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당과 지옥, 내세보다 중요한 이승_[마커스 보그의 고백]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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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과 지옥, 내세보다 중요한 이승_[마커스 보그의 고백] 리뷰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6.07.2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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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신앙강좌를 진행하면서 천당지옥설에 관한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그런 천당과 지옥은 없다고 말입니다. 우주 공간 어디쯤 죽은 이들이 복락을 누리고 살만한 천당은 물론이고, 마그마가 들끓는 땅 깊은 곳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지옥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은 단테가 <신곡>(La Divina Commedia)에서 소개한 그럴듯한 상상세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가톨릭교회에서만 받아들이고 있는 연옥 역시 천당 가기에는 부족하고 지옥에 보내기는 과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 사람들을 위한 교회의 배려가 낳은 것이라 하였지요.

하느님이 정말 대자대비하신 분이라면, 어찌 한 인간을 영영세세 지옥불에 가두어 둘 수 있겠습니까? 이슬 같은 생애를 통해 지은 업보에 따라 영복(永福)과 영벌(永罰)이 주어진다면, 그보다 불공정한 처사가 어디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몇 개 따먹은 죄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만큼 부당한 일이라 생각하였지요. 사람이란 고분고분하다가도 울컥하고, 착하디착한 이들도 때로 욕심을 부리고 싶은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벽돌처럼 단단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때 이런 이야기도 하였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은, 그래야 영생(永生)을 얻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기 위해 바치는 기도와 공덕이 오히려 그 사람의 구원을 심각하게 가로막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고요? 구원을 받으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데, 영생을 바라는 것보다 더 큰 욕심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지요. 불교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은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면 나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했답니다. 만일 지옥불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남아있다면 자신도 지옥에 남아 그들을 보살피겠다는 서원하는 보살입니다. 이 정도 마음이어야 ‘영생’을 얻을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장보살은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보살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모든 자비행(慈悲行)이 결국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게 무슨 ‘순정한’ 사랑이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하느님은 이 세상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스스로 하느님이심마저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처럼 온전히 비울 줄 알아야 구원받을 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바라는 사람처럼 욕심 사나운 사람은 없다고 말입니다.

사랑은 그냥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능동적으로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이들은 사실상 하느님 자비의 바다에 빠진 것입니다. 요한복음서에 따르면,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이므로, 사랑에 빠진 이들은 하느님께 빠진 이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지옥불도 창조하셨을까?

죽어서 가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념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였을 때, 신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당혹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다음 강의 때부터 빈자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분들의 신앙의식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탓일 겁니다. 랍 벨(Rob Bell)이 쓴 <사랑이 이긴다-천국과 지옥, 그리고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운명에 관한 책>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은총이 참되다면, 하느님이 어떤 사람들을 지옥에서 영원히 벌하고 계신다고 상상할 수 있을까 묻습니다.

이런 질문은 미국교회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은 “지옥이 없다면, 왜 그리스도교인이 되어야 하는가?” 묻는 것이지요. 심지어 미국 최대 교단인 남침례교는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단언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구원받는다는 말을 죽음 이후의 삶과 동일시 합니다. 특히 장례미사를 드리거나 사순절을 지내면서 사람들은 천국과 지옥, 영생과 구원에 대해 내세지향적인 언어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나도 곧 따라갈 테니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죽은 이를 아름답게 기억하고,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미국 성공회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 안에서 너무 당연히 믿어왔던 천당지옥설에 대해 어른이 되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오직 그리스도교인들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공정한 걸까? 예수나 그리스도교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교인이 아니지만 정말로 선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과연 천국에 갈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는 경계선을 분명히 알 수 있을까? 이른바 천국행 커트라인을 긋기가 참 어렵지 않은지 묻는 것입니다.

