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 시대, 복음선포는 왜 예술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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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시대, 복음선포는 왜 예술이 되어야 하는가
  • 조광호
  • 승인 2026.08.03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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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인간의 존재를 깨우는 새로운 종교언어

포스트휴먼 시대란 인간이 더 이상 세계의 유일한 중심으로 머물지 않고, 인공지능과 로봇, 생명공학과 디지털 기술, 동물과 자연생태계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는 시대를 말합니다. 여기서 ‘포스트’는 인간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을 모든 존재의 중심과 지배자로 여겨 온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인간의 위치와 책임을 새롭게 성찰한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에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언어와 이미지를 만들고, 로봇은 노동을 대신하며, 생명공학은 인간의 몸과 수명의 한계를 변화시키려 합니다. 기술은 더 이상 인간이 바깥에서 사용하는 도구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기억과 판단, 감각과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전보다 더 많은 능력을 얻게 되었지만, 반드시 더 지혜롭고 더 행복해진 것은 아닙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삶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연결은 쉬워졌지만 관계는 얕아졌으며, 인간의 몸은 연장되지만 영혼은 더욱 외로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이 데이터와 기능,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평가될수록 늙고 병들고 약한 사람은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날 위험이 커집니다.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책임 있게 살아가는가보다 얼마나 빠르고 유용한가에 따라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후위기와 생태계의 붕괴는 인간이 자연과 분리된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도 드러냅니다. 인간은 동물과 식물, 물과 흙, 미생물과 기후가 연결된 거대한 생명공동체 안에 존재합니다. 인간은 창조세계의 절대적인 주인이 아니라,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며 돌봄의 책임을 맡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포스트휴먼 시대는 단순히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시대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지, 생명은 조작할 수 있는 물질인지 아니면 경외해야 할 신비인지를 다시 물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변화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선포도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합니다. 복음의 내용이 달라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오늘의 인간에게 다가가고, 들리고, 체험되는 방식은 새로워져야 합니다. 

오늘의 인간은 말이 부족해서 복음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말과 정보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말에도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복음마저 또 하나의 주장이나 정보처럼 전달된다면, 수많은 메시지 가운데 하나로 소비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시대의 복음선포는 더 많은 설명을 덧붙이는 일보다, 인간의 닫힌 감각과 잠든 영혼을 다시 깨우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은 복음선포의 부수적인 장식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언어가 됩니다.

1. 복음선포는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존재를 깨우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인간은 매일 수많은 문장과 이미지, 주장과 광고에 노출됩니다. 정보는 끊임없이 생산되지만 오래 기억되는 말은 드뭅니다. 시선은 빠르게 움직이고, 마음은 깊이 머물지 못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복음까지 하나의 정보처럼 전달된다면, 복음은 사람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잠시 소비되는 종교적 메시지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보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사건이며, 닫힌 존재를 열고 쓰러진 생명을 다시 일으키는 기쁜 소식입니다. 따라서 복음선포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타인의 얼굴을 다시 만나며, 삶의 방향을 바꾸도록 이끄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씨앗과 밭, 누룩과 빵, 등불과 포도나무, 잃어버린 양과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결론을 먼저 강요하지 않고, 사람들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상상력을 깨우는 예술적 언어였습니다. 씨앗 하나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게 하고, 길가에 쓰러진 한 사람을 통하여 이웃이 누구인지 묻게 했습니다. 익숙한 사물과 풍경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복음은 인간에게 정답만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눈을 열고 귀를 깨우며, 마음속 깊이 묻혀 있던 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참된 복음선포는 사람을 단순히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깨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선포가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복음에 새로운 것을 덧붙이자는 뜻이 아닙니다. 이야기와 비유, 상징과 몸짓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를 깨우셨던 예수님의 복음선포 방식으로 돌아가자는 요청입니다.

2. 예술언어는 오늘의 인간에게 다가가는 새로운 종교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종교언어는 많은 사람에게 어렵고 멀게 느껴집니다. 교리와 규범, 권위와 명령의 언어가 인간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되지 못할 때, 아무리 올바른 말이라도 마음에 닿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종교의 설명을 듣기 전에 그 종교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말을 듣기 전에 자신이 실제로 환대받고 있는지를 느낍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 공동체가 상처받은 사람과 약한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포스트휴먼 시대의 복음선포는 종교언어만을 반복하는 데서 시작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술언어가 오늘의 종교언어가 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예술의 언어를 교리의 언어로 단순히 번역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예술을 종교적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포장지나 삽화로 사용하자는 뜻도 아닙니다. 빛과 색, 선과 여백, 음악과 침묵, 몸짓과 공간 자체가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는 종교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술은 무엇을 믿으라고 먼저 명령하지 않습니다. 한 작품 앞에 머물도록 초대하고, 한 곡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하며, 한 줄기의 빛과 비어 있는 공간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상처와 기억, 두려움과 그리움을 만납니다. 

