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그리스도왕인가, 내 친구인가
가톨릭교회는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기념합니다. 비오 11세 교종은 1925년 12월 11일에 교황 회칙 <첫째의 것>(Quas Primas)을 반포하면서 신자들로 하여금 무신론과 세속주의에 맞서 싸우는 전투적 교회가 되기를 희망했던 모양입니다. 이 회칙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요 인간으로서 그리고 구세주로서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지닌 왕”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 죄악의 세력과 맞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왕정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정치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고 행동하면서 그리스도 왕 앞에서 받아야 할 심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내게는 이런 말 자체가 낯설기만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추종자들이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을 달가워했을까, 의문이 드는 까닭입니다. 그분은 다만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예언자적 직분을 수행하다가 로마제국과 성전세력에게 살해당한 분입니다. 요한바오로 1세 교종이 폐기하기 전까지 교황즉위식에 사용되었던 삼층 교황관은 천상과 지상과 교회의 통치자로서의 교황을 상징하는 물건이라는데,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예수님을 마치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권력으로 삼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아집니다. 한번도 위세를 떨치지 않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도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는 그분을 천상천하 둘도 없는 심판자로 내세우는 모습은 예수님의 인격을 교회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왜곡시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말하는 예수님이 ‘이런 왕’의 모습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마저 반납해야 마땅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저 우리는 ‘예수님을 흠모하고 따르는 제자’로 만족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열정에 어떤 정치적 이해타산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단속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혹시 우리가 그분을 자꾸 왕좌로 밀어올리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인가 그분께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대부분의 기도가 청원기도이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열정에 응답하는 것보다 그분의 위세에 기대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래와 흥정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장삿꾼들이 판치는 강도의 소굴이라며 채찍을 드셨다는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가능하다면 우리들의 동행으로서, 동지요 동무요 연인이 되길 바라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이런 정서가 교회가 ‘엄숙히’ 선포하는 교리에서 비껴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마음이 갑갑해집니다. 그분과 우리 사이에도 ‘사랑’만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이미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한사코 그분을 왕좌로 올리고 그분의 종으로 남으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얼마나 우리를 보고 안타까워하실까, 생각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2-15)
여기서 가슴을 치게 하는 대목은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헤아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주인과 종 사이에는 우정이 발생할 수 없으며, 사랑하기란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종으로 남아있고자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사랑이란 서로 깊이 알게 되고, 상대가 믿음직할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사건 때 하느님께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이라고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시몬 베유, 교회의 문턱에 앉아
그러고 보니, 시몬 베유가 교회의 문턱에 앉아 있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시몬 베유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입교하기를 평생 주저했습니다. 시몬 베유가 늘 암송하곤 했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의 <사랑>(Love)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베유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고백합니다.
“사랑은 내게 오라 하나
죄로 더럽혀지고 추악한 내 영혼은 뒷걸음질 치네.
그러나 사랑은 기민한 눈으로
들어오자마자 주저하는 나를 보시고
다가와 다정히 물으시네.행여 내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
이 몸은 여기에 어울리는 손님이 아니라 대꾸하니
사랑은 말씀하시길, 그대가 그 손님이라.오, 사랑이시여, 배은망덕하고 인정 없는 이 자가 말입니까?
저는 당신을 바라볼 수조차 없나이다.
사랑이 내 손 잡고 미소 지으며 말씀하시길,
나 아니면 누가 그눈을 지었겠느냐?”
시몬 베유에게 하느님도 사랑이고, 예수님도 사랑일 뿐입니다. 그 사랑은 교회 안팎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유는 교회 밖에 머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하여 “교회의 문턱에 꼼짝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묵상할 때, 그분의 “벌을 내리는 역할은 십자가에 매달려 마치게 될 지상에서의 삶에 적합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군주도 심판관도 아니라는 말일 텐데, 그분은 노예처럼, 벌 받는 죄인처럼 죽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먹이는 굶주린 자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듯, 의인이 처벌하는 가엾은 죄인 안에도 그리스도가 계신다. ... 그리스도는 전과자들의 신성한 모범이다. J.O.C(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교육받은 젊은 노동자들이 그리스도께서도 노동자였다는 사실에 감격하듯 전과자들도 똑같은 감격을 맛보아 마땅하다. ...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는 순교자보다 죄인에 더 가깝다.”(시몬 베유, <신을 기다리며>, 이제이북스, 2015, 125쪽)
시몬 베유의 이 엄청난 발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늘 궁금했습니다. 결국 자신이 머무는 삶의 자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더군요. 시몬 베유는 철학교사였지만, <공장일기>에서 보듯이, 현대판 노예로 살고 있던 노동세계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억압과 고통이 있는 곳에서 연민이 떠나지 않았던 공감의 사람이었고, 세상의 가장자리에서만 안심했던 영혼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몬 베유는 무신론자들 안에서 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구원을 위한 헌신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가 선포한 장엄한 교리를 뛰어넘어 종교의 본질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유에게 정작 ‘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베유는 교회의 문턱에 앉아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문턱에서 멈춤
에스더 드발이 쓴 <경계를 살다>에서 전하는 첫 언어가 “문턱은 거룩한 곳이다”라는 말입니다. 드발은 일본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을 먼저 말합니다.