 

내세가 아니라 지금여기

문제는 히브리성경과 신약성경이 내세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내세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쓰인 다니엘서(기원전 165년경)에서야 내세에 관해 확실한 언급합니다. 거기서조차 악인에 대한 영원한 형벌이나 믿는 자들에 대한 보상은 언급하지 않으며, 다만 순교자들의 부활, 하느님께 충성했다는 이유로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언자들과 지혜문학의 저자들은 죽음 후의 삶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구원에 대해 열정적이었지만, 그 열정을 낳은 원천은 내세에 대한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는 ‘하늘’(heaven)과 ‘스올’(sheol)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하늘이 하느님의 영광을 선포하고”라는 구절처럼 ‘창공’(sky)을 뜻하거나, 때로는 하느님과 다른 영적 존재들의 거처를 의미합니다. 심지어 사탄도 하늘에 살고(욥 1,6), 신실한 이들이 죽은 뒤에 가는 축복받은 종착지로 나오지 않습니다. ‘스올’(히브리어)이나 ‘하데스’(그리스어) 역시 지옥처럼 형벌의 장소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모든 죽은 사람의 땅, 무덤을 가리킵니다. 악해서가 아니라 그저 죽어서 가는 곳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역시 ‘새로운 창공과 새로운 대지’를 뜻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마태오복음의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익숙한 구절을 들이대지만, 그것은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상징적인 관용어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시대를 전후해서 묵시문학이 발전하였고, 그 영향을 받아 신약성경에서 내세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전한 이야기의 핵심은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공관복음(마르코, 마태오, 루카)이 전한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가장 먼저 기록된 마르코복음에서 예수의 첫마디는 하느님의 나라가 ‘여기에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줄곧 그 나라가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천국이 아니라 땅을 위한 선포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천국 가는 방법보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내세를 강조할 때 일어나는 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니 내세를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소관이지 인간이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여기에서 내가 하느님의 뜻에 맞갖게 살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여기서 천국을 살아야 죽어서도 천국을 살 것입니다. 그럼에도 내세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심각하게 왜곡할 위험이 있습니다.

내세를 너무 강조하면, 그리스도교를 요구와 보상의 종교로 바꾸어 놓습니다. 모든 신앙생활이 천국(아니면 물질적 번영과 행복한 삶)이라는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계약관계로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맡은 일을 잘 이행하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몫을 이행하시리라 믿는 것이지요. 즉 우리가 x를 행하면 하느님께서는 y를 행하신다는 거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시거나, 위험에서 보호하시거나, 이승에서 우리에게 번영을 누리게 해주거나 말입니다. 여기서는 신앙은 하느님과 나누는 거래와 흥정의 행위가 됩니다. 하지만 구원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은총의 결과입니다. 은총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지, 계약 이행에 따른 보상이 아닙니다.

더구나 내세에 대한 강조는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 등 끝없이 사람들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구원에서 배제됩니다. 구원받을 자의 범주를 더 좁히면 그리스도교인 가운데 ‘올바른 믿음을 지닌’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올바른 믿음’에 대한 집착 때문에 교파가 갈리고, 정통과 이단이 나뉘고, 그래서 시작된 게 복음과 상관없는 이단논쟁이고 종교전쟁이겠지요.

게다가 내세를 너무 강조하면 우리의 관심이 온통 다음 생애에 집중되면서 ‘지금여기’의 삶을 가볍게 여기게 됩니다. 어느 개신교회 가운데는 예수의 재림이 머지않았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종말이 가까이 왔다면, 이승의 삶이 머무르는 정거장에 지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본향(本鄕)이 따로 있는 것이라면, 잠시 잠깐 머무는 여인숙에 그렇게 마음 쓸 일이 없습니다. 기후위기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정의로운 노력조차 무의미해집니다. 평화가 깨지면 순교의 기회가 늘어나니 천국에 들어갈 날만 헤아리게 됩니다.

