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공부하며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실패한 혁명가 예수의 복음적 열정, 참혹한 죽음[예수의 마지막 일주일-6강 : 금요일, 십자가 처형]

예수의 죽음에 관한 가장 익숙한 해석은 대속신앙에 따른 ‘희생적 죽음’이다. 예수는 세상의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해석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죄를 하느님이 용서하려면 상당한 희생이 필요하다. 평범한 사람은 죄인이어서 죄의 대가로 죽을 뿐이어서 전혀 흠결이 없는 하느님의 아들만이 ‘속죄양’으로 적절하다는 판단이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죄 때문에 그분이 고통받고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독실한 신자라면 “나도 그렇게 고통 받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기도 한다. 그분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자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다. 그래서 성인전에 등장하는 많은 성인들이 ‘고통 받기’를 자청했다. 예수처럼 오상(五傷)으로 고통받으면 오히려 영광으로 알고 즐거워하였다.

Anonimi magistri Cattedrale di Larino Agnus Dei

이런 대속신앙은 지배적인 신앙으로 자리잡는데는 1097년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의 견해가 영향이 컸다. 그는 인간과 하느님 관계를 법률적으로 이해했는데, 원죄를 포함해 인간의 불순종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이고, 불순종에는 형벌이 따른다. 여기서 형벌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르기 위해 ‘속전’으로 하느님이 마련하신 제물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희생’은 예수의 죽음을 다루는 한 가지 해석일 뿐이다.

십자가 사건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이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1코린 15,3)고 고백한다. 그러나 바오로의 편지는 ‘이야기’가 아니며, 해석이다. 물론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모든 기사는 ‘해석된 기사’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끔찍하게 돌아가신’ 스승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고 싶었다. 그 해석 가운데 하나가 ‘대속적 죽음’이라는 신앙화된 해석이다.

마르코복음은 거룩한 금요일 이야기를 세 시간 간격으로 구분해 말한다. 새벽에서 오전 9시까지, 오전 9시에서 정오까지, 정오에서 오후 3시까지, 그리고 오후 3시부터 저녁까지다.

오전 6시에서 9시까지, 빌라도의 재판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심문한 곳은 죽은 헤로데의 왕궁이었을 것이다. 로마총독들은 예루살렘 머물 때 그곳에 머무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코복음에서는 그곳이 ‘총독공관’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총독이 안토니아 요새에 머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문 당시, 빌라도가 예수에게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예수는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빌라도의 질문은 남루한 예수의 행색에 비추어 ‘너 같은 게 왕이라고?’ 하는 ‘조롱조’였을 테고, 응수하는 예수의 답변 역시 ‘조롱조’였으며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며 사실상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라고 발음할 때까지 한 마디도 입에서 떼지 않았다.

빌라도가 바라빠와 예수 가운데 한 사람을 놓아주려고 했다는 것은 관행상 납득하기 어렵지만, 사실이라 해도 예수 대신 바라빠를 놓아주었다면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보통 ‘강도’를 기록되어 있는 무리들은 로마제국에 도전한 혁명가들이었으며, 이들은 폭력에 호소했지만, 예수는 비폭력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결국 빌라도의 사형선고는 예수의 행위 역시 제국의 안위를 위태롭게 만드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다. 사실상 성전세력은 로마의 현지협력자였고, 이들의 안위를 흔드는 것은 곧 로마의 안위를 흔드는 것과 같다. 좀더 실질적인 이유는 당시 로마의 정황 때문에 지위가 불안했던 빌라도는 유대 성전세력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고, 어떠한 소요도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이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쳤던 군중들은 ‘제한된 소수의 무리’였을 것이다. 이날은 유월절 전날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중들은 경황이 없이 바쁜 날이다. 또한 헤로데의 왕궁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성전세력에 의해 포섭된 사람들로 추정되는 군중들은 ‘초대받은 시위대’였다. 성전세력은 한 주일 내내 기다렸다 예수를 잡아넣었는데 엉뚱한 군중들 때문에 일을 그르칠 이유가 없었다. 빌라도의 재판에 앞서 여론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요한복음은 빌라도가 예수의 사형선고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결국 예수의 고발자들은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요한 19,12)라고 협박해 빌라도의 결심을 굳혔다고 전한다. 빌라도 총독은 막판에 예수를 가리키며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하고 물었고, 수석 사제들에게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라는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빌라도는 밑질 게 없었다. 이제 유대인 촌뜨기 한 명만 처형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사마리아 출신이었을 로마군인(외인 보병대)들에게 인계된 예수는 관례에 따라서 다른 정치범들처럼 고문을 당하고 모욕을 당한다. 군인들은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고 가짜 대관식을 벌이곤 다시 예수의 본래 옷을 입혀서 형장을 끌고 갔다. 매질하고 옷을 벗기는 행위는 죄수에게 무력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안겨줘서 처형에 순응하게 만든다.

