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심장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알게 됐습니다.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이 스마트폰 하나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피부로 느끼게 된 것입니다. 화가 났습니다. 폰이 망가져서가 아니라 휴대폰 하나 때문에 내 삶이 정지된 것 같은 이 느낌에 화가 납니다. 오고 가던 전화와 카톡이 멈추었습니다. 짬날 때마다 동영상을 통해 듣던 강의들을 못 들으니 짜증 납니다. 아침에 시사방송 유튜브를 못 듣는 게 짜증납니다. 이제 막 시작한 영어 원서 읽기 프로그램 앱을 사용하지 못하게 돼서 짜증납니다. 금융 업무를 위해 은행에 직접 가는 것부터가 번거롭고 귀찮습니다. 손바닥 폰 하나로 뉴스를 듣고 지식을 습득하고 금융 거래도 하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심지어 성경 읽기로 하남과 소통하던 일들이 멈추고 나니 지구가 자전을 멈춘 것 같습니다.
이런 것 없어도 잘 살았는데, 이것 없이 못 살 것 같은 이 느낌이 정말 싫습니다. 아이폰 3GS부터 16년 넘게 사용해서 지금은 갤럭시로 넘어가기 힘든 중병에 걸린 내 모습도 싫습니다. 엊그제 발표한 아이폰18 신제품 가격을 보고, 애플이 나 같은 중독자를 상대로 갑질을 하는 것도 싫습니다. 이 감정이 스마트폰 금단현상이란 걸 압니다. 해독을 위해서 당분간 휴대폰을 살리지 않고 싶습니다. 해독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확신하건대 해독된 이후에 새로 장만한 스마트폰에 또 중독될 것입니다.
폰 사용 시간보다 책 읽는 시간의 비율이 더 높은데도 이상하게 독서는 중독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이 가진 힘이 어디서 오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편리함을 넘어서는 어떤 의례성 때문입니다. 일전에 읽었던 책에서 인류학자 마이클 잭슨이 말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는 중독을 ‘세속적 의례’라고 정의합니다. “종교적 의례가 성스러운 신을 모시는 과정이라면, 세속적 의례는 신이 아닌 자신을 소중히 모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동안 스마트폰을 내 필요에 맞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에 내 자아를 투영시켜 세속적 의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스마트폰은 외부에 있어 내가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내부에 존재하며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습니다. 나는 일상의 리듬을 스마트폰에 맞추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일정한 시간에 맞추어 예배에 참여하고 그 리듬으로 세계와 우주를 감지하듯, 스마트폰을 자아의 영역 안에서 종교적 의례처럼 느끼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의 심장이 멎었을 때 내 자아가 상처를 입고 자아의 죽음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싫다’를 반복하는 내 안의 감정은 자아의 죽음이 내는 소리였습니다.
오늘은 페이스북 포스팅하는 날이라 컴퓨터를 열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재미있는 채널 하나를 오랫동안 시청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보았던 이란 남부의 한 여인(주부)이 자기 삶을 브이로그로 찍어 올려 놓는 채널이었습니다. 그녀는 히잡을 입고 메마르고 척박한 산야를 누비며 야생 열매를 채취하고, 강에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습니다. 엽총으로 조그마한 동물을 사냥합니다. 사냥에 성공할 때, 혹은 예상치 않은 야생 열매나 좋은 식물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맛샬라!”하고 외칩니다. 영상을 보는데 그 기쁨의 감탄사에 나도 모르게 동화됩니다. AI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 줍니다. "신께서 원하셨다", "신께서 바라는 대로"라는 뜻이랍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노마드(유목민)의 삶, 오늘 하루 먹을거리만 주어지면 그것이 무엇이든 ‘맛샬라!’하고 기쁨으로 외치며 감사하는, 그 단순한 삶이 스마트폰 중독의 해독제가 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 이런 삶이었습니다. 특히 사복음서 중 제일 먼저 쓰인 마르코복음이 다루는 예수의 삶은 노마드(유목민)였습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여기저기 떠돌며 견유적(犬儒的-개처럼 떠돌며 유유자적한다는 그리스 철학의 한 분파로서의 견유학파)인 사유와 가르침을 전한 예수의 삶에서 노마디즘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습니다.
노마디즘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러므로 유목민들에게는 중앙집중적인 권력이 작동할 수 없었습니다. 유목적 삶은 어떤 것에 중독되지 않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중독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믿으라는 말보다, 나를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떤 권위나 권력, 사람을 중독시키는 종교 현상에 대해서도 거부했습니다. 예수가 공생애 동안 보여준 것은 유목적 삶의 지향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자주 중독된 사람들을 만납니다. 종교에 중독되고 강제된 교리에 중독되어 그것 없이는 지옥에 갈 것 같은 두려움과 강박에 사로잡힌 영혼을 봅니다. 내일의 지옥을 거부하기 위해 오늘의 천국을 파괴하는 이들입니다.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갖지 않은 이들을 배제하고 추방하는 일을 주저함 없이 행합니다. 그들은 마음에 지옥을 품고 천국을 소망합니다.
내일의 권력을 위해 오늘의 동지를 버리는 정치인들 역시 권력에 중독된 사람들입니다. 중독이란 이성적 판단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종교에 중독된 사람과 권력에 중독된 사람의 공통점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를 타고 내리막을 달리는 것처럼,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는 것은 중독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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