똑바름 사이의 대조가 나타나고 있고, 희망은 내가 바닥 아래로 굽어지는 대신에 위로 향하리라는 것이다.

베르나르드는 이것을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추방되었거나, 또는 올바른 질서와는 거꾸로 살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하게 표현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항상 내 안에서 싸우는 두 세력들, 기형과 닮음 사이의 대조가 주제이다. 나의 자연적인 존엄성과 자유는 자유선택에 대한 나의 남용과 자기중심주의에 의해 가려진다. 나의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보다 낮은 곳으로 방향을 돌려 결과적으로 나는 하느님이 나에게 의도하시고자 하는 거룩한 닮음의 형태를 취할 수 없다.

그러나 베르나르드는 낙관적이다- 우리가 ‘희망에 불리었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기형을 악으로 보고 내 자신 안에서 그 모든 것을 받쳐주고 있는 선으로 이끌린다. 머튼에 의해 첨가된 삽입 설명이 있는 베르나르드의 말에서, 영혼은 아주 거대한 악에 의해 절망으로 끌려가지만(그것은, 영혼의 기형) 그러나 그런 거대한 선함에 인해서 희망을 상기한다. (하느님의 형상은 그 기형 아래에서 감지된다). 그러므로 악에 의해 불편해질수록 영혼은 그 자체 안에서 본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선을 향해 더 열렬히 이끌리고 있는 자신을.

따라서 인간 본성의 총체성의 복원은 시토회의 신비주의가 철저히 도전하는 중심 문제이다.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것들의 회복을 위하여 여행을 할 책임이 주어진다. 거룩한 일치를 위한 불가피한 조건은 우리에게 자연적인 것, 우리의 타고난 자유, 우리의 자발성에 대한 회복이다.

우리가 착수해야 할 일은 회복, 쇄신의 일이다. 그것은 물론 수도의 길이 잘 알고 있는 길인데, 수도적인 회심, 사랑하는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탕자의 길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머튼이 본대로, 시토 수도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들이 그토록 열렬히 찾던 하느님-사랑의 하느님께로 지체 없이 가도록 이끈다’.

그래서 나는 지식과 겸손과 사랑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길을 보기 시작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그분을 아는 것이 가능하게 하신다- 사랑은 하느님을 아는 필수조건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 안에 하느님에 관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없을 것이다.

"Amor ipse intellectus est"(그분을 사랑하면 이해하게 되리).

이 금언은 교부신학과 시토회 신학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이 표현은 사람, 특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또한 그 사람을 아는 길이고, 그 사람이 하는 일에 참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닮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높은 단계는 하느님이신 사랑(Charity)과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 그리고 그것 홀로 우리가 하느님을 알게 하는 위치에 서게 하는 사랑(charity)과의 구별이며, 이 구별은 베르나르드에게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 사랑의 원천입니다.’ 사랑의 근본 원천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사랑과 사랑하는 일에 관해 아주 많은 말들이 있을 때, 너무나 많은 기대가 자연적으로 지속될 수 없는 인간의 사랑에 쌓아질 때, 시토 저작들에 방향을 돌려 하느님의 말씀과 기도에 잠기고 겸손한 자기 인식으로 채워진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생기 넘치는 일이다.

포르드의 요한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의 ‘사랑의 성가’를 만들었다. 그는 맨 처음에 당신의 힘과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런 다음 세상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그의 위대한 노래로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30년 동안 예수는 침묵을 지키시다가 그 다음에 입을 여셨다: ‘하느님의 지혜가 와서,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외쳤다: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바로 그분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 여기 받아들이기에 주저할 수 없는, 논쟁의 여지없이 명백한 증거가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그리고나서 요한은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이 문장을 첨가한다: ‘그분은 물 속에서 이 증거를 보여주셨다, 또한 홍수 속에서 보여주셨다.’ 성 베르나르드산의 힐라리 코스텔로는 요한이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물은 예수가 건너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인 항구에 무사히 도달한 고난과 죽음의 바다라고 언급한다. 모든 형상들은 우리각자에게 제각기 말을 한다- 파도는 우리를 침몰시키려고 위협하고, 바다는 우리영혼 속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이 강론의 어떤 부분에서 포르드의 요한은 우리 각자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들어라, 오 하느님의 교회여. 너희에게 말씀이 선포되었고, 오로지 너희에게 들을 수 있는 귀가 주어졌다.’

들어라!
위대하신 임금님을 생각하라
너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모든 영원으로부터 얼마나 그분이 너를 사랑하시는지,
이 사랑이 얼마나 분에 넘치는지,
얼마나 위대한지.

요한은 우리에게 사랑의 세 가지 유형 사이의 구분을 알려준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사랑; 그분이 받으시는 사랑;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 이 마지막 사랑은 불, 꺼질 수 없는 불이다. 이 불은 하느님 자신의 사랑으로부터 온다. 이 꺼질 수 없는 사랑의 근본적인 원천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것이 핵심이며, 거기로 우리는 되풀이해서 돌아간다.


출처/1998년, 미국 메리놀회 출판사인 올비스에서 출판된 <단순함의 길(The Way of Simplicity)>을 참사람되어에서 2001년 4월에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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