처형장은 ‘해골 터’라는 뜻의 골고타였다. 전에 채석장이었던 묘지였다. 성벽 바깥에 있는 골고타는 헤로데 궁전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이것에 지금은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다. 동방교회에서는 아나스타시스(Anastasis), 즉 부활교회라 부른다. 예수가 지고 갔던 가로목에는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나자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이 반대했지만 빌라도가 굳이 이 명패를 달아놓은 이유는 명백하다. 로마제국이 유대인의 왕을 능가한다는 조롱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byzantinemuseum.gr

9시부터 정오까지, 십자가에 못 박다

마르코복음은 아침 9시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기록했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 공포정치의 한 형태였다. 주로 노예들을 겨냥한 처형방법이었으니, 십자가형은 ‘노예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주전 2세기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한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6,000명의 노예를 십자가에 못 박아 로마로 가는 길목에 세웠다. 예수가 ‘압바’라고 부른 하느님이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로마는 하느님 백성을 못 박아 온 셈이다.

한편 십자가형은 로마의 법과 질서를 어지럽힌 모반에 대한 형벌이었다. 즉 로마의 평화를 뜻하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위협하는 반정부 운동가들을 처벌하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십자가형은 화형이나 산 채로 짐승에게 던져지는 처형처럼 중대범죄에 적용되었는데, 고통과 치욕을 치를 뿐 아니라 시신을 수습하기도 어려웠다. 십자가형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사형수가 아주 낮게 매달린 경우에는 까마귀와 굶주린 개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종종 죽은 뒤에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유해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서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복음서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며 빌라도에게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마태 27,25)이라고 하였지만, 실상 십자가형은 유대인에게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일종의 ‘제국의 테러’였다. 로마총독 게시우스 플로투스는 자신을 조롱한 유대인들과 귀족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족쇄를 채웠다가 십자가형을 내였다. 그리고 헤로데 대왕이 죽은 B.C 4년 발생한 반란을 진압한 퀸틸리우스 바루스 장군은 반란에 가담한 2,000명의 유대인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말할 때에도, 로마의 형벌을 예상하셨을 것이다.

한편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이 회개한 강도와 군중과 더불어 예수님을 조롱하던 강도 사이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이들이 반란군에 해당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마르코복음처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그분께 비아냥거렸다”(마르 15,32)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어둠이 천지를 덮다

“낮 열두 시가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마르 15,33)고 한다. 이 어둠의 원인이 ‘일식’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개기일식의 경우에 보통 몇 분 동안만 계속되므로 복음서의 보도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 어둠은 자연적 또는 초자연적 사건이라기보다 마르코가 서술한 종교적 상징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대의 세계관에서 줄리어스 시저가 죽을 때 혜성이 떨어진 것처럼 지상에서 특별한 사건이 벌어질 때는 하늘의 징조가 동반된다. 어둠은 고난, 애통, 심판과 관련된 이미지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아직 낮인데도 해가 기울었다”(예레 15,9)고 전한다.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경고하며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아모 8,9)고 했다.

사진출처=vk.com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예수의 죽음

오후 3시경 예수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복음서는 전한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이는 복음사가가 시편 22편에서 인용한 것이든 예수의 진언이든 예수의 절박한 심경을 담은 것만은 분명하다.

