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과 비르지타를 생각하며 "남의 아픔은 남의 아픔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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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과 비르지타를 생각하며 "남의 아픔은 남의 아픔이 아니다"
  • 유대칠
  • 승인 2017.04.05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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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4

[유대칠 칼럼-아픈 시대, 낮은 자의 철학 4]

권정생의 동화 <하느님의 눈물>이 생각난다. 토끼는 약한 동물이다. 호랑이도 사자도 아니다. 자신도 그들의 먹이가 되는 그런 약한 동물이다. 그런 토끼도 풀에겐 무서운 포식자다. 약한 토끼라지만 더 약한 풀을 뜯어 먹으며 살아간다. 그런 토끼가 풀의 아픔을 마주한다.

“칡넝쿨이랑 과낭풀이랑 뜯어 먹으면 맛있지만 참말 마음이 아프구나. 뜯어 먹히는 건 모두 없어지고 마니까.”

풀을 먹는 것은 좋지만 마음 아프다. 자신의 생명이 남의 아픔을 담고 있음을 깨우친다. 토끼는 힘들어한다. 그저 쉽게 먹던 풀도 먹지 못한다. 배고픈 시간을 보내며, 하느님께 부탁한다. '하느님처럼 보리수나무 이슬이랑,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을 먹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누구에게도 아픔이 되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해 달라 부탁한다. 이 부탁에 하느님은 이리 답한다.  

“그래, 그렇게 해 주지.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단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하느님의 답은 우리에게 힘들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세상, 남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여기는 세상, 정말 쉽지 않다. 힘들다.

권정생 선생님 생가 앞에서...사진=유대칠

소유물이 내 이름이 되었다

자신의 소유물로 자신의 지위를 말하는 세상이다. 몇 평의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그저 몇 평의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자본의 세상에서 자신이 어떤 가치를 가진 사람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소유물로 자신의 지위를 말한다. 소유물이 이름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소유는 종종 남을 아프고 힘들게 한다. 때론 죽게 한다.

생각해보자.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재개발이란 것을 한다. 산에 사는 그 많은 벌레들이 죽고 동물들이 죽고 식물들이 죽는다. 수 천 만년 자연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산도 죽는다. 태풍도 홍수도 이겨내던 산은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뿐이 아니다. 그곳을 터로 살아가던 이들도 누군가의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쫓겨난다. 나무도 꽃도 벌레도 동물도 산도 죽고 인간도 쫓겨난다. 때론 인간마저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더 많은 소유를 위해 남의 아픔과 눈물은 보지 않는다. 심지어 약자의 당연한 고통이라 생각한다. 참 슬프고 잔혹한 생각이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우리’

토끼는 약자다. 호랑이와 사자의 먹이다. 그런 토끼가 풀을 보면서 본 것은 어쩌면 자신일지 모른다. 자기 존재의 아픔을 풀에게서 본 것일지 모른다. 스스로도 약자인 토끼는 풀의 아픔에서 자신의 아픔을 보았을지 모른다. 죽어가는 풀을 보면서 자신의 마지막을 보았을지 모른다. 숲의 가장 강한 권력자 호랑이와 사자는 보지 못할 그 아픔을 스스로도 약한 토끼는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토끼와 풀은 ‘우리’가 된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우리’가 된다.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 될 때, ‘나’와 ‘남’은 ‘우리’가 된다. ‘남’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될 때, ‘우리’가 된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우리’가 된다는 것은 그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산다는 뜻이 아니다. 세월호와 광주 그리고 제주의 비극, 그 비극의 가해자들과 같은 시간을 살지만 그들과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고 싶지 않다. 남일 뿐이다.

오직 자신만의 욕심을 위해 남의 눈물과 아픔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이와 함께 '우리'가 될 순 없다. 그들에게 ‘남’의 아픔은 그냥 ‘남’의 아픔일 뿐이다. ‘남’의 아픔과 ‘나’의 아픔이 아픔이란 이름 앞에서 하나 될 때, 바로 그때 ‘나’와 ‘남’은 ‘우리’가 된다.

신비란 바로 이것이다. 초자연적인 어떤 기적이 아니라,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우리’의 아픔이 되는 바로 그것이 신비다.

자본의 논리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자본으로 평가하는 시대, 바로 이런 시대를 살면서, 자신에게 어떤 이익도 없지만 기꺼이 ‘남’의 아픔 앞에서 함께 분노하고 차디찬 바람에 촛불을 들 수 있는 그 하나 됨, 그것이 바로 ‘신비’다. ‘남’의 눈물과 아픔 그리고 분노를 외롭게 두지 않는 것, 그것이 신비다. 자신의 소유물로 자신의 지위를 말하는 세상에서 어떤 소유의 이득도 없음에도 남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외롭게 두지 않는 것, 바로 이것이 신비다. 그리고 그 신비의 힘으로 우리는 우리가 된다. 나와 남은 우리가 된다.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때

스웨덴의 비르지타

14세기 신비주의자 스웨덴의 비르지타(Bisgitta Suecica, 1302-1373)를 보자. 그녀는 부유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그 큰 소유를 통한 기쁨보다 가난한 ‘남’의 아픔을 보았다. 그녀에게 ‘남’의 아픔은 자신의 아픔이었다. 그것이 신비다. 풀에게 강자인 토끼가 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것이 신비이고, 부유한 이가 가난한 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것이 신비다. 자본의 논리 속에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을 한다. 병원을 세우고 직접 돌림병 환자를 간호한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의 아픔은 그저 남의 아픔이 아니었다. 자신 자신의 아픔이었다. 우리의 아픔이었다.

토끼는 풀을 먹지 않고 굶는다. 풀의 아픔을 그냥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기꺼이 토끼는 스스로 풀의 아픔을 위한 자신의 아픔을 선택한다. 남의 아픔이 남의 아픔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르지타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놓는다. 자신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아픔이 그저 남의 아픔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픔이고 우리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세월호의 아픔, 이 깊은 아픔도 남의 아픔이 아님을 기억하자. 바로 우리의 아픔이다. 기억해야한다. ‘남’의 아픔은 ‘남’의 아픔이 아니다. ‘남’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될 때, ‘나’와 ‘남’은 ‘우리’가 된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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