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사막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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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사막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안토니오
  • 한상봉
  • 승인 2017.03.16 1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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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Antonius Abbas (251-356)

새벽별은
가장 먼저 뜨는 찬란한 별이 아니랍니다
가장 나중까지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별,
그래서 어둠이 깊어질 때 비로소 밝게 빛나는
희망의 별이랍니다

지금, 모든 별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사라지고 돌아가는 때,
우리 희망의 새벽별은
지친 그대가 잠시 잠들어 쉴때
혼자 밤하늘을 성성하게 지키다
아침에 눈뜬
그대 밝은 미소를 보고서야
붉은 햇덩이에 손 건네주고
소리없이 소리없이 사라지는 거죠

앞이 컴컴한 언 하늘에
시린 첫마음 빛내며 떨고 있는
바보 같은 바보 같은
눈물나게 어리숙한
나는
당신의 새벽별

_박노해, 새벽별

박노해 시인의 ‘새벽별’을 읽어 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더욱 충만하게 살아있기 위하여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만 새벽은 오는 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태양마저도 다만 새벽별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새벽이 올 때까지 빛나는 별이나 새벽이 되어서 빛나기 시작하는 별이나 모두 새벽별이지요. 밤이나 낮이나 빛이 되어 세상의 모든 길을 비추어 주는 사람은 아름다운 게지요. 우리 교회 역사 안에서 그 아름다움의 첫길을 열어간 사람들이 있지요.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던 사람들입니다.

사막의 사람

Saint Anthony the Great

4세기경,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승인되었을 즈음, 교회 안에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바야흐로 로마제국의 보호아래 번영을 약속받은 상태였는데, 이 참에 다시 안전지대를 떠나 사막으로 길을 나서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시리아, 이집트 지역에서 사막에 들어간 이들은 저들끼리 작은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고, 외따로 떨어진 동굴이나 버려진 폐허에서 홀로 살기도 했습니다. 고독 속에서 그들은 기도와 단식, 성서묵상과 단순한 노동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교회가 스스로 태양이 되어 어둔 밤을 비추어 주던 별빛에서 멀어져 갈 위험에 빠져있을 때, 이들은 스스로 태양을 마다하고 새벽별로 남기 위하여 어려운 길을 택한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복음적 진실을 몸으로 살고자 열망하는 이들의 모범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안토니오 성인입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이집트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이 채 되기 전인 스무 살 무렵에, 미사 중에 복음서를 통해 부자청년에게 예수께서 이르신 말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모두 버리고 나를 따라 오너라.” 하시는 명령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안토니오는 그 말이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새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유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믿을만한 동정녀들에게 누이동생을 맡긴 뒤에 광야로 나갔습니다. 복음적 단순성에 대한 단호한 응답이 그를 광야로 나서게 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 마을과 사막의 경계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조용한 곳에 머물며 살았는데, 그가 이윽고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마음이 견고해진 뒤로는 아라비아사막에 있는 거의 다 허물어진 언덕 위 요새 안에 벽을 쌓고 20년 동안 오로지 노동과 묵상을 하면서 은둔하여 수행하였습니다. 그가 은수자로 사는 동안에 한 철학자가 찾아와 어떻게 ‘책의 위로’ 없이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안토니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책은 창조된 자연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싶을 때마다 내 앞에는 책이 늘 열려 있습니다.”

새로운 몸, 새로운 영혼

20년 만에 안토니오가 요새에서 다시 마을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의 몸이 예전과 다름없음을 보고 놀랐습니다. 운동부족으로 살이 찌지도 않았고 단식이나 악령과의 싸움으로 야위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깨끗했으며 슬픔에 사로잡히거나 쾌락으로 느슨해지지도 않았고 기쁨이나 낙담으로 동요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군중들을 보았을 때 화를 내지도 않았고, 그들이 달려와 자신을 환영하는 데도 우쭐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성적인 반듯함으로 평정심을 유지하였으며, 부질없는 욕망 때문에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일대기를 쓴 아타나시오에 의하면 “그는 결코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평온함을 유지하였으며, 절대로 우울하게 보이지 않았고, 마음은 즐거웠다.”고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 안토니오는 더 이상 사람들의 얄팍한 생각에 휘둘리지 않으며 하느님에게서 분리되지 않은 채 자발적으로 세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은수생활은 수행자로 하여금 더 이상 세상으로부터 도피시키는 행위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완전한 사랑을 효과적으로 얻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몸이 아파 고생하는 사람을 치유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서 마귀를 쫒아내고,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로했으며, 서로 등을 지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화해시켜 친구가 되게 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보다 위에 놓일 수 없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있을 좋은 일과 우리를 사로잡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수도승 공동체의 원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안토니오를 통하여 사람이 더 이상 분노, 두려움, 탐욕, 그리고 자만심의 노예가 되지 않을 때 참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평정심에서 나오는 친절, 온유, 그리고 연민으로 표현되는 균형과 온전함의 상태가 “영혼의 즐거움”을 이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Saint Anthony the Great: This Saint, know as the Father of monks, was born in Egypt in 251. Upon hearing the words of the Gospel: "If thou wilt be perfect, go and sell what thou hast, and give to the poor" (Matt. 19:21), he distributed all he had to the poor, and departed to the desert, where he became an example of virtue and a rule for monastics.