예술은 닫힌 마음을 억지로 열지 않습니다. 마음이 스스로 열릴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래서 예술은 복음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화려한 장식이나 감각적 쾌감이 아닙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삶의 상처를 감추지 않습니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절망에 머물지 않게 하고, 인간의 약함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존엄을 발견하게 합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아름다움의 가장 깊은 표지입니다. 십자가는 보기 좋은 형상이 아니라 인간의 폭력과 고통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교적 아름다움은 고통을 지워 버리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생명과 사랑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포스트휴먼 시대의 새로운 종교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술언어가 종교언어가 된다는 것은 복음의 본질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이 인간의 지성에만 머물지 않고 감각과 상상력, 기억과 몸, 상처와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는 일입니다.

3. 복음선포는 말의 전달을 넘어 성사적 예술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래 성사적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보이는 물과 빵, 포도주와 기름, 빛과 몸짓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그리스도교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과 손길, 식탁과 눈물, 죽음과 부활 안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관념으로만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으셨습니다. 몸을 취하시고 인간의 시간과 공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 육화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예술의 토대가 되고 복음선포의 방식에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복음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관념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인간의 몸과 감각, 기억과 관계, 시간과 공간 안에 육화되어야 합니다.

자비는 설명되는 말이 아니라 환대받는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문장으로만 선포되는 교리가 아니라 어둠 속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용서는 규범의 조항이 아니라 끊어진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창조 신앙은 자연을 보호하라는 명령에 그치지 않고, 흙과 물, 나무와 바람 앞에서 생명의 신비를 느끼는 체험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성사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통로가 예술입니다. 회화와 조각, 음악과 건축, 문학과 춤, 영화와 디지털 매체는 복음을 인간의 감각 안에 육화시킵니다. 빛은 은총을 암시하고, 여백은 침묵을 열며, 상처 입은 형상은 고통받는 이들의 기억을 되살립니다.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갈망을 일깨우고, 공간은 분주한 인간을 멈추어 깊은 내면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성당은 교리만을 전달하는 장소가 아니라 복음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그 안의 빛과 색, 소리와 침묵, 재료와 동선, 사람을 맞이하는 태도까지 모두 복음선포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당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설명을 듣기 전에 이미 환대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한 작품 앞에서 자기 삶을 돌아보고, 한 줄기의 빛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침묵 속에서 마음 깊은 곳의 질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모든 공간과 상징은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교회를 화려하게 장식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제대와 십자가, 창과 벽, 빛과 그림자, 소리와 침묵, 의자와 통로, 문을 여는 방식과 사람을 맞이하는 태도까지 모두 복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예술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미술관과 갤러리의 성격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미술과 음악, 문학과 건축, 영상과 침묵, 명상과 대화가 함께 숨 쉬는 열린종교 문화 예술공간으로 거듭나야 할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도 그곳에 들어와 한 작품 앞에 머물고,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편의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술작품을 보관하는 공간을 넘어, 예술을 통하여 인간의 상처가 환대받고 삶의 의미가 새롭게 열리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는 성사적 예술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 미술은 눈을 열고, 음악은 귀를 깨우며, 문학은 마음의 언어를 되찾아 주고, 침묵은 인간을 존재의 깊은 곳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술작품을 소유하는 공간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4. 예술이 된 복음선포는 인간성과 창조세계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위기는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위기는 인간이 자신을 하나의 데이터와 기능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평가되고, 감정은 분석되며, 관계는 수치화됩니다. 늙고 병들고 장애를 지닌 사람은 효율성이 낮은 존재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자연과 동물 역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자원으로만 취급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복음선포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돌보심을 창조세계 안에서 드러내야 한다는 책임을 뜻합니다. 인간은 세계의 절대적인 주인이 아니라 생명을 위탁받은 존재입니다. 땅과 바다, 동물과 식물, 미생물과 기후는 인간의 편의를 위한 배경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창조 공동체입니다.

예술은 이러한 관계성을 몸으로 느끼게 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방울의 물, 돌의 질감과 바람의 소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자연을 소유하거나 소비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과 함께 존재하는 신비로 만나게 합니다. 또한 예술은 인간의 약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늙은 몸과 상처 입은 얼굴, 실패와 죽음까지 인간 존재의 진실로 받아들입니다. 기술문명이 제거하거나 극복하려는 약함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발견하게 합니다.

