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버림도 포기도 없는 끈질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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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버림도 포기도 없는 끈질긴 사랑
  • 유수선
  • 승인 2017.04.1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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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선의 복음의 힘-2

[유수선의 복음의 힘-2]

‘도심 속 공소’로 사용하고 있던 집을 동료에게 맡기고 인도에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공소가 쉼터로 변해 있었다. 그것도 도저히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형제가 들어와 살고 있었다. ‘엄마’라고 부르며 친밀하게 다가온 형제이긴 하지만 알콜에 폭력까지 있어 수사님들도 감당을 못해 쉼터마다 쫓겨나온 형제인데, 술도 싫고 폭력도 무서워하는 내가 이 형제를 감당할 수 있을까? 난처해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동료는 힘들면 형제를 내보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해 ‘아버지’의 집을 찾아 온 형제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 면담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무슨 도움을 받길 바라니?” “술을 끊고 싶어요. 한글도 배우고 싶고요.” “그리고 교리공부도...” 4년 전 수도원에서 교리공부를 시작했는데 다른 형제와 싸워 수도원에서 쫓겨나 교리도 중단한 적이 있었다.

그 뒤에도 술 안 먹고 안 싸우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매번 어기는 바람에 가는 쉼터마다 쫓겨났다. 이제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쉼터들도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또 날 찾아와 술 끊고 세례받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저 끈질긴 시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면담을 진행하며 루카복음 11장 비유가 떠올랐다. 길을 가다 자신에게 들린 벗에게 내놓을 빵을 꾸러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간청하는 사람의 비유였다. 그가 ‘이제 60이 되었으니 그만 쉬어야지, 저 형제를 받는 것은 무리야’ 생각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 아니 저 형제의 배고픔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네 빵 좀 나눠주라고 끈질기게 간청하고 계신 것만 같았다. “네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신하려고 왔으니, 그 분께서 너에게 충만히 보상해 주시기를 빈다”(룻2,12)며 룻을 받아들인 보아즈의 마음으로 그날 나도 그 형제를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콜 전문가가 아니니 술을 끊게 도와주지는 못해. 하지만 한글은 가르쳐 줄게. 글을 익히면 의사소통이 편해져 술을 덜 마시게 되지 않을까?”

“또 하나, 매달 고시원에 내는 돈 만큼 내게 맡기렴. 대신 퇴소할 때 돌려줄게. 임대주택 신청하려면 최소 보증금 이삼백만 원은 있어야 하잖아. 마흔 네 살이 되도록 방 한 칸 없어 여기저기 떠돌며 헤매는 삶은 그만 청산해야 신세한탄하며 술 마시는 일이 줄어들지.”

“교리는 차차 생각해보자. 대신 이 집 안에서 술을 마시면 바로 퇴소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한 달 후 관리해 주던 동료가 나가고 형제 혼자 있게 되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소주병과 김치, 라면냄비가 방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영락없는 노숙자 행세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술 먹은 변명을 들으며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하고 타이르고 나왔다. 그런데 다음 날 가보니 또 다시 술병이 늘어져 있었고 집안 가득 담배와 술 냄새가 진동했다. 게다가 놀러온 다른 형제까지 이 광경을 보아버렸으니 규정상 내보내야 한다. 어떻게 하나? 이 집에서 쫓겨나면 또다시 쪽방과 길거리를 떠돌며 술과 함께 지내다 언젠가는 한 겨울에 얼어 죽게 될지도 모르는데.

불거진 형제의 얼굴과 눈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제가 감당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쩌자고 이 형제를 받아들이도록 재촉하셨습니까?’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인 채 형제와 한참을 마주 앉아 있었다. 쉼터의 규정도 형제의 결심도 무력해진 상황에서 내가 도움을 청할 곳은 오직 이 일을 시작하셨다고 믿고 있는 하느님 아버지밖에 없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고 천사가 일러 준 말씀에 이 형제의 미래를 맡겼다.

그리고 엉뚱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 술 먹었다고 이 집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찾아와 도움을 청할 때는 언제고 ‘나라는 놈은 어차피 약속을 지키지 못해 언젠가는 쫓겨날 텐데’ 생각하고 벌써 포기하는 거니? 난 포기 못한다. 처음에 약속한 대로 네가 임대주택을 마련할 보증금을 모으고 한글을 배우기 전까지는 결코 널 쫓아내지 않을 거야. 함께 사는 형제와 싸움을 하게 되도 그 형제를 내보낼 거다. 그러니까 그 형제가 과거의 너처럼 쫓겨나게 하기 싫으면 조심하렴.”

말을 끝내고 남은 술을 빼앗아 싱크대에 버리고 설거지를 시작하였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는 이사야의 말씀이 기억나서 조금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엉뚱한 그 말이 쉼터의 새 규정이 되었다. 형제의 행실에 상관없이 처음약속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그에게는 부비고 일어설 버팀목을 마련하였나 보다. 다음 날부터 그는 깊은 바다 속에 영혼의 닻을 내린 사람처럼 목소리와 행동거지가 차분해져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by Nerina Canzi

이 일을 겪으며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계약이 더 깊이 이해되었다.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십계명의 길을 통해 하느님과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네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는 계약을 맺지만 인간의 육신의 나약함으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였고 계명 또한 인간의 죄의 속성을 다스릴 만한 힘이 없어 그 계약은 효력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연민을 품으신 하느님께서는 그 계약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 성혈로 옛 계약을 완성하셨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피의 잔을 나누셨던 유월절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 곁에 잠시 머물러본다. 그 사랑의 기억을 더듬으며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리라. 모습은 다르지만.

지금 이 형제는 한글을 공부하며 새로 들어온 아홉 살 어린 형제와 잘 지내고 있다. 교리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또 다시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4년 전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 형제에게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리라. 이 형제를 묶어두고 있는 모든 어둠에게는 “내놓아라. 잡아 두지마라”(이사야 43장)고 선포하시며 구원 여정을 이미 시작하고 계셨다고 믿기에 나도 그의 손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성교회가 이 형제를 새롭게 빚어 세상에 파견할 때까지. 세례식 때 가톨릭성가 18번 3절을 화답송으로 부르고 있을 형제의 모습을 떠올리며 감사의 송가를 미리 올린다.

주님을 부르던 날
당신은 내게 응답하셨나이다.
당신 오른 손으로 구해주시고,
나를 위해 시작한 일 마치시리니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유수선 수산나 
초원장학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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