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성령강림, "팔짱끼고 뒤에 앉아 복음을 듣지 마라"
상태바
[성경공부] 성령강림, "팔짱끼고 뒤에 앉아 복음을 듣지 마라"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5.16 11: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루가 복음과 사도행전-7

사도행전

루가에 의한 긴 복음서의 초반부에서 성령은 주님의 능력을 행하고, 하느님의 권위를 갖고 말하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단 한 사람에게 완전히 주어진다. 예수님께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선포되고 드러난다.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며 구세주의 만찬에 모두 초대된다는 기쁜소식으로 가난한 이들을 부유케 하시면서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여행하시면서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고 드러내셨다.

후반부에서는 똑같은 성령이 자신의 삶을 아버지께 바친 아들들과 딸들,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또는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자신을 내어준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가 선포하셨던 기쁜소식을 선포함으로써, 또 그들의 삶 안에서 그 기쁜소식을 살아냄으로써 구속사업을 계속한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들은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로마제국 각지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파했고 드디어는 로마에도 말씀을 전한다.

by Juan Bautista Maíno - Pentecostés - 1612-14

성령께서 활력을 주시다

사도행전 처음에, 루가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에 흠씬 젖어들고 성령으로 채워질 때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성령이 너희에게 오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루가의 설명에서 우리는 예수님 승천이 지난지 얼마 후에 성령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한 복음에서는 조금 다른 설명이 나온다. 요한 복음 20,22에서는 예수께서 부활이 있은 다음 바로 성령을 내려 주셨음을 볼 수 있다. 어느것이 맞는 것일까?

복음서 저자들이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는데 관심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런 종류의 질문들로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성서 저자들은 영적인 진리에 관심이 있었고, 그들은 그들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는 것들을 그 사건이 있은지 30년, 40년, 50년 후, 즉 그들이 살던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존재하는 영적 진리를 묘사하기 위해서 이용했다.

영적 진리는 이것이다: 차가운 지식과 뜨거운 지식에는 차이가 있다. 복음을 듣는 것과 복음에 영감을 받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그 둘을 다 믿음이라고 하지만 지식으로서의 믿음과 진정한 믿음은 서로 다르다. 팔짱끼고 뒤에 앉아서 복음을 듣는 것과 복음을 받아들이며 신념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행동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두 번째 태도만이 성서적인 믿음이다. 즉 말과 행위가 일치할 때 말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 새로운 길을 가르친다. 예수님께서 돌아 가셨을 때 사도들은 그것을 몰랐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렸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해이해졌다. 그들에게는 신념이 부족했다. 그들은 목적, 목표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우리는 그들이 곧 변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내면에서부터 변했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활동하고 살았고 움직였다(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뜨뜻 미지근한 동조자들도 불타오르는 사람들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또는 사도행전에서 그들을 묘사했듯이, 그들은 “세상을 온통 뒤집어 놓은 사람들”이다(사도행전 17,6).

그런 일이 실제로 언제 일어났는가? 우리는 정말 모른다. 몇십년이 지난 뒤에 그 때를 생각해 보면 그 일은 꽤 빨리 일어났던 것 같다. 요한은 십자가 사건 바로 직후라고 말한다. 루가는 한달 반 정도 지난 어느 한 기적 같은 아침이라고 집약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정말 언제 인지 잘 알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 우리에게 전해 오는 신약성서에 기록된 것에서 몇몇 단서를 찾아보는 일뿐이다.

우리가 아는 한가지는 변한 것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연구 전체를 통해서 보아왔듯이 변한 것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고, 하느님의 약속을 이해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느님의 한결같은 충실하심을 신뢰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능력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변했다.

아마도 사도들은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이라고 부르는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 근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경험했으나 처음에 그녀는 그분을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요한 20,11-17). 제자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그분과 같이 걸어갔으나 그들은 그분을 즉시 알아보지 못했다(루가 24,13-32). 세 번째 날 더 많은 사도들이 그들 가운데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경험했으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유령인줄 알았다(루가 24,36-37).

