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예술 공간
임대사업이 문화선교사업은 아니다. 얼마 전 천주교 광주대교구 가톨릭박물관의 솔방울학당에 다녀왔습니다. 평일 오후 두 시, 300여 명의 청중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인류사의 커다란 문화적 변곡점에서 종교와 예술은 무엇을 함께 해야 하는지, 변화하는 인간과 신앙을 어떤 언어로 이야기해야 하는지 묻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한국 교회의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낯선 시대의 물음을 피하지 않고 신앙의 자리로 받아들이는 용기, 그 물음을 함께 배우려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2년 광주대교구가 문화예술을 위한 본격적인 공간을 마련한 일은 한국 교회에 선구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재정적으로 더 여유 있는 교구들도 쉽게 내딛지 못한 걸음입니다. 서울교구와 대구교구와 같이 큰 교구에서도 문화예술을 말하면서도 공간 운영의 무게가 오로지. 임대와 수익에 기울어지는 현실을 돌아보면, 그 선택은 더욱 귀하게 다가옵니다.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문화공간 임대업을 문화선교로 착각하는 게 우리 교회의 솔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독 천주교 광주교구 박물관은 전시와 교육을 통해 과거의 신앙을 오늘의 삶과 만나게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시대 박물관 역활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무엇을 물려받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살아 내고, 다음 세대에 무엇을 건네야 하는지를 전문기획자들이 연구하며 배우는 터전이였습니다.
오래된 성물과 작품을 바라보는 눈길이 오늘의 인간에게로 향하고, 오늘의 질문이 미래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지는 자리. 저는 그곳에서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의 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2. 능력의 크기보다 사랑의 깊이를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그림을 만들며 인간의 판단에 관여하는 시대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고 몸과 정신, 관계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기술 앞에서, 이른바 포스트휴먼 시대의 질문은 신앙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능력이 커질수록 그 힘의 목적을 분별할 책임도 커집니다. 누구를 위한 발전이며, 그 과정에서 누구의 삶이 밀려나는지 물어야 합니다.
종교는 이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강해지려 하는가, 더 깊이 사랑하려 하는가. 편리함과 효율을 얻는 동안 약한 이의 자리는 좁아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바라봅니다. 존엄은 뛰어난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늙고 병들어도, 기억을 잃고 타인의 돌봄에 의지해도, 한 사람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생산성과 경쟁력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시대일수록 교회는 이 진실을 분명히 증언해야 합니다.
그 증언은 개인의 선의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기준과 제도, 기업과 국가의 책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맡겨진 힘의 가치는 가장 약한 이의 삶을 어떻게 대하는지에서 드러납니다.
3. 예술은 말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만나게 한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의 정보를 많이 갖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살아온 시간과 아직 말하지 못한 마음 앞에 자신을 여는 일이기도 합니다.
병실에 누운 노인을 생각해 봅니다. 돌봄에 의지하는 그에게도 한 생애의 사랑과 상처, 기억과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병명과 나이만 바라보는 눈에는 그 삶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존엄하다”는 말도 익숙한 선언으로만 남으면 눈앞의 사람에게 닿지 못합니다. 그때 젊은 날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노인의 손끝이 움직이고 눈가에 물기가 맺힙니다. 곁에 있던 사람은 그 작은 움직임에서 잊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한 곡의 음악이 병명 뒤에 가려졌던 한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한 것입니다.
예술은 이렇게 우리의 인식의 폭을 넓힙니다. 소설은 낯선 사람의 하루 속으로 우리를 이끌고, 그림은 외면하던 얼굴 앞에 멈추게 합니다. 연극은 타인의 처지에서 말하고 움직이게 하며, 시는 익숙한 언어에 틈을 내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사랑하라는 말을 아는 것과 사랑해야 할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것은 다릅니다. 예술은 그 사이를 잇습니다. 인간 내면에 주어진 초월성을 예술은 종교와 함께 드러내는 두 가지 통로입니다. 종교와 예술은 그 본질과 목적이 서로 다르지만 실존적 구조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를 권하기 전에 상처의 깊이를 듣게 하고, 희망을 말하기 전에 절망 속에 있는 사람 곁에 머물게 합니다. 여기에 예술적 언어의 내재성과 초월성이 함께 있습니다. 예술은 몸과 감각, 사물과 기억에 뿌리를 내립니다. 흙의 거친 표면, 유리의 투명함, 목소리의 떨림, 붓질의 흔적이 그 언어를 이룹니다. 그 구체적인 감각 안에서 우리는 눈앞의 사물을 넘어 삶과 죽음, 부재와 기다림, 사랑과 영원을 묻게 됩니다. 예술의 초월성은 삶의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이미 알고 있는 의미의 경계를 넘어서는 힘입니다.
포스트 휴먼시대
종교 언어의 이러한 열림은 그 어느 시대 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리는 신앙의 내용을 분명히 하고 공동체의 기억을 지켜 줍니다. 그러나 모든 물음에 이미 답이 있다고 여기는 교조적 언어로 굳어지면, 살아 있는 인간의 고통을 AI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담아내기 어렵습니다. 슬픔 앞에서 너무 빨리 뜻을 설명하고 의문 앞에서 정답만 되풀이할 때, 말은 정확해도 마음에는 닿지 못합니다.
