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때문에 지옥문 앞에 서 있는..." 거룩한 코미디, 단테의 ‘신곡’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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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때문에 지옥문 앞에 서 있는..." 거룩한 코미디, 단테의 ‘신곡’을 생각하며
  • 한상봉
  • 승인 2016.10.17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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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현재에서 반복되는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때로 뼈아픈 기억이다. 내 딸아이의 생일이 12월 28일인데, 그날은 ‘무고한 아기들의 순교 기념축일’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예수님 대신에 헤로데의 병사들에게 죄 없이 살해당한 아기들을 기억하는 날이다. 이 아이들의 죽음 때문에라도 예수님은 평생 시름에 겨워 하셨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액면 그대로 ‘역사’는 아닐지라도, 그 당시 로마의 식민지 이스라엘의 가난한 이들이 처했던 곤경을 잘 드러내 준다.

백남기 어르신의 죽음이나 세월호 참사처럼 억울하고 원통하고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매일매일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계약직, 비정규직으로 밀려나는 사람들도 죽음을 맛보고 있다. 살아도 죽은 목숨인 사람이 지천인 이 세상을 요즘 사람들은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지옥이 따로 있나, 지옥 같은 삶이 지옥이다.

그런 지옥을 그렸던 시인이 있다. <신곡>을 지은 단테(Dante)다. 깊은 신심과 이상적인 정치적 비전을 지녔던 단테가 현실정치에서 겪은 절망을 배경으로 사랑의 빛 안에서 구원을 희망했던 작품이 <신곡>(La Divina Commedia, 거룩한 희극)이다. 기득권자에게는 섬뜩하고 사랑 많은 이에게는 위로를 주는 대서사시이다. 단테는 살아서 지옥을 경험했고, 죽어서야 겨우 천국을 희망했다. 15세기 피렌체의 공화주의자였던 단테는 교황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점령하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을 쳤고, 추방된 단테는 객사했다.

“순례자, 거지임에 틀림이 없다. 내 의지와는 달리 운명의 상처들이 드러나고... 정말 나는 돛 없는 배였고, 태어나면서부터 잠수부처럼 이 항구에서 저 해안으로, 애달픈 가난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을 따라 떠돌아야 했다.”

보티첼리가 그린 <신곡> 삽화

지옥에서 만난 교황과 성직자, 정치가들

<신곡>은 1300년 부활절 기간에 사후 세계로 순례를 떠나는 것으로 설정된 작품이다. 단테는 지옥에서 3일, 연옥에서 3일, 천국에서 하루를 머물며 낯익고 파렴치한 수많은 망자들을 만난다. 단테는 <신곡>에서 당대의 두 교황을 지옥에 던져 넣었는데, 하느님 자신이 그들의 행위에 대한 노여움으로 얼굴을 붉혔다고 묘사하고 있다. 성 베드로가 이들을 향해 “너희는 내 무덤을 피와 더러움을 담는 그릇으로 삼았다”고 선언했다.

플로렌스를 타락시킨 정치가 보카 데글리 아바티는 발끝에서 목까지 얼음에 잠겨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지옥에서 그를 만난 단테는 아바티의 머리털을 붙잡아 한손 가득 뽑아냈다. 단테는 “어떻게 악한 사람이 잘사는 상황이 계속될까?” “만일 하느님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다면 왜 그 힘을 쓰지 않을까?” 질문하면서, 그가 생전에 만난 악한 정치가와 교황, 성직자들을 지옥에 처넣었다.

당대의 알렉산더 6세 교황은 전쟁을 부추겼으며, 부인이 다섯이나 되었는데, 그 자식들 중에는 교황군대의 사령관이 된 체자레 보르지아도 있었다. 이들은 전쟁포로들을 바티칸 뜰에 끌어다놓고 활쏘기 과녁으로 삼아 즐겼다. 결국 체자레도 죽임을 당하고, 교황도 독살되었지만, 뒤이은 율리우스 2세 교황이나 레오 10세 교황 시절은 마르틴 루터가 촉발시킨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지옥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무덤