“일본에서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거리에서 신었던 신발을 벗기 위해 잠시 멈춘다. 그리고 문 안으로 들어서며 출입구 안쪽에 놓인 실내화를 신는다. 이 행위는 비록 짧은 순간일지라도 의도적으로 멈추어 서게 만들며, 두 공간, 곧 바깥과 안, 외부와 내부의 차이를 존중하도록 요구한다.”(17쪽)
그것은 곧 다른 사람과 다른 가족을 마주하기 위한 준비라고 말할 수 있는데, 마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성무일도를 드리기 위해 경당 문턱에서 잠시 멈추어 서는 ‘스타티오’(statio)의 순간을 연상시킨다고 말합니다. 수도자들은 기도를 드리고 경당에 들어서기 전에 경당 문 앞에서 줄지어 기다리면서, 직전에 하던 일과 그 일에 따르던 모든 요구와, 그것들과 동반되는 불안과 기대까지도 내려놓는다는 것입니다. 이 고요함은 각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마음을 비워 두도록 허락합니다. 익숙한 공간에서 낯선 공간으로 이동하는 문턱에서 여행자가 국경을 넘어설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마치 고해성사를 마친 직후에 남는 감각과 같다고 해요. 무언가 새롭고 낯선 세계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기대 어린 설렘 같은 것 말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거룩한 경계 안에서 살기
낯선 것들이 마주하는 이 문턱은 어느 때는 경계가 되고 어느 때는 최전선이 됩니다. 경계는 수도원 규칙처럼 삶에 질서가 생기게 하는 틀이지만, 최전선은 타자를 밀어내기 위해 그어진 선이며, 적대와 공격성, 권력이 만들어낸 구획입니다. 드발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이스턴케이프에서 경험한 최전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국의 군사력이 그어 놓은 군사경계선들이 서로 다른 민족들을 갈라놓고 있었다. 영국은 코사(Xhosa) 사람들을 넓은 피시 강 너머로 몰아내기 위해 말뚝을 상시 배치해 두었다. 그 일대에는 의도적으로 공포의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 모든 조치의 배후에는 배제와 분리를 통해 문화와 인종의 차이, 곧 백인과 흑인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자 했던 장벽의 논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 백인들은 그렇게 자기네 입장이 옳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타자를 향한 문을 닫아 버렸다.”(38쪽)
그러나 드발의 집에서 가까운 웨일즈의 성 마리아 수도원(St Mary’s Priory)은 경계의 장소였습니다. 웨일즈 대주교이자 몬머스 주교였던 로완 윌리엄스는 ‘경계’로서의 수도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곳은 낯선 이들을 친족으로 바꾸어 가는 자리이며,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위태롭게 변모하는 경계이자 사람들을 더 가까이 불러 모으는 곳이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친히 살과 피를 입고 제약조건 가득한 세상 속에 친히 들어오심으로써 자기를 뒤흔드신 바로 그 경계이기도 하다. ... 베네딕트 수도원은 하느님을 중심에 두면서도 낯선 이에게 집중하는 삶을 따른다. 하느님에게서 사람을,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삶,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타자에게 다가가고, 타자를 알기 위해 하느님과 관계 맺는 삶이다.”(39쪽)
경계의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맡는 사람이 ‘문지기’입니다. 문지기는 다른 수도원 형제들을 대신해 방문객에 대한 환대의 기술을 실천합니다. 환대란 모든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타자를 판단하거나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 것, 비판적이거나 경쟁적인 태도로 대하지 않는 것, 우리의 요구와 기대 속에 상대방을 가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지기는 유머가 있고 지혜롭게 처신합니다. 문지기는 문턱에 서서 한쪽 발은 수도원 울타리 안에, 다른 한쪽 발은 바깥세상을 딛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이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문지기는 이렇게 외칩니다. ‘데오 그라티아스’(Deo Gratias). ‘당신이 오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결국 환대란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유함’이자 ‘사랑의 온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턱 안쪽에선 기도와 침묵의 삶이 이어지고, 바깥에서는 온갖 요청과 산만함으로 가득한 세계가 밀려올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 둘을 동시에 붙들 수 있을까, 묻게 됩니다. 수도원 경계의 문지기는 내면의 중심을 굳게 붙들고 있기에, 바깥에서 다가오는 것들이 낯설고 심지어 위협이 되더라도 환대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텅빈 수도원 회랑 같은 고요한 중심의 자리인 ‘푸스티니아’(poustinia)가 있습니다. 이곳은 말씀을 듣기 위해 비워진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낯선 불청객이 드나드는 문턱에서 타자를 밀어내지 않고 환대할 수 있습니다. 타자의 세계 속으로 건너가더라도, 거기서 새로운 통찰을 얻고 나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옵니다.