오후 3시라면, 예루살렘 성전 안뜰에서 희생동물들이 도살되기 시작하는 시각이었고, 온 성안이 피비린내로 진동했을 것이다. 이 시각에 명절에 참여한 사람들은 어린 양의 목을 자르고 죽은 양의 가죽을 벗겼다. 그동안 제사장들은 양의 피를 대야에 모았다. 이 피는 제단 주위의 계단에 뿌려질 것이다. 내장은 따로 모아 제단에서 태워졌다.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레위인들은 음악을 연주하고 시편을 노래하거나 암송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명절 때마다 도살된 양의 숫자가 25만6,500마리였다고 하는데, 가로 70미터, 세로 20미터에 불과한 성전 안뜰에서 2시간 안에 치르기에는 과장된 숫자로 보인다. 다만 중요한 것은 성전의 반대편에 있는 골고타에서는 같은 시간에 예수의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점이다.

예수는 신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즉시 죽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은 예수가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께 절규했다고 전하며, 루카복음은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라고, 요한복음은 “다 이루어졌다”(19,30)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실패한 혁명가의 죽음이요, 종교적 살인행위이며, 제국의 안위를 위한 희생이었다.

예수는 빌라도총독의 예상보다 빨리 숨졌다. 죄인들은 십자가 좌대에 앉을 수 있었기 때문에 며칠이나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 오르기 전에 심한 매질로 깊은 부상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0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십자가 가로막대를 지고 갈 수 없었다. 이것은 매질과 못질로 인한 과다출혈로 이미 탈진해 있었기 때문에 ‘저혈량성 쇼크’로 죽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에게 가해진 마지막 일격이었으며, 마지막 채찍질이었다. 이를 두고 <마지막 일주일>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날 아침 예수님이 병사들에게 죽도록 맞았던 것이 결정적인 사인이다. 선고가 내려지기 전에 이미 유죄가 결정되었던 것처럼, 주님은 못에 박히기 전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신 셈이다.”

공관복음에서는 이때에 성전의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졌다고 전한다. 25미터 가량의 폭을 가진 이 휘장은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일 텐데, 이게 찢어졌다는 것은 대사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가 모든 이에게 열렸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거처에 대한 만인의 입장이 허락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하느님의 영이 이제 성전을 떠났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느님의 퇴장이다.

이 휘장은 성전이 우주의 중심임을 나타내는데, 바빌로니아에서 들려온 천으로 짜고, 청색, 자색, 홍색으로 수를 놓았다. 정교한 아마포는 땅을 가리키고, 청색은 공기, 자색은 바다, 홍색은 불을 상징했다. 마태오복음은 휘장이 찢어진 것을 지구가 흔들리고 바위가 쪼개지는 것과 연관시킨다. 즉, 우주의 중심임을 뽐내던 성전이 와해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예수의 죽음, 그 순간에 로마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말함으로써, 로마군인의 입으로 “이제 더 이상 황제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선포된 것이다. 즉, 예수의 처형을 책임지고 예수를 가까이에서 올려다보았던 백인대장의 선언에서 제국은 스스로를 부정한다. 한편 그 자리에 남성 제자들은 없었다. 아마도 여자들은 좀더 안전했을 것이다. 예수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녀들의 독립적인 정체성과 지위를 인정해주었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catholicallyear.com

오후 6시, 예수의 장례

예수가 죽자, 안식일 시작되기 전에 예수의 장례를 서둘러야 했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 시신을 청해, 빈 동굴에 안치시켰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요셉이 “명망 있는 의회 의원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열심히 기다리던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마태는 그를 ‘예수의 제자’라고 하지만, 루카는 다만 의회의 심판에 동조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하고, 요한복음은 그가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고 전한다. 아울러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알로에)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져 왔다고 덧붙였다. 예수의 무덤까지 따라와 확인한 사람은 여인들이었다.

예수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유월절 밤이 찾아왔다. 유월절에는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가 모여서 양고기를 먹었다. 그날 밤 예루살렘은 불빛으로 반짝였고 양을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골목 어디서나 순례자의 무리가 몰려다녔다. 일종의 길거리 축제가 떠들썩하던 밤에, 예수의 죽음을 목격한 이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가장 길었던 한 주>에서 닉 페이지는 이들이 아마도 예수와 마지막 식사를 나누었던 다락방에서 잠시 머물렀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리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분은 왜 죽었을까?

