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는 공포를 제조하는 데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정책과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대중에게 공포를 주입하여 발작하게 만드는 기술을 사용합니다. 공포심에 반응하는 대중은 사유가 정지되고 누군가의 선동에 쉽게 동화됩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이러한 대중의 심리를 가장 잘 꿰뚫어 본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은 사랑이 아닌, 공포에 반응한다.”라고.
미국의 공화당이 집권할 때마다 이러한 공포 제조는 반복됐습니다. 1950년를 휩쓸었던 메카시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제조했습니다. 미국 사회에 암약하고 있다는 공산당 프락치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회 질서와 규범이 무너지고 혼돈의 나락에 빠졌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이라크, 이란, 북한을 묶어 ‘악의 축’이라 하였습니다. 트럼프는 미국의 경제를 망치고 병들게 만든 요인이 이민자들이라고 선포하고 이들을 추방하기 위해 거칠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급기야 이란을 침공하였습니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의 공포처럼 이란의 핵 개발로 인한 중동 내 '임박한 위협'의 공포를 내세웠습니다. 모두 사실이 아니라 가공된 이야기입니다.
공포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사실보다는 추론과 상상을 통한 가공이 훨씬 유리합니다. 목전에 드러난 사실과 현상보다 상상을 통해 유입된 가공물은 공포의 효과가 훨씬 큽니다. 예를 들어 이재명은 조폭이다, 이재명은 빨갱이다, 이재명은 독재자다, 라는 말들은 사실 증거보다 상상으로서의 이미지가 훨씬 큰 효과를 주게 됩니다. 이렇게 가공된 악(惡)은 폭력과 범죄를 정당화시켜줍니다. 5.18 때 북한군이 광주에 잠입해 시민의 무장 폭동을 선동했기 때문에 전두환의 광주 학살은 정당하다는 논리, 대량살상무기(WMD)가 있다는 가정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던 부시 대통령의 논리에는 공포심이 내재 돼 있습니다. 북한군이 우리 안에 잠입해서 국가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공포, 대량살상무기가 미국과 세계 평화를 파괴할 것이라는 공포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는 종교에서 기원합니다. 특히 기독교의 종말론적 세계관은 근대 정치 문화에 나타난 공포 조작의 기원이라 해도 무리한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 종말론의 정수는 성서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묵시록입니다. 요한묵시록을 종말에 대한 환상이라고 해석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인간과 세계를 보게 됩니다. 회복할 수 없는 파멸적 종말 이야기를 읽은 기독교인들은 그 파멸의 원인자인 적그리스도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동시에 갖습니다. 그래서 종말에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신앙의 순수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과 순수에 반하는 적대자에게 저주와 파멸을 부르는 언어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대자에게 적개심 가득한 말을 쏟아부을수록 순수와 사랑이 지켜진다는 역설이 종말론적 논리 구조입니다. 자신이 순수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일수록 거칠고 상스러운 말들을 큰 목소리로 떠들어야 됩니다. 전한길, 장동혁, 안철수, 윤석열, 나경원, 배현진 류의 사람들이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큰 소리로 떠드는 것은 종말론적 역설 논리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전광훈, 손현보, 심하보 목사들이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도 종말론적 역설 논리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논리에는 종말론적 구원관이 깔려 있습니다. 적대자들을 이 지구에서 다 쓸어내 버리는 게 요한묵시록의 종말 서사입니다. 하늘에서 예수가 백마를 타고 내려와 적그리스도를 다 박살내고 144,000명만 선택적으로 구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박살낼 자들과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공포 마케팅에 응용된다는 것입니다. 트럼프가 항공모함을 끌고 와서 윤석열을 구출하고 이재명을 잡아간다는 서사는 요한묵시록의 종말론과 구원 서사의 신 버전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적 역설 논리에는 적대자를 위험 요소로 각인시켜 그를 혐오하고 폭력을 가하도록 선동하려는 의도가 내재됩니다. 자신이 직접 공격하지 못할 때, 제3자를 통해 그에게 폭력을 가하도록 선동하는 것입니다. 십자군 전쟁에 내몰렸던 순진한 농부들과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을 사수한다는 종교적 명분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명분도 다 옳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전쟁의 명분도 옳은 것은 없습니다. 타자를 죽여서 나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옳다면 세상의 모든 인간은 다 죽여 없애야 합니다.
배리 글래서너 교수의 책 <공포의 문화>는 정치가 어떻게 공포를 제조하고 언론(미디어)이 어떻게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지 미국의 정치와 문화의 얼개를 들쳐 보여 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당한 공포는 위험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어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피하게 해 주지만, 거짓 공포(과장된 공포)는 우리를 파멸에 빠트린다고. 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거짓 공포와 과장된 공포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이 거짓된 공포의 노예가 되기 쉬운 것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체제 순응적인 가치관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의문을 가지며 질문하지 않고 체제에 안주하여 그 질서가 제공하는 스스템을 누리려는 태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 살자고 하는 말보다 예수 믿고 구원받자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체제 순응적이라서 교회에 헌신도가 높고 헌금도 잘 합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교회는 쉽게 성장합니다. 사람들이 거짓 공포에 잘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적대자에게 혐오와 폭력적 언동을 더 과격하게 합니다. 또 그런 집단(교회)에 더 적극적으로 헌신합니다. 요즘 성장세가 빠른 교회들의 특징을 보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치든지 종교든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지성이 살아있고 깨어 있는 사회에서는 그게 쉽게 통하지 않는다고 배리 글래스너는 말합니다. 한국 사회는 미국보다 공포 마케팅에서 좀 더 자유로운 문화입니다. 한국은 이미 공산주의라는 공포, 천국과 지옥이라는 공포, 경제 폭망이라는 공포, 이런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로 진입했습니다. 그래서 전한길이 길길이 날뛰고 장동혁이 헛소리를 하고 전광훈, 손현보가 말 같잖은 소릴 해도 파장이 크지 않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공포 마케팅으로 비즈니스하는 정치와 종교는 퇴화되고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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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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