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루카, 빈곤한 사람과 하층민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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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루카, 빈곤한 사람과 하층민의 복음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4.1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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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복음과 사도행전-2

루카에 의한 복음

복음사가 마태오와 마찬가지로 루가도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설명으로 그의 글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루카는 마리아에 대하여 훨씬 더 많이 언급함으로써 별도로 다루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을 정도다(제4장). 여기에서는 성령의 권능에 따른 예수님의 공생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본다.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루카는 성령의 은총에 관해 세 번이나 명료하게 언급 한다.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는 비둘기 형상(루가 3,22)으로 예수님에게 내려오신다. 그 직후에 예수님은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뒤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나아가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가득 차 갈릴레아로 돌아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신다(루카 4,14).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서에서 기쁜소식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루카의 경우 복음의 의미는 같으나 표현을 달리 한다. 그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에 관해서 말하고 특히 가난한 이들의 지위를 강조한다. 루카 복음은 종종 “빈곤한 사람과 하층민의 복음”,“자비의 복음”이라고 불린다. 루카는 하느님 통치 아래서 단순하고 검소한 삶, 다른 이들과의 올바른 관계에서부터 오는 자유와 해방을 강조한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61장의 예언을 완수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4,18-19)

하느님 정의, 기쁜소식

정의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균형을 생각한다: 저울의 한 추가 한쪽으로 잘못 기울면 바로잡기 위하여 정의가 필요하다. 거기에다 우리는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가 저지른 잘못된 일들을 바로 하기 위하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이러한 생각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어떤 형태의 보복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높이면 우리를 끌어내리시고, 우리가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하면 그것을 돌려주게 하시고 너무 재미있게 지내면 하느님께서 균형을 이루게 하시어 고통을 받게 하신다. 그러나 이런식으로 하느님 정의를 생각 한다면 이것은 정말 나쁜 소식이다.

그러나 이런것이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다. 성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정말 당신 자신에게 진실할 때 정의롭다. 하느님께서는 정의의 저울이시다. 하느님의 정의란 우리가 종종 생각하듯이 하느님 자비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하나이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다. 하느님의 정의는 그분의 자비와 똑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통해서 보았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확고하고 무조건적인 용서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정의는 사랑이신 하느님이 그분의 존재와 일치하여 활동하시는 것이다.

Saint Luke

루카 복음서는 성서적 의미의 하느님 정의에 대한 묘사로 가득차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사회에서 내처진 사람들과 식사를 하신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1-32).

루카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린 회개한 창녀의 이야기를 한다: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7). 그는 자캐오라고 하는 파렴치한 세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신다고 하시자 정직한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을 한다(루카 19,1-10). 사람들이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받으면 그들은 스스로 정의롭고 사랑스럽게 된다. 루가의 복음서에만 이런 하느님의 용서하는 정의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15장에서 루카는 하느님 자비에 관한 기억할 만한 비유 세 가지를 제시한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고 기뻐하는 목자.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기뻐하는 여인(하느님의 여성적 형상에 주목하라),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자 기뻐하는 아버지 이야기이다. 이 세 이야기는 모두 자신에게 충실하신, 사랑이신 하느님의 형상이다. 이들은 모두 하느님 정의를 나타낸다.

이 예문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의 정의는 자신을 뛰어넘어 자신과 사랑을 남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목자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우매한 양이 돌아다니다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여인은 동전이 나타날 때까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저 자기 일만 하러 가지 않는다. 그는 그의 아들이 돌아오면 집으로 데려 올 수 있도록 매일 길을 내다본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주 정의롭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잊어버린 사람들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다.

탕자의 비유는 하느님 정의에 대한 또 다른 형상을 상기시키는데, 루카 복음은 물론 다른 복음서에서도 볼 수 있다. 용서하시는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베푸는 잔치의 형상이다. 유배시절부터 유다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야훼께서 굶주린 그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성대한 만찬 같은 것으로 생각해 왔다. 아무도 돌려 보내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마음껏 먹을 것이었다(이사야 55,1-2). 모든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몇 조각의 빵과 물고기로 오천명을 먹이신 일을 알려주며 이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 지를 보여준다(루가 9,10-17).

그러나 잔치에 초대받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루가는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관심거리를 버리고 그 초대를 받아 들여야 한다. 루가 시대에 메시아의 잔치에 약속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이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그 축제를 놓쳤다(루카 13,25-30). 루가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고 자기 개인 일이 너무 바빠서 거절한 손님들의 비유를 말한다. 그래서 집주인은 종들을 보내 그들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데려오라고 한다: 거지, 부랑자. 불구자, 소경 등등(루가 14,15-24). 우리는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가장 미소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정의를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의 자격보다 늘 더 많은 것을 주신다고 복음서는 지적한다. 사실, “가치, 자격”이라는 것은 문제도 않된다! 마태오는 아침, 점심, 저녁때 농장의 일꾼을 채용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든다. 날이 저물어 주인이 그들 모두에게 하루치 품삯을 주자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몇 시간 만 일한 사람들보다 돈을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말한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마태오 20,15)

하느님의 정의는 정말로 너그러우며, 그분이 당신 자신에게 정말로 진실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기 그지없다. 마태오가 다른 부분에서 말했듯이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운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에게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리신다(마태오 5,45). 즉, 그분은 그들이 자라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정의에 당혹해한다. 우리는 영적 생활에서조차도 자본주의자이다.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논리가 더 편하다. 우리는 그 규칙을 어기는 하느님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또다른 방식이다.

루카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넘치는 것을 받는다: 한 이름 없는 유다 소녀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될 것을 요청 받는다. 노동자들이 주님의 최초의 제자로 초대받는다. 병든 이들이 치유를 받는다. 삶이 망가진 사람들이 고쳐진다. 굶주린 이들이 배를 채우고 부랑자들이 환영을 받는다. 정신나간 사람들이 자유로워진다. 죽은 이들이 생명을 받아 일으켜 세워진다. 하느님의 정의는 자유롭다!

우리는 이런 끝없는 관대함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더 더욱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루카는 완전히 인간적이며 또한 신적으로 정의로울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 이처럼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깨닫고 마음을 열어 그분의 성령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처럼 관대해 질 수 있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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