세상의 죄, 사회적 불의에 희생된 예언자

넓은 의미에서 예수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고 볼 수 있다. 마틴 루터 킹, 모한다스 간디, 오스카 로메로,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정 때문에 희생당했다. 이를 두고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의 희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가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고 딱 한 번 말한 바 있지만, 그의 세 번에 걸친 수난예고에서 세상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간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예루살렘에서 적대자들에게 의해 처형될 것이라고만 언급한다.

그러나 “사회적 불의”를 “세상의 죄”라고 여기고, 그런 사회를 허용한 “우리들의 죄”를 이르는 것이라면, 예수가 “세상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맞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그리스도인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회심’을 불러올 수는 있지만 세상의 죄를 면제해주기 위해 그분이 죽은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게 옳다.

마르코복음은 예수의 죽음을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 때문에 권력자들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본다. 성전세력이 그를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은 성전에서 예수가 소동을 벌인 뒤였다. 이에 로마의 현지협력자였던 성전세력은 예수를 제국의 관청에 넘겨주었고, 제국의 관청은 정치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그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물론 복음사가들은 예수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로 해석했다. 사후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해석하면서, 이 사건은 미리 알려져 있었고, 미리 예상되었던 하느님의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앓을 병을 대신 앓아주었다”는 ‘하느님의 종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생각이 예수의 죽음을 ‘대리적/보상적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생각은 과거(구약성경)의 한 구절이 지금 발생한 사건(복음서)을 설명하는 데 이용되기 시작하면, “예언의 역사화”가 진행되며, 현재 사건에 대한 신뢰성를 높여준다.

이런 역사화의 대가는 마태오였다. 마태오복음은 예수와 그의 가족이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도피한 뒤에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온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호세 11,1)는 호세아의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본다.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받은 “은돈 서른 닢”(마태 27,9) 역시 “나는 은 서른 세켈을 집어 주님의 집 금고에 넣었다”(즈카 11,13)의 즈카르야 예언서의 발언과 관련시킨다. 실상 복음서 내용 중에는 ‘예언의 성취’를 입증하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차용한 구절들이 대단히 많다. 특히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시편 22편이 상당수 활용된 정황이 있다. 그 내용은 그냥 대조해 봐도 느낄 수 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22,2)
“저는 인간이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 저를 보는 자마다 저를 비웃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흔들어 댑니다.”(22,7-8)
“주님께 맡겼으니 그분께서 그자를 구하시겠지. 그분 마음에 드니 그분께서 구해 내시겠지.”(22,9)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22,19)

이런 구절들이 거의 다 예수에게 그대로 적용되어 예수의 죽음은 세세한 부분까지 이미 다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시편 22장은 고난당하는 의인의 이야기이며, 멸시와 조롱을 받지만 결국 하느님의 구원과 보호에 감사하게 된다.

마르코복음이 이처럼 종종 시편을 이용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세상의 권력에 의해 정죄 받았지만 하느님에 의해 그 정당성이 입증된 의로운 사람의 고난과 죽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상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었다. 결국 “돌아보건대” 예수는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성취했다고 보는 것인데, 이런 방법을 ‘회고적 방법’이라 부른다. 제자들은 예수의 삶과 죽음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얻은 ‘의미’를 예수 이야기에 투사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일까? <마지막 일주일>의 저자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의로운 사람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고, 유다의 배신 역시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 다만 사건이 그렇게 진행되었을 뿐이고, 그 의미는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에서 예수의 죽음은 사실상 불가피했다. 지배체제에 그렇게 공공연히 도전하는 사람은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헤로데 안티파스에게 도전했던 세례자 요한도 참수당했다. 같은 일이 예수에게도 일어난 것이고, 몇십 년 지나서 바오로와 베드로와 야고보도 그런 일을 당하게 된다. 그렇다고 예수는 무자비한 지배체제의 불운한 희생자는 아니었다. 그는 열정이 충만한 농민 지도자였다. 그의 열정과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있었고, 이러한 종교-정치적 저항이 죽음을 불러왔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가톨릭일꾼 기사는 상업적 용도 아니라면 출처를 밝히고 누구나 퍼갈 수 있음>

한상봉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