때와 때 사이의 시간
거룩한 문턱은 시간에도 존재합니다. 언론인이자 인종 인권운동가였던 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은 토머스 머튼이 머물렀던 은둔처에서 지내면서 시간 경계 속에서 거룩함을 경험합니다. 특히 ‘새벽이 밝기 전 어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드발은 전합니다. 그는 새벽을 기다리며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그 시간이 선사하는 것들에 가만히 귀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에게 이때는 “침묵과,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장작불이 ‘탁’ 하고 튀는 소리, 그리고 밤의 짙은 어둠이 그대로 기도가 되어 버리는 시간, 그 모든 가운데에 네가 그저 가만히 놓여 있고, 너의 전 존재가 말 없는 아멘을 드리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 시간은 자신을 비워내는 시간, 몸과 마음과 감각에 쌓인 온갖 더께를 덜어내는 시간이었고, 나뉘지 않는 온전한 자신에 집중하며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마음 깊이 가장 진실하게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해가 질 무렵 역시 이처럼 때와 때 사이의 시간입니다. 새벽이 밝기 전 어둠이나, 밤이 찾아들기 전 황혼이나 전환을 겪는 나약한 시간입니다. 절반은 빛이고 절반은 어둠인 신비롭고 모호한 시간입니다. 이 불확실성의 시간을 날마다 겪으면서 ‘때와 때 사이’에도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깨닫습니다. “지혜의 올빼미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날아오른다”는 헤겔의 말처럼 때의 문턱 역시 거룩합니다. 여기서 삶은 둘 중에 하나가 아니라 빛과 어둠을 함께 안고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렇게 잠시 멈춰 서 있는 틈 사이의 공간이 얼마나 거룩한지 드발은 깨닫습니다.
그러나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새벽과 황혼이라는 ‘틈 사이의 공간’이 주는 모호함을 받아들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불확실성은 통상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는 "신앙은 모호함 속에서 치르는 전쟁과 같다"고 말합니다.
“내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늘 씨름하고, 잃었다가 다시 찾고, 밤과 낮이 번갈아 가며 오는 과정을 끝없이 겪는 일이다. 씨름은 믿음과 불신 사이보다는 오히려 믿음 내부에서 벌어지곤 한다. 신앙은 확신하면 할수록 더욱 그 중심에서부터 치러내야 하는 어떤 모험과 같은 투쟁에 가깝다. 그리고 내 경우와 같이 그 확신이 어느 순간 평화와 고요의 감각으로 옮겨간다 하더라도, 그 평화는 결코 값싼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갈등의 한복판에서 얻어진 평화, 싸움의 심장부에서 얻은 평화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종교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나와 다른 언어, 다른 믿음, 다른 이념을 가진 사람 안에서도 하느님을 형상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턱에서 만난 그이에게 감사하며 베네딕트회 조안 치티스터 수녀처럼 “하느님께서는 차이를 사랑하신다”면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누군가 와서 우리의 생각과 영혼의 지경을 넓혀주었으니, 그이를 보내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누군가 와서 우리의 안일함을 뒤흔들어 주었으니, 그이를 보내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누군가 와서 우리를 재촉하며 우리 자신 너머로 밀어내 주었으니, 그이를 보내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를 두고 에스더 드발은 짐바브웨의 어느 수녀원 벽에 붙어있던 글귀를 읽고 얻은 감상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문화에,
다른 종교에 다가갈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신발을 벗는 것이다.
내가 다가가는 그 자리는 거룩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누군가의 꿈을,
그들의 기억과 이야기들을 짓밟게 될지도 모른다.
더 심각하게는
그곳에 이미 하느님께서 계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릴지 모른다. ...”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주의 깊게 살피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이가 나를 바로 잡아주고 더 깊어지게 하며, 더 단단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마음을 여는 것을 요구합니다. 경계에서 타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한 혼합주의가 아니라 더 큰 충만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에스더 드발은 그래서 “중심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가장자리에도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 문턱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기 위해 더듬더듬 걸어갈 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쉽게 안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며, 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르도록 두지도 않으신다. 우리의 하느님은 양자택일의 범주에 가둘 수 없는 너무나 크신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둘 다를 품으라고 요청하신다. 우리는 문턱을 건너, 알려진 동시에 알려진 적이 없는 하느님을 만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잠시 멈추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신비이신 하느님의 문턱에 선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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