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인생의 정답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맵니다. 정답을 찾지 못하면 불행의 이유라도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닦달하는 것으로 인생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답을 찾고, 불행의 이유를 막기 위해 돈을 들여서라도 액땜을 해보려 하지만 인생은 순탄치 않습니다. 그것은 인생 자체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이 힘들어서 교회를 찾아옵니다. 하지만 교회는 힘든 인생의 답을 해주는 곳이 아니라 그렇게 힘든 인생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곳이며 그 삶을 사명이 되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직선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원을 그리는 것도 아닙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마틴 슐레스케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 작가가 열 살짜리 아들과 파리의 미술관에 갔을 때, 아들은 어느 방에 전시된 조각품을 보고 스케치북을 펴고 스케치를 시작하는데, 얼마 가지 않아 아이는 선이 삐뚤빼뚤, 선이 똑바로 그어지지 않자, 아이는 그림을 북북 찢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스케치 시작하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너는 지금 스케치를 하는 것이지 작도하는 게 아니란다. 컴퓨터로 그리면 아주 똑바른 선을 그을 수 있겠지만, 그건 작도일 뿐 스케치가 아니지. 네 스케치에서 선이 얼마나 곧은지는 중요하지 않아. 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는 이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술이란 것은(혹은 교육은) 무조건 똑바로 선을 긋도록 일일이 통제하고 형상화하기보다 어느 정도는 그냥 되는대로 ‘내버려 두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움, 즉 자연스러운 ‘삐뚤빼뚤’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 결과물은 그저 딱딱한 작도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마틴 슐래스케, <가문비나무의 노래>, 57쪽 )
슐레스케의 이 말처럼 무언가를 일깨워 줘야 하고, 심어 줘야 한다는 열성이 앞서다 보면 때로는 상대를 노예처럼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예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예술이 되도록 내버려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틴 슐레스케도 “어느 정도”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예술로 만들기 위한 전 단계입니다.
하지만 인생 앞에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도 그러하지만 가족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인생을 통제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을 통제하려는 마음이 인생을 예술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예술과 같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리의 인생을 멋지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쁘게 핀 꽃 한 송이나 떠오르는 태양이나 낙조처럼 자연의 순리대로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것이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아름다워야 합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신앙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인 저는 그것을 창조의 모습대로 생생하게 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마틴 슐레스키는 <가문비나무의 노래> 다음에 <바이올린과 순례자>라는 더 깊은 내용의 책을 썼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연주자는 악기를 상대로 투쟁할지 봉사할지 결단해야 합니다. 마음의 소리가 악기의 울림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 소리는 사랑하는 마음의 소리일 수도 있고 축복하는 마음, 자아도취적인 마음, 함께 춤추는 마음, 상투적이거나 케케묵은 마음의 소리, 영적으로 깨어 있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마틴 슐레스케, <바이올린과 순례자> 70-71쪽)
이 내용을 읽으며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악기와 같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통해 우리의 마음의 울림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기적인 마음에 매몰되어 냉정하고 잔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기적인 마음의 소리가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면 여간해서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울 수도 없고, 본인도 행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쾌락 한 조각을 위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파괴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우리 마음의 소리가 이타적일 때 우리의 인생이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소리가 사랑으로 드러날 때 우리의 인생은 아름다워집니다. 이런 말을 듣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은 잔잔해집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제 마음이 조용해지고, 차분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인생의 파고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이런 잔잔한 상태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사람과 같이 인생이 힘들어서 기도하게 됨으로써 기도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마틴 슐레스케는 그런 상태를 이렇게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기도란 겨우 자신의 앞가림이나 하고자 종종거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관심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기도의 참된 의미입니다.”(279쪽)
사람들의 기도는 대부분 인생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마틴 슐레스케가 말하는 자신의 앞가림이나 하고자 종종거리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같은 기도로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인생의 평안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엉뚱하게 보이지만 기도는 자신의 인생의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제게는 한시도 인생이 평탄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제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늘 기억합니다. 그러면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제게 위협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간의 평안을 찾으면 저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제게 닥친 어려움을 통해 하느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제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더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제게 닥쳐도 그것이 제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이유가 되고, 제 인생은 흔들리지 않는 평안 속에 거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런 기도를 통해 제 인생은 아름답게 만들어집니다. 제 인생이 예술로 승화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음은 물론 그것을 오히려 아름다움의 소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는 작은 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한 자입니다. 이 말씀은 동시에 아버지를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의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이 되고 예술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가 제 귀에 들려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종이신문<가톨릭일꾼>(무료)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