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복음을 따르는 생활, 바실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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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복음을 따르는 생활, 바실리오
  • 가톨릭일꾼
  • 승인 2017.04.0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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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basil the great, basilio magno (329-379)
St. Basil the Great Whispers of an Immortalist: Icons of the Venerables

나는
그래서... 사랑하고

그분은
그래도... 사랑하시고

-조희선 ‘차이’
 

빙앤두잉, 잘 살기

세상을 살면서 ‘돈벌이’란 꼭 필요한 것이면서 참으로 비루한 것이지요. 헐렁한 바람을 가슴팍에 맞이하는 것이면서 때로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입니다. 목숨 걸고 달라붙어야 하는 것이면서 내처 두어야 뒤따라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욕심처럼 손에 쥐기 어렵지만 필요한 만큼 은혜로 채워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사람들의 하느님이며,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주고자 귀한 아드님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가장 잘 사는 방법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말마따나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빙앤두잉(Being and Doing)이란 말처럼 ‘잘 존재하고 제대로 행동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분 안에 머물며 복음대로 살자는 것이겠지요. 그러자니 먼저 생각이 새로워야 하고, 뒤따라 새로운 행동이 시작되겠지요. 진부한 삶에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이란, 그 하루가 내일도 역시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되면 참 난감한 일이며 지루한 삶이겠지요. 빅터 프랭클의 말한대로 사람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왜 살지?”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되는 것이겠지요. 어차피 똑같은 일상이라면 내일도 모레도 그다지 새로울 것도 반가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숨이 끊어지면 동시에 내 모든 것이 허공에 흩어져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당장에 습관처럼 틀에 박힌 삶에 제동을 걸고 구멍을 내어 세상에 다시없을 신선한 바람을 들이마셔야 하는 것이지요. 그 바람이 성령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 삶은 거룩함의 영역에 불쑥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회운동을 할 때에는 온통 활동가들만 눈에 띄었는데, 시골에서는 농부들과 마음공부를 한다는 도인(道人)들만 어른거리더니, 지금은 아주 소박하게 신앙 안에서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반갑습니다. 그들은 평신도이고, 주부이고, 중년이고,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입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묵묵히 제 삶을 추스르고 겸손하게 행동합니다.

내가 그들을 잘 모르기에, 그래서 조금은 조심스러운 사람들이며, 유리잔처럼 가볍게 관계가 깨어질까봐 어렵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상식적이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시간을 소중히 여깁니다. 속살을 들추면 겹겹이 상처를 안고 있지만 엄살을 부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너무 바쁘고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엔 재빠르지만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는 인색하기에 소통(疏通)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께 마음을 의탁하려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활인이기에 신앙도 구체적이고, 자녀를 돌보듯이 이웃을 배려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습니다. 대의명분보다는 실제적인 필요에 응답할 수 있어야 ‘거룩함’도 관념성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부실한 저를 항상 긴장시키곤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칫하면 빈말을 내뱉기 쉽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장난을 하거나 제 생각에 취해 생활하는 자의 마음을 돌보지 못합니다. 몸은 고요히 있으나 생각은 부산합니다. 그래서 한사코 끊임없이 내 의식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려 다시 생각해 보라고 다그칩니다. 거기서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라 이르는 것입니다.

사진출처=onepeterfive.com

복음만이 그리스도인의 규칙

370년에 카파도치아의 대주교가 되었던 바실리오 성인이 바로 그러한 살아있는 복음이 무엇인지 확인해 주신 분입니다. 바실리오 뿐 아니라 그 가족이 모두 그러한 길을 걸어갔습니다. 주교였던 니사의 그레고리오, 세바스테의 베드로가 그분의 형제들입니다. 바실리오는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았는데, 특히 할머니는 그에게 교부 오리게네스의 정신으로 무장된 신앙을 전해주었답니다.

오리게네스는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 흑사병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오로지 그리스도인들만이 도망가지 않고 도시에 남아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병자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승과 교사 노릇을 하는 하느님의 공동체들은 세상 안에서 천상의 등불처럼 그들의 속의 낯선 사람들로 살고 있다.”