포스트 휴먼 시대를 선도할 예술이 그 진정성을 참으로 지니고 있다면 그 닫힌 자리에 질문과 여백을 열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AI가 절대로 넘볼수 없는 인간의 초월성에 내재된 고귀한 단순성(Nobilis simplicitas) 과 그 초월성으로 예술은 인류에게 이 불확정 시대에도 말로 풀어내기 어려운 위로를 건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예술적 체험을 곧바로 신앙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인간의 깊은 곳에 닿는 길이 될 수는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고백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과 시간 안으로 오셨다는 고백입니다. 신앙의 언어도 감각과 기억, 상처와 희망 안에서 살아 있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능력과 함께 형상과 소리, 몸짓과 침묵으로 의미를 느끼고 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술은 이 능력을 일깨우고 확장하며 심화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던 사람이 그림으로 마음을 드러내고,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던 사람이 이야기 속에서 함께 아파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더 섬세하게 느끼고 더 깊이 이해하며, 자신을 넘어 응답하는 법을 배웁니다.
4. 마음이 향하는 곳에 재물도 내어놓아야 한다
예술의 이러한 힘을 믿는다면, 교회의 선택도 달라져야 합니다. 문화예술을 행사에 필요한 공연이나 건물을 꾸미는 작품으로만 대한다면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자라지 못합니다. 예술가는 함께 묻고 탐구하는 동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아름다움과 더불어 예술이 들려주는 아픔과 불편한 질문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작품을 천천히 바라보고, 서로의 느낌을 나누며, 직접 창작하는 배움의 장이 필요합니다. 어린이는 색과 형태로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고, 노인은 생애의 기억을 그림과 이야기로 남길 수 있습니다. 말하기 어려운 상처에 형상을 부여하는 사람이 있고, 그 표현을 존중하며 듣는 공동체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인간에게 내재된 표현과 이해의 능력이 충분히 자라도록 예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넓혀야 합니다. 그 믿음에는 구체적인 뒷받침이 필요합니다. 창작과 연구의 시간을 존중하고, 전문적인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며, 작품을 보존하고 사람을 기르는 교육을 지속해야 합니다. 공간과 예산, 전문 인력은 그 실천의 토대입니다.
교회가 예술의 필요성과 예술가의 자유를 가르친다면, 그 가르침은 공동체의 운영에도 드러나야 합니다. 문화예술 공간의 가치를 임대수익과 관리의 효율만으로 판단하면, 그 안에서 자랄 인간의 내면은 보이지 않습니다. 공간을 마련하는 데서 더 나아가 어떤 배움과 만남을 길러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복음 말씀은 공동체의 예산에도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재물을 모으며,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준비를 이유로 오늘의 배움과 돌봄을 끝없이 미룰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재산은 맡겨진 사명을 위해 쓰일 때 그 뜻을 이룹니다. 광주대교구의 선택이 귀한 까닭은 문화예술을 향한 마음이 실제 공간과 교육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미래를 위해 길러야 할 마음
종교와 예술의 협업은 한 작품 앞에 함께 머무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고 시를 읽으며 자기 삶을 이야기하고, 예술가와 신학자가 서로의 해석을 듣고, 청년과 노인이 창작을 통해 각자의 시간을 나누는 일입니다.
예술을 경험한다고 누구나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감동만으로 정의가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예술은 쉽게 판단하던 사람을 다시 보게 하고, 당연하게 여기던 삶을 새롭게 느끼게 합니다. 그때 깨어난 마음이 돌봄과 연대, 책임 있는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돕는 일이 공동체에 맡겨져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어떤 미래를 열든, 우리는 생명을 누구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지, 약한 사람을 어디에 둘지 결정해야 합니다. 판단을 기술에 의탁하는 일이 늘어나더라도 그 결정의 책임은 우리에게 남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기르는 책임 역시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종교는 삶의 의미와 책임을 묻고, 예술은 그 물음에 구체적인 얼굴과 목소리를 부여합니다. 그 만남 안에서 우리는 더 많이 아는 데서 더 깊이 응답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광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또한 번 놀란것은 버스여객터미널에 초대형 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서점 곁에서 저는 평일 오후 배움의 자리를 채운 청중을 떠올렸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도 신앙의 깊이를 찾으려는 갈망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갈망을 받아줄 자리를 마련하는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과거의 빛으로 오늘의 얼굴을 비추고, 아직 오지 않은 이들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교회. 광주에서 만난 그 빛이 더 많은 공동체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위해 길러야 할 것은 타인의 고통 앞에 멈추고, 아름다움 앞에 감사하며, 맡겨진 힘을 사랑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맡겨진 능력을
어디에 써야 할지 아는 지혜를 주소서.
빠른 판단에 가려진 이웃의 얼굴을 보게 하시고,
예술의 빛과 침묵 속에서
다시 듣고, 다시 느끼고, 다시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시간과 공간과 재물도 함께 내어놓게 하시며,
우리가 준비하는 미래에
가장 약한 이가 머물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아멘.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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