마음을 향해 열려 있는 사막

등반가요 모험가이며 유럽의회 의원이기도 했던 행동하는 철학자, 라인홀트 메스너는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라는 책에서 사막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막은 침식된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암석으로 된 산이 수백만 년 동안 부서져 돌 조각과 모래로 바뀐 것이다. 물질로 볼 때 사막은 붕괴된 돌산이어서 그 산만큼이나 융기해 있었다. 사막은 또한 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준다. 사막의 텅 비어 있음이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고 언제나 경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자신 안의 텅 비어 있음에 대한 경탄은 아닐까?

모세, 그리스도, 무하마드 등 종교 창시자들만 사막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기 위해 사막으로 갔다. 그곳에 기분을 전환시켜 줄 수 있는 오락거리가 있는 게 아니다. 사막에서는 사방 어디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활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에서는 우리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함과 만난다. 사물과 자극이 없는 곳에서 인간은 우선 자기 자신에 놀라 움찔한다. 그리고 완전히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을 발견한다.”

안토니오 성인을 포함하여 초기 수도승들은 단지 물질적 쾌락을 상대하지 않기 위하여, 또 자신을 징벌하기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이 아닙니다. 관습, 일상, 그리고 사회적 기대치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더 깊고 풍요로운 실존에 “깨어있기 위하여” 사막으로 간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의 참다운 자아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교부들은 가짜 자아, 형식적인 자아, ‘세상’ 속에서 사회적인 규약 아래서 만들어진 자아를 완전히 거부해야 했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은 또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하느님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은 사람들이 앞서 그려놓은 길,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길이 아니었다. 교부들은 어떤 다른 사람이 고정시켜 놓은 ‘주어진’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홀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을 추구하였다.”

사진출처=pixabay.com

고비 사막을 넘었던 메스너 역시 기존의 자기 삶에 안주할 수도 있었으나 나이 드는 법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사막으로 떠났다고 고백합니다.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내 삶을 들여다보고 싶었으며, 내 마음 속의 사막 한가운데서 멈추지 않고 오아시스를 향해 행군하고 싶었다고 말입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세포를 낱낱이 열어 하느님의 음성을 호흡하듯이 느끼려는 것입니다. 메스너는 사막이 어디서나 숨처럼 몹시 단조롭고 너무나 고요하여, 물을 마시거나 귀를 기울이기 위해 멈출 때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곤 했습니다. 그곳에선 고요와 드넓은 대지가 마치 시간을 삼켜버린 것 같았고, 귓청을 통해 예민하게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만 대지의 살아 움직임을 느끼게 합니다. 여기선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 돌들 사이에서 부는 산들바람 소리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생생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하느님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보다 더 나은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마음속에 도사린 사막은 무덤과 같습니다. 무감각한 삶은 온갖 광고와 소비주의 문화에 길들여진 채로 번잡합니다.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은 미로에 가로 막힌 채 우리 영혼은 쓸데없이 방황합니다. 충만한 삶이란 단순하게 먹고 마시며 또한 미친 듯이 행동에 들떠있는 소란스러움이 아닙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행복하고 참으로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를 위해 반드시 사막이나 수도원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막의 교부들은 우리가 주어진 삶의 중심에서도 내면의 ‘사막’을 경험하고 ‘오아시스’를 발견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상품을 거부할 용기입니다. 인생의 표면만을 바쁘게 미끄러지듯 달리지 말고, 필요 이상의 호기심을 접고, 마음속에 ‘텅 빈 사막’ 하나쯤 그려 넣는 일입니다. 모두가 당연하게 가고 있는 생의 길목에서 슬쩍 “아니요!”라고 발음(發音)해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이정표 삼아
열려 있는 길로 걸어갔을 따름인데,
어쩌죠, 길 끝에 길이 닫히고
길은 이미 길이 아니라는데.
숲으로 가야 하나요?
아님 광야로.
안개 속 당신은
어디

_한상봉
 

[출처]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한상봉, 이파르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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