이처럼 바실리오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른 가치관에 따라서 복음대로 살아가는 ‘천상의 등불’로 남아 있기를 갈망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니케아종교회의를 둘러싸고 분열되어 있었으며 교황과 황제를 둘러싸고 주교들은 정치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실리오는 이를 두고, “교회는 바다에서 함대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 ... 이들에게는 성령의 이끄심에 대한 관심은 안중에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바실리오가 제시한 것은 ‘수덕적 복음주의’였지요.

바실리오는 고요한 곳에서 복음을 따르는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모형을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마태오 복음과 바오로 사도의 편지를 중심으로 <규칙서>를 만들었는데, 신약성경 안에서 1542절을 골라내서 믿음과 사랑, 거짓과 진실, 가난과 부유함, 아이들과 부모, 세례, 미사성제 등 수많은 항목아래 답변을 적어놓았습니다. <규칙서>에서 바실리오는 정말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무엇인지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이란 어떤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일까? 바로 사랑에 의해 활기를 갖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바로 거룩한 성경의 진리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는 것이다. ...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웃사랑의 본질은 무엇일까?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과 육신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 그것은 날마다, 매 순간마다 깨어있는 것이고,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완전한 상태 속에 있는 것이며, 미리 알 수 없는 어느 날 어느 시간에 갑자기 주님이 오실 때에 깨어 있는 상태로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다”(규칙서 80).

이처럼 바실리오는 복음만이 그리스도인의 규칙이며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카파도키아 괴뢰메 집성촌. 바실리오는 이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사진=한상봉

모두를 위한 수도생활

사람들은 바실리오를 ‘수도자들의 아버지’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세례를 받은 뒤 곧바로 수덕생활을 시작했으며, 수도생활이 교회 안에 널리 퍼지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자, 홀로 남은 바실리오의 어머니와 나중에 성녀가 된 마크리나(Makrina) 누이는 일찍이 도시생활을 접어두고 시골에 있는 자기 소유의 땅에서 서로 도우며 고독함 속에서 소박하게 살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기도하며 스스로 생계를 감당하며, 굶는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바실리오는 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도시를 떠나 고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실리오는 거친 사막을 선택했던 안토니오 성인과 좀 다른 장소를 제안합니다. 잘 다듬어지고 아름답고 고요한 장소입니다. 한 편지에서, 바실리오는 자신이 지내던 안네시의 풍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곳은 뒤로는 차고 맑은 물이 흐르는 높은 산이 있다. 그 산 아래로 넓은 평야가 놓여 있는데, 거기서 나무들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산과 평지 사이에 나무들로 가득 찬 숲이 마치 울타리처럼 둘러서 있다.”

그러나 이 장소가 제공하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리는 ‘고요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고요하고 평온한 장소에서 수도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말을 할 때에도 절도 있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들은 진지하고 겸손한 눈빛을 지니고 검소한 옷과 소박한 음식에 만족하며, 잠은 가볍고 짧아야 합니다. 스스로 노동하고 기도합니다.

이러한 수도생활은 세례를 받은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는데, 특히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온갖 열성을 다하는 사람들, 깊은 신심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이 세상과 욕망을 포기한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실리오는 홀로 수행하는 ‘은수자’의 생활에는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인간은 야생으로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고 믿었던 까닭이지요. 하느님은 인간을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도우며 살아가도록 창조하셨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계명을 채울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실리오는 많은 이들을 수도생활을 이끌었지만, 복음적으로 살기 위하여 덕을 닦고 수행하는 것은 비단 수도원 울타리 안에 있는 ‘수도자’에게만 요청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실리오가 본래 주장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 머물더라도, 세상과 다른 가치관, 생활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의 누이 마크리나처럼 분명한 수도자는 아니었지만 수행을 하여 성인이 된 사람도 있었고, 이 당시에는 수도자와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엄격히 구분되지도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앙적 확신이었으며, 하느님을 향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복음적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열성입니다.

나이 마흔쯤 되면, 그동안 땅의 삶에 몰두하였다면 한번쯤 하늘을 바라보고 진지하게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이 그저 장식품에 불과한 것인지, 아님 내 삶의 중심에서 빛을 내며 내 삶을 힘차게 이끌어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갈릴래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그 복음을 나 자신도 기쁘게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지 말입니다.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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