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픔이 너무 커 네 아픔을 미처 보지 못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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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픔이 너무 커 네 아픔을 미처 보지 못했구나"
  • 유형선
  • 승인 2017.05.0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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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영화 <오두막>을 보는 동안 아내와 두 딸이 펑펑 울었습니다. 괜히 영화를 보자고 했나 싶어서 미안했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며 퉁퉁 부은 세 여자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래도 선선하게 부는 저녁바람 덕인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습니다.

파업에 참여하며

영화의 원작인 윌리엄 폴 영의 장편소설 <오두막>은 저에게 좀 각별합니다. 2012년 저는 직장에서 파업을 했습니다.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시기에 전 직원의 고용보장을 주장하며 시작한 파업이었습니다. 7월에 시작한 파업은 그 해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첫 눈을 맞으며 종료했습니다. 전 직원 고용안정 약속을 회사로부터 받아냈습니다만 무려 144일에 걸친 파업이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파업은 가족들에게 못할 짓이기도 합니다. 회사는 무노동 무임금 정책으로 파업에 맞섰습니다.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가족에게도 크나큰 고통입니다. 가장이 파업에 동참한다는 것은 가족 모두의 생계를 낭떠러지 끝까지 몰고 가는 행위입니다. 파업은 끝났지만 가족들에게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대단히 괴로워하며 말 못하는 속앓이를 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던 때에 본당 신부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 <오두막>이었습니다. 가족을 지켜내지 못해 고통 받던 주인공이 하느님을 만나 상처를 치료하고 삶의 본질에 다가서는 모습을 읽으며 마치 파업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제 영혼도 덩달아 치료받는 것 같았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하느님께 감사 기도가 절로 드려졌습니다. 이 책을 여러 권 구입하여 양가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느님을 여자로 표현한 게 너무 좋았어요"

영화 <오두막>은 어린 막내딸이 죽은 뒤 절망 속에 살던 아버지 맥이 하느님의 초대 편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편지 속 초대받은 곳이 바로 막내딸이 죽임을 당한 오두막입니다. 고민 끝에 맥은 용기를 내어 홀로 오두막으로 찾아 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만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영화 중 최고의 명 장면을 세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큰 딸과 2학년 작은 딸 모두 주인공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꼽았습니다. 큰 딸은 그 이유를 제법 길게 설명했습니다.

“우선 하느님을 여자로 표현한 게 너무 좋았어요. 그 동안 무조건 남자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하느님을 여자로 표현했어요. 남자와 여자가 모두 있어야 생명이 탄생하는 거잖아요.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느님! 이게 너무 좋았어요.”

작은 딸도 언니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합니다. 두 딸에게 인상 깊은 또 다른 장면도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큰 딸이 팔짱을 끼운 채 고민하더니 대답을 이어 갑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데 특별한 예식이 필요 없는 게 좋았어요. 성당에 가면 여자는 미사포를 써야 한다고 하잖아요. 또 봉헌도 준비해야 하고요. 그런데 기독교는 원래 노예들의 종교였잖아요. 노예들이 미사포가 어디 있었겠어요. 또 봉헌할 돈도 없었을 거에요. 영화에 나오는 하느님과 주인공은 특별한 옷을 입은 것도 아니고 그냥 일상복을 입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특별한 형식 없이 만났어요. 그게 좋았어요.”

작은 딸에게도 인상 깊었던 장면을 좀 더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작은 딸을 만나는 장면이 좋았어요.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영화에서 주인공 맥은 현실에서는 찾지 못했던 작은 딸의 유해를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바위 틈 사이 비밀의 공간에서 찾아 냅니다. 이 장면을 회상하며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작은 딸 태도에 제가 살짝 놀랐습니다. 유해가 나오는 장면이 꼭 자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겁에 질리거나 무서워하는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속 어린 소녀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를 해방시키는 용서

아내는 주인공 맥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미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영혼을 만나 서로 용서를 청하는 하는 장면을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습니다. 술에 취해 아내를 곧잘 때렸습니다. 어린 주인공을 나무에 묶어놓고 혁대로 매질을 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싫어서 주인공 맥은 어린 나이에 가출하였습니다. 아내는 아들을 만나 용서를 청하는 아버지의 대사를 기억했습니다. ‘아들아, 내 아픔이 너무 커서 너의 아픔을 미처 보지 못했구나! 용서해 다오!’

아내는 큰 딸 캐서린과 맥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장면도 참 좋았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막내 딸 사고 이후 사실 온 가족들은 모두 자기 혐오라는 속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 때문에 막내에게 사고가 일어났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아버지 맥이 큰 딸을 안으며 ‘네 잘못이 아니었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가족의 아픔을 가족의 포옹으로 치유해 갑니다.

저에게 최고의 장면을 꼽으라는 것은 좀 가혹합니다. 그만큼 원작소설 <오두막>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를 꼽으라면 작가 윌리엄 폴 영의 소재 선택을 꼽겠습니다.

작가는 부모가 선교사로 활동하던 뉴기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그곳 원주민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끔직한 경험이 있습니다. 끔직한 경험을 바로 ‘오두막’에서 겪었다고 합니다. 윌리엄 폴 영에게 ‘오두막’은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 못하는 자신만의 비밀이며 아픔입니다. 치욕적인 기억을 묻어둔 마음 속 어둠입니다. 그런 어둠의 공간 ‘오두막’을 용기 내어 과감하게 드러내 이 소설을 썼습니다. 스스로를 용서하고 치유했습니다.

<오두막>에서 배웠습니다. 용서는 내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마음 속 금고를 열어 제치고 꽁꽁 가두어 두었던 고통스런 기억에게 자유를 주는 일입니다. 고통은 분명 흉터를 남깁니다. 그래서 더더욱 진정한 용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숨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잊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해방시키라는 말입니다.

아직 영화관에서 개봉 중입니다. 혹 영화를 놓치시더라고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원작소설은 언제라도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의 상처로 스스로 지어진 집 <오두막> 입니다. <오두막>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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