한편 이들은 궁전과 성 베드로 성당, 시스티나 성당 등을 지으면서 예술가들을 먹여 살렸다. 이들에게 고용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면서, ‘최후의 심판’에 천둥으로 내리치는 그리스도, 그리고 지옥에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성직자들을 그려 넣었다. 그는 교회개혁을 갈망하다가 파문당한 도미니코회 수도자 사보나롤라의 예언, 그리고 단테의 분노를 그림에 담았다. 세상과 교회의 권력을 쥐었던 자들은 심판 앞에서 ‘벌거벗은 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단테에게 지옥은 ‘탐욕스러운 자들의 무덤’이었다. 그리고 탐욕이란 “사랑 없음”의 다른 말이다.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 관심 없는 자들의 처소가 지옥이다. 토머스 머튼은 “천국의 문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지옥문 역시 어디에나 있다. 가련한 사람들의 시선을 외면한 그 자리가 지옥문이며, 굶주리는 사람들 앞에서 밥을 먹는 식탁이 지옥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에서도 지옥문 언저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인사청문회’에서 늘 경험하고 있다. 평생 써도 다 쓰고 가지 못할 만큼 벌어놓은 돈이 있어도 통장에 늘어나는 이자수익 자체에 마음을 묶어둔 사람들도 많다. 암처럼 증식할 줄만 알지, 덜어내고 베푸는데 인색한 부자들이 “탐욕 때문에” 지옥문 앞에 줄지어 있다.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고 무죄한 것이 아니다. 남아도는 재산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든다. 탐욕은 탐욕을 낳고, 탐욕은 지옥에 이른다. 미켈란젤로가 한국사회의 지옥도를 그린다면, 누구 얼굴이 제일로 또렷할지 궁금해진다.

라파엘로, 식스투스의 성모 (1512/13), 드레스덴 미술관 소장.

지옥문 앞에 서 있는 라파엘로

미켈란젤로와 함께 바티칸을 장식했던 라파엘로 역시 지옥문 앞에 있었다. 라파엘로는 화색이 도는 얼굴과 상냥한 성품, 황실화가의 아들답게 탁월한 재능으로 유쾌한 매력을 발산해 돈방석에 앉아 명예도 누릴 수 있었던 행운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연애와 방종으로 열병을 얻어 37살에 운명을 마친 게 야속할 따름인 사나이.

라파엘로가 누린 행운의 비결은 지배계급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성화 안에는 당대 교황과 상인과 귀부인들의 얼굴이 비친다. 그가 그린 초상화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목을 내밀고 있으며, 배가 불룩하고, 혈색좋은 얼굴을 가진 지금 한창 잘 살고 있는 모습이다.

심지어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 마리아는 누추한 나자렛의 시골집이 아니라, 궁전에서 천사에게 ‘예수아기 잉태’의 소식을 듣는다. 이른바 라파엘로는 단아한 ‘명품’을 지향했다. 러파엘로가 그린 여인들은 십자가 아래에서도 머리를 단정하게 여미고 울부짖는다. 라파엘로의 그림은 ‘식스투스의 성모’에서도 그러하듯이, 인물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우아하지만 생기가 없다. 마리아 발밑에서 한가롭게 딴청 부리는 아기천사들의 표정조차 몽롱하다. 오히려 이들의 표정보다는 엔제리너스 커피숍의 아기천사 아이콘이 더 생동감 있다.

어차피 작품에는 화가의 영혼이 담기기 마련이다. 권력자와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떼돈을 벌고, 늘 사람이 꼬이고 여자가 많았던 쾌활한 라파엘로는 가난하고 ‘고독한’ 미켈란젤로를 조롱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런 경박한 라파엘로를 경멸했다.

경박한 라파엘로는 품위있는 지배층을 그렸지만, 심각한 미켈란젤로의 그림에는 고통과 슬픔에 가득한 인간이 늘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인간은 자기 주위의 세상이 울 때 웃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 미켈란젤로에게 세상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라파엘로가 성화조차도 당대의 권력자나 귀부인을 모델로 그렸던 것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평생 한 컷의 초상화도 그리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처럼 광부와 농부들처럼 가난한 이들을 연모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농부와 우편배달부의 초상화를 성화처럼 그렸는데, 우리는 우리가 그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닮는다. 상위 1%의 금수저 계급에 올라가고 싶었던 어느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이른바 ‘흙수저’들을 “개와 돼지”라고 불렀듯이,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머문다.

한번 만나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

<신곡>에서 단테는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 속에 고통스런 비명과 악취가 진동하는 지옥을 지나 참회와 회개 속에서 구원의 그날을 기다리는 연옥을 통과했다. 그는 천국에 도달하기에 앞서 영원한 사랑 베아트리체와 만나서, 그녀의 손에 이끌려 천국으로 날아오른다. 비록 작품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단테가 마침내 하느님의 빛으로 해체되어 궁극적인 구원의 경지에 오른 것은 다행한 일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평생 두 번밖에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한번 만나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을 구원한다. 신앙인들에게 그런 사랑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심수봉은 <백만송이 장미>라는 노래를 부르며 “냉정한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빛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에 안기는 단 한 번의 체험을 통해 사랑을 할 때만 피는 장미를 수백만송이 피우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갔다고 했다.

결국 사랑할 능력조차 은총이고, 사람들의 사랑은 그 사람이 하느님 은총 안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이들에게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 말씀처럼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 되고, 천국문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그 사랑을 고대하며, 우리는 지금 지옥문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내 사랑이 얼마나 큰지 가늠해 볼 시간이다. 백남기 어르신은 그 모든 사랑의 시간들을 넘어서 그분 곁에서 계시겠지 잠깐 생각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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