구원은 해방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구출, 해방을 뜻합니다. 부정적인 삶의 형편에서 구출되어, 새롭고 긍정적인 삶의 방식으로 변화(transformation)되는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이집트 탈출이라는 고대 이스라엘의 기원 이야기부터 해보면 이렇습니다. 히브리들은 파라오에게 노예로 붙들려 있었고, 저항할 힘도 없었으며, 고된 노동을 강요받았고, 겨우 먹고 살 만큼의 배급만 받았습니다. 종교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그런 그들을 하느님이 구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은 이 세상 통치자들의 억압과 착취에서 그들을 해방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차원을 지닙니다. 이처럼 구원은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해방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구원을 바라본다면, 예수는 병자들을 치유하고 마귀에서 그들을 구출했습니다. 어떤 속박에서 구원했다는 점에서, 바오로 사도가 자주 쓰던 표현대로 한다면 그들은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결국 영적 심리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구원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라 5,1)

사실상 우리 내면에도 파라오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사회적 요구를 내면화 합니다. 이를 두고 ‘초자아’(superego)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를 평가하고 채찍질하는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교도권의 가르침과 교리에서 비롯된 통념이 우리 의식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구원이란 통념으로부터, 상식으로부터, 관습과 교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 용기를 주는 새로운 생각이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한편 구원은 유배생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라를 잃고 바빌론에 끌려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신약성서에서 바빌론은 지중해 세계와 유대 땅을 지배했던 제국인 로마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심리적 영적으로 유배란 삶에 의미와 활력을 주는 중심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 소외된 상태를 뜻합니다. 종교 언어를 말하자면, 유배는 우리가 살아 숨 쉬게 하는 근원이신 하느님과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단절된 상태를 뜻하는 ‘유배’라는 은유는 복음서에서 탕자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곳으로 떠났는데, 결국 삶을 허비하고 절망에 빠져 다시 돌아옵니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모두 고백할 준비를 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왔는데, 정작 아버지는 그를 꾸짖지 않고 아낌없이 환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지옥을 마련해 두지 않았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도 유배 이야기에 다름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서 쫓겨나 에덴의 동쪽에 살아가며 잃어버린 것을 갈망하고 그리워합니다.

구원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구원이란 어둠 속에서 빛을 만나는 것이고, 눈먼 이가 시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무명(無明)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6)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눈먼 이를 고치는 이야기가 세 차례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치고, 예리코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를 고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는 요한복음서 9장에 있습니다. 특히 바르티매오 이야기는 상징적입니다. 예수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자, 바르티매오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때 예수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자 그가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고 합니다.(마르 10,52) 결국 구원이란 예수를 통해 시력을 얻고, 이윽고 예수를 따라 걷는 것을 뜻합니다. 어찌보면 관습적 신앙에서 벗어나 복음적 진실을 알게 된 이후, 비로소 예수의 길을 따라 걷게 되는 게 구원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임사체험에 관하여

마커스 보그는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해서는 스스로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라고 말합니다.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내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지도 않습니다. 사후의 삶이 있다는 확신이 우리의 지식을 넘어서듯, 이를 무턱대고 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후세계는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두자는 것입니다.

다만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가 지은 <사후의 삶>에서 시작된 임사체험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합니다. 연구자들이 밝힌 인상적인 사례들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거의 죽을 뻔했던 사람들이 실재의 다른 차원에 들어서는 생생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사체험에서 자주 등장하는 요소로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경험, 강한 빛을 봄, 인생 회고, 유체 이탈,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마주함, 기쁨과 황홀경이 있으며, 그들은 거의 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고, 그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화되었다고 보고합니다. 그래서 임사체험을 신비체험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하고 마커스 보그는 생각합니다. 신비체험처럼 임사체험이 경외와 감사, 변화를 불러오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임사체험이 사후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마커스 보그의 견해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구원이 천당지옥설과 상관이 없다면, 과연 구원이란 무엇인가, 질문하면서, 마커스 보그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점차 문화와 사회의 규범에 속박된다. 그러면 우리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고, 멀어지며, 소외된다. 소외와 유배를 경험하고 관습의 지배 아래에서 이 세상을 봄으로써 눈 멀어 어둠 속을 살아간다. 생의 한복판에서도 사실상 죽은 듯한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더 깊은 의미와 충만함에 굶주려 있고, 목말라하며, 갈망한다. 구원은 해방이며, 다시 연결되는 것이며, 새롭게 보는 것이며, 받아들여지는 것이며,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갈망이 충족되는 것이다. 최선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변화로 가는 길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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