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없었다!“
부활에 대한 이런 해석은 처음 접하는 것이고 내용이 너무 신선하고 공감되어, 어느 신부님의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나의 부활 묵상을 나누려고 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간 것을 기념하는 '주님 부활 대축일 성야, 할렐루야를 노래하고 부활 달걀을 나누면서 부활 축하 인사를 나누는 오늘, 부활이 없었다는 이 묵상 제목은 '스캔들' 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하지만 성경 속 예수 부활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허약하고, 믿을 수 없고, 가난했던 체험이었다. 그것은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빈 무덤'만이 부활을 증명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실제 체험하고 감당해야 했던 부활은, 우리가 기대하는 기쁨과 승리의 부활과는 다른, 낯설고 힘겨운 부활이었다. '부활은 없었다'라는 의미는 이제는 고통 끝, 행복 시작 이라는 의미의 부활은 없다는 뜻이다. 수난이라는 힘겨움으로부터 벗어나는 ‘보상’으로서의 부활은 없었다. 그런 부활은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부활은 '전언' 사건이라고 한다. 예수 부활을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다. 예수님은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나타나지도 않았고, '사도 중의 사도' 라고 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도 빈 무덤에서 낯선 청년에게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는다. 제자들에게 예수는 직접 “나다” 하고 오지 않았고, 별로 전해 듣고 싶지 않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전언으로 듣는다. 아무리 예수를 배반한 제자들이라 하더라도 섭섭했을 것이다. 세 차례에 걸쳐 예수는 부활하리라 전하지만, 그들은 끝내 믿지 않았다.
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는 모두 다르다. 장소 불명, 동선 불명이다.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서 "내가 부활 했으니 이제 힘내"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그들을 혼란시킨다. 예수님은 부활한 후에 전혀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 제자들은 그의 부활로 아무런 힘을 받지 못한다. 참으로 '가난'한 부활이다. 제자들의 상태는 아직 슬픔과 죄책감, 절망과 무력감에 절어있다. 그분이 오셔서 어둠을 싹 몰아내고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켜 주길 바라는데 예수는 자꾸 사라진다. 예수와의 '감질나는 만남'이 그들을 더 힘겹게 한다.
요한복음 21장 3절 "나는 이제 고기 잡으러 가네"라는 구절은, 예수 부활을 체험한 후에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원점’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다. 예수 부활은 제자들을 1도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들을 기쁨이 용솟음치는 상태로 바꿔주지 못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스란히 '이 모양 이 꼴'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복음 속의 부활은 이렇듯, 참으로 '가난한 부활'이었다. 하지만 예수 부활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는 힘이 다 빠진 그들에게 결심할 시간도, 힘도 주지 않고 '파견'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 15) 이것 역시 '가난한 파견'이다.
우리가 부활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은 수난과 죽음으로 무너져버린 상태가, 예수 부활로 ‘원상복구’ 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죽음을 이긴 '승리', 어둠이 사라진 '빛'만 기대한다. 부활은 빈 들판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가난한 전언과 만남과 파견이 바로 부활이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와 '같이'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가난한 부활은 예수 ‘탄생’과 닮아있다. 예수는 뿔나팔을 불며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지구 저편 가난한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의 '전언'으로 잉태되고 탄생한다. 부활은 죽음을 겪고 새롭게 시작하는 예수에게, 가난하고 약하고 불안정한 나의 삶 안에서, 다시 시작하게 해 달라고 '고백'하는 시간이다.
예수 부활이 만약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왔다면, 우리는 거기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부활은 그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그분이 원하는 것은 "나 이렇게 당신 곁에 있는데 함께 하겠소?" "나 이렇게 죽음을 이기고 그대 안에서 다시 시작하려 하는데 함께 하겠소?"라는 질문에, 우리 모두가 "예!(Fiat)"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가가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한다. 그들의 일상적인 인사인 '샬롬'은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한다. 이 평화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평화롭다는 뜻이다. 그것은 '죄 없음'을 의미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샬롬"이라고 인사했을 때, 제자들은 아마 이 말을 듣고 목이 메어 울었을 것이다. 스승 예수가 고난을 겪고 죽어가는 와중에 도망쳤고, 자기들도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문을 걸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샬롬'은, 그들을 새롭게 살게 하고 일으킨 '무죄 선언' 이며 '사랑의 선고'다.
샬롬은 우리가 부활 신앙에서 떠올리고 허락해야 하는 '목소리'다.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샬롬은 자가발전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은총으로 주님께서 '허락'할 때 가능하다. 나 역시, 샬롬이 죄 없음을 뜻한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미사 중에 생각없이 하던 평화의 인사, “평화를 빕니다”가 새롭고 무겁게 다가왔다.
지금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1만여명을 수감하고 그들에 대한 사형법을 통과시키고 축배를 들고 있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라는 참혹한 나치즘을 경험한 이들이 '악의 축'이 되어 악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맞이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대체 무엇일까? 이 질문은 예수를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않는 이들 모두에게 던져진 큰 '도전'이다.
오늘 '예수 부활 파스카 성야 '때 우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리스도 우리의 빛"을 노래하며 하나씩 촛불을 밝힌다. 예수의 부활은 촛불처럼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가난한 전언과 만남과 파견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 4.16 세월호 희생자, 제주 4.3사건 희생자,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차별과 배제로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모든 이들, 그리고 전쟁의 공포 속에서 죽은이들, 절규하는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하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사랑의 '빛'으로 오시어 "나 그대들과 함께 있소"하고 위로해 주시길, 그 위로로 그들도 참 부활을 누릴 수 있도록 '샬롬'을 간절히 청해보자.
"그리스도 우리의 빛". "예수 부활하셨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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