복음의 중심에는 약한 이들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 죄인과 이방인,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을 하느님 나라의 중심으로 불러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술이 된 복음선포는 강한 인간의 완성을 찬양해서는 안 됩니다. 약한 생명과 상처 입은 얼굴에서 하느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 자연과 모든 생명의 관계 안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복음선포가 예술이 된다는 것은 인간을 더 우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겸손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바라보게 하는 일이며, 생명을 지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앞에 책임 있게 서게 하는 일입니다.

예술이 된 복음선포는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해야 합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마음, 약한 생명을 돌보는 손길, 아름다움 앞에 멈출 줄 아는 감각, 자신보다 큰 신비 앞에 겸손히 서는 태도를 일깨워야 합니다. 그때 종교예술은 교회의 장식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의 구심점이 됩니다.

5. 교회는 예술을 복음선포의 주변부가 아니라 출발점에 두어야 합니다

복음선포가 예술언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면, 교회는 예술을 장식과 행사의 부속물로 보는 오래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술은 성당의 빈 벽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자기 자신, 이웃과 창조세계를 다시 만나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예술은 복음선포가 끝난 뒤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복음선포가 시작되는 첫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술가를 단순한 제작자나 주문을 수행하는 기능인으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술가는 시대의 상처와 갈망을 감지하고, 사람들이 아직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형상과 소리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예술가에게 이미 정해진 교리를 보기 좋게 반복하도록 요구하기보다, 오늘의 인간이 겪는 고독과 불안, 생태위기와 기술문명의 욕망, 늙음과 죽음, 교회의 상처와 희망을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신학자와 예술가, 전례 전문가와 건축가, 과학자와 생태학자가 함께 대화하는 자리도 필요합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문제는 어느 한 분야의 지식만으로 해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와 수도자 양성과정에서는 미학과 예술신학, 상징과 공간, 문화와 감각에 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음선포자는 말을 잘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보고, 침묵을 듣고, 사람의 마음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당과 교회 시설도 신자들만의 폐쇄된 공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전시와 음악, 문학과 드로잉, 침묵 명상과 생태 체험, 예술치유가 일어나는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활동은 복음선포에 덧붙이는 부차적인 행사가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에 내어놓는 환대의 언어이며, 복음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문입니다.

어린이와 청년의 신앙교육도 지식 전달 중심에서 예술적 체험 중심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직접 그리고 만들고 노래하며, 자연을 만나고, 침묵하고, 공동의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통하여 복음을 체험하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외워야 할 정보가 아니라 살아야 할 관계이며, 복음은 정답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과 새로운 디지털 매체도 무조건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복음선포의 새로운 예술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물어야 합니다.

이 기술은 인간을 더 깊이 만나게 하는가.
이 이미지는 생명의 존엄을 깨닫게 하는가.
이 작품은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게 하는가.
이 공간은 인간을 더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로 이끄는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되며,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해서도 안 됩니다. 판단의 기준은 언제나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이어야 합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복음선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말을 들려주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고, 상처 입은 기억을 돌보며, 다시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복음선포는 예술언어를 종교언어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술언어 자체가 오늘의 살아 있는 종교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술이 된 복음선포는 사람을 논리로 정복하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들어가 질문을 일으키고, 잊고 있던 아름다움과 존엄을 발견하게 합니다. 사람을 교회의 소유로 만들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더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돕습니다.

인간의 눈이 화면에 붙잡혀 있을 때, 복음은 예술을 통하여 다시 하늘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인간의 귀가 소음으로 가득 찰 때, 침묵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인간의 손이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할 때, 비어 있는 손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야 합니다. 기계가 인간의 능력을 대신하는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사랑해야 합니다. 알고리즘이 판단을 돕는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책임져야 합니다. 기술이 생명을 연장하는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삶의 의미와 죽음 너머의 희망을 물어야 합니다.

그 질문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예술이 된 복음선포는 조용히 증언해야 합니다. 인간은 기능이 아니라 얼굴이며, 생명은 자원이 아니라 선물이고, 세계는 소유물이 아니라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창조의 집입니다. 복음은 인간을 지배하는 말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마음에 빛으로 스며들어, 잠들어 있던 존재를 다시 일으키는 하느님의 아름다운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부르심이 들리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미술과 음악, 문학과 침묵이 함께 머물고, 상처 입은 사람이 환대받으며, 신앙이 없는 이도 삶의 의미를 질문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교회는 예술을 소유하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복음의 예술이 되어야 할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시대 벽두에 새워진 동검도채플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복음선포의 기항지에 떨어진 작고 아름다운 복음의 겨자씨가 될 것입니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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