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신발끈을 묶다, 다시 광야가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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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신발끈을 묶다, 다시 광야가 보이다
  • 김선주
  • 승인 2026.08.0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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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진=김선주
사진=김선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중국 선불교의 임제 선사입니다. 부처를 절대적 대상으로 숭배하고 맹신하여 집착에 빠지지 말고, 내적으로 불성을 깨달아 자유를 얻으라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을 한 기독교의 사상가도 있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입니다. 그는 하느님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고 알고 있다고 믿는 그 하느님이 사실은 내 욕망의 투영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우상적인 하느님(Abgott)’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하느님과 우상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우상은 내 욕망의 투영체일 뿐 신이 아니라 합니다. 진정한 신은 인간의 욕망이 있기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자라고 말합니다. 초월성을 지닌 자연과 우주의 구성과 존재 원리로서의 절대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탈출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나는 나다(I AM WHO I AM)” 라고. 히브리어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입니다. 여기서 에흐예는 ‘~이다’, ‘~존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하야(הָיָה)'의 1인칭 미완료형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정의되거나 규정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는 과거에 머물지도 않고 현재나 미래의 시간에도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원’이란 말은 ‘긴 시간’을 뜻하는 올람(עוֹלָם)에 더해 ‘영원무궁토록’을 뜻하는 ‘레올람 바예드(לְעוֹלָם וָעֶד)가 만들어집니다. 이는 시간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의미하며 존재의 초월성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은 존재의 초월성과 우주적 질서의 원리에 귀속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하느님이 종교의 형식 안에 들어오면서 사람의 언어 규범과 문법 안에 갇히고 맙니다.

믿음 좋은 교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피로감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들은 교회 언어 안에서만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셨어요”, “주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 영광 돌립니다”, “하느님께 감사”, “은혜입니다”, “축복 받았어요”, “하느님의 사랑”,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하느님의 계획이 있으시겠지요”, “기도하면 됩니다” 등과 같은 상투적인 교회 언어 안에서만 하느님을 생각하려는 관습이 있습니다. 그 언어들만이 하느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고, 자기 신앙을 확증할 수 있다는 강박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교회 사람들은 다른 말로 하느님을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듯합니다. 다양한 학문과 세계관의 지평에서 하느님을 이야기하면 낯설어 합니다. 하느님만 얘기하고 성경만 얘기하고 예수의 십자가만 얘기하는 것이 설교라고 주장합니다. 이 세 가지 외에 다른 것을 얘기하면 설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마치 이단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설교자를 비난하고 욕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몇 개 단어나 문장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라면 그 하느님은 신이 아니고 막대기나 돌멩이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만든 책의 문자로만 규정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위해 만들어진 우상일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는 유대교의 율법이 생명을 잃어버린 말장난이 되었다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사람의 양심과 영혼을 문자의 규범에 가두어 버린 종교 권력에 답답함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의 일갈은 종교의 형식에서 탈피하라는 명령입니다.

이제는 교회 밖으로 나가 자연과 우주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천국으로 공갈치고, 지옥으로 협박하지 않아도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요15:5) 소리 없이 통로를 열고 싶습니다. 정형화된 예배와 요란한 종교 이벤트 없이도, 교회라는 물리적 커뮤니티와 교리적 전통 없이도, 일상 가운데서 하느님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심란하고 피곤한 말(言語)에서 탈출하고 싶습니다. 말과 문자로 하느님을 포획하여 내 소유로 삼는 우상 숭배, 여기서 그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먹었나 봅니다. 다시 광야로 나아가는 게 예전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팔십 살에 다시 광야로 나간 이야기에서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신발끈을 단단히 묶습니다. 다시 광야가 보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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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자 2026-09-01 18:22:08
목사님 고맙습니다.
그리스도人에 대해 깊이 묵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