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처음에는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작은 차이가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거리로 벌어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는 완전히 다른 것임이 완연히 드러나게 됩니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서 이런 일이 흔합니다. 그래서 늘 다시 살피는 일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 번 방향이 설정되면 그 방향이 고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교회는 그런 방향을 무시하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이 다른 모든 것을 정당화하여 결과적으로 반 복음적인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상이 되곤 합니다.
오늘 저는 ‘안녕교회’라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기사에서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안녕을 추구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안녕을 성서에서 말하는 평화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샬롬과 신약의 에이레네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안녕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처럼 쓰는 안녕이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샬롬이고 신약에서는 에이레네잖아요. 안녕은 삶의 작은 부분부터 모든 영역까지 온전한 평화를 이루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안녕교회는 '나'와 '우리', 그리고 '창조 세계'의 안녕을 추구합니다."-뉴스엔조이 기사에서 인용
얼마든지 가능한 이해입니다. 샬롬과 에이레네를 안녕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녕을 추구한다는 말이 제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샬롬과 에이레네는 성서적인 평화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틀린 이해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제게 조금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성서가 말하는 샬롬과 에이레네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샬롬과 에이레네는 하느님의 통치 가운데 이루어지는 결핍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반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이루고 완성하는 것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인간의 반응을 추구한다는 단어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전적인 수동을 담아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영적인 성장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능동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 성숙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간에 멈추어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22,33-34)
베드로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 그런 마음이었고, 그렇게 각오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런 자신이 흔들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는데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베드로는 비로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고, 그래서 밖으로 나가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이 생각했던 길로 가시지 않자 그분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은 삼십 냥이라도 건지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 생각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 역시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베드로처럼 비통하게 울고 다시 티베리아스 바닷가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넘겨준 유다는, 그분이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고, 말하였다.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 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요?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하였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3-5)
유다 역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습니다. 만일 그가 베드로처럼 비통하게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했다면 그도 티베리아스 바닷가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유다를 가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바로 수동과 능동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비로소 수동의 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자아가 깨질 수 있는 은혜를 부인한 것입니다.
이후 베드로는 주어가 바뀐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 촌철살인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호언장담을 일삼던 예전의 베드로였다면 그는 그런 질문을 하는 예수님에게 무슨 그런 질문을 하시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를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신뢰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늘 자기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이 바로 능동에서 수동의 신앙으로 바뀐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도 여전히 베드로와 같은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자신의 생명이 주님의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불속에라도 뛰어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에는 ‘고지론’을 주장하면서 엘리트가 되어 주님의 일을 하겠다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목적을 정해놓고 그것을 달성하겠다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직 수동의 신앙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샬롬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샬롬은 주님을 온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샬롬은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통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동의 신앙에 이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샬롬이나 에이레네를 안녕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그런 안녕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한 14,27)
이 평화를 누리는 안녕교회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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