어떤 의미에서 그분은 그들이 알고 있었던 예수님이셨고 어떤 의미에서는 아니었다. 그분은 실제 나타나셨으나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했다. 그들에게 그분에 대한 경험이 정말 생생하여 마치 그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고 까지 생각하려면 믿음이 더 자라야 했다. 그분을 부활하신 주님으로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힘이 필요했다. 은총의 선물이 있어야만 그분의 신성을 알아 볼 수 있고 그분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은총이다. 우리는 지금 핵무기가 세상을 날려보낼 수 있는 아슬아슬한 세상에 살고 있으나 그런 일에 무감각하다. 전쟁, 기아 등에 대해 듣고는 있으나 무사하기로 선택한다. 수천명씩 교회를 떠나고 있는데도 본당들이 무심하게 있는 것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 볼 때 우리가 거룩함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것 저것 요구하는 다른 사람들-하느님도 포함해서-에게 방해받지 않고 홀로 조용히 지내기를 원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 삶 안에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가 성령이 무엇인지를 정말 알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고 말은 하나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그저 얼음 같은 지식일 뿐이다. 그것은 직접적인 지식, 경험적 지식이 아니다. 참으로 성령의 선물은 세례 때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 은총은 견진성사 때 재확인된다. 그 선물은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기도를 할 때마다. 미사에 갈 때마다 주어진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우리가 용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여 우리자신이 그것에 의해 변화하도록 하지 않으면, 우리를 차갑게 내버려두는 믿음일 뿐이다.

우리 삶 속에서 그런 얼음같이 차가운 마비증상을 경험할 때, 우리는 예수님 승천 후 다락방에 숨어 있던 사도들과 다를 것이 없다. 십자가 사건 후 그들을 사로잡았던 그 차가운 공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현존에 의해 녹았다. 그 후 40일간 그들은 그분과 함께 있으며 즐거웠다. 40일간 그분은 그들에게 성령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보여 주셨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은 더 이상 그분의 현존을 가까이 느낄 수 없었다. 얼마 후 그분은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것 같았다.

신시내티의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 초창기부터 같이 있었던 우리들은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사람들은 하나 둘씩 주님을 알고, 그분의 현존을 경험하고,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의 힘을 알고 싶어 모여들었다. 그때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아주 명백해서 믿기가 쉬웠다.

그분은 우리와 같이 계셨고, 우리를 가르치셨고, 성서의 의미를 우리에게 펼쳐 보여 주셨다. 그분은 우리 주변 도처에서 일하시고, 우리 하나하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문을 열어 주시고, 우리자신이 결코 해결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어려움 등을 해결해 주셨다. 우리는 복음사가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자신의 부활이야기를 한 권으로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분을 느꼈고, 거기에서 활동하시는 그분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창기 은총의 시기가 지난 뒤에, 그러한 강열한 경험의 열기가 식었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경험들이 꿈이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더 이상 공동체 시작 초기에 그렇게도 쉽게 고무적으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던 예수님을 느낄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가 틀렸었는지 모른다. 아마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아마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꾸며낸 것인지도 모른다.

루가는 예수 승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에 이러한 주님 부재에 관한 느낌을 다시 설명한다. 4복음 사가 중 루가만이 예수께서 어디로 가 버리셨는지 의아해 하면서 허공을 응시하는 사도들의 모습으로 그것이 어떤 느낌 일까를 묘사하려고 노력한다(사도 1,9-11).

이럴때는 기도를 하거나 어둠을 경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루가도 사도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계시던 주님을 보았고 그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느꼈던 다락방에 다 함께 모인다. 우리는 그들도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것과 똑같은, 자신감이 상실됨을 경험했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분이 정말 주님이었을까? 잘못 본 것은 아니었는지? 너무 그분을 원해서 우리가 환상을 본 것은 아닌지? 우리자신에게 마술을 걸어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그들은 주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도하고, 기다리며 희망하고 있으면서 자신들에게 그런 질문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 안에서 종종 그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듯이 사도들의 삶에서도 그 힘이 빠져나가는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더 이상 주님의 실재를 느끼지 못할 때 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일을 했다. 그들은 어떤일이, 무슨일이든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가운데 기도하고 기다렸다. 그 어둠 속에서 그들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을 같이 느끼고, 그분과 함께 고뇌하였으나 그래도 어떤 부활과 빛을 주시리라고 아버지를 믿었다.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