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외곽순환도로를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로드킬(Roadkill)당한 고양이나 다른 짐승들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즉시 저도 모르게 십자성호를 긋곤 합니다. 밥 먹을 때도 빠뜨리곤 하는 성호를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으면 자동으로 하게 되는 것이지요. 누군가의 서러운 소식을 들어도 곧바로 성호를 긋고, 잠시 그 사람 생각을 합니다. 자리를 틀고 앉아 기도는 자주 못하지만 화살기도를 바치는 데는 익숙합니다. 천하만물이 하느님 그늘 아래 있으니, 그분의 자비가 가서 닿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불자들이 걸핏하면 “나무관세음보살” 하듯이, 내게 왜 이런 버릇이 생겼을까 생각하면, 아마도 살 날이 ‘아주’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 미루어둔 인연은 이내 사라질 것이라는 두려움, 지금 즉시 사랑하지 않으면 영영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마음이 움직일 때 곧바로 행하지 않으면 뒤늦게 후회가 찾아온다는 경험 때문입니다. 내 손끝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내 축복이 미약해서 그분께 맡겨두는 것이지요.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해도 당신께서 살펴봐 주시라고, 제가 돌볼 수 없는 이들을 가엾게 여겨달라고 청탁하는 것입니다. 성호긋기는 이런 방식으로 내 삶과 그 언저리를 하느님 안에서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어둠 속의 빛처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암병동> 등으로 유명한 러시아 작가 알렉산더 솔제니친(1918-2008)은 1945년에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편지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8년간 감옥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알고 긋는 십자성호>에서 버트 게찌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솔제니친은 삽에 기대어 회색빛 구름이 음울하게 떠다니는 하늘을 보았다. 거친 바람이 그의 죄수복 속까지 파고들었고 영혼 속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뼈 마디마디와 근육들이 욱신거렸고, 위는 굶주림으로 들볶였다. 여러 해 동안 시베리아 작업장에서 심한 노동을 해온 탓에 건강을 해치고 희망도 잃게 되었다.”
그는 삽을 떨어뜨리고 죄수들 틈을 빠져나와 근처 벤치에 앉았습니다. 곧 간수가 와서 작업장으로 돌아가라고고 명령하거나 매질이 돌아올 것입니다. 곧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다가왔기에, 솔제니친은 욕설을 감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앞에는 수척한 노인 죄수 한 명이 서 있었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솔제니친 앞에 무릎을 꿇고 막대기로 흙바닥에 십자성호를 그린 다음 서둘러 일을 하러 돌아갔습니다. 그때 어두운 생각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비추었다고 솔제니친은 고백합니다. 그때 그가 다시 일어나 작업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솔제니친의 참혹하게 아름다운 글을 다시 볼 수 없었을 겁니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모든 고통을 한순간에 하느님 안에서 봉헌하기로 마음먹게 만든 것은 십자성호였던 것이지요.
복음적 명령에 복종할 마음이 있다면
살면서, 한시라도 그분 생각을 떠나지 않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존재하시지만 어디서나 생생하게 현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순간 내 마음이 그분께 닿아야 그때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까닭입니다. 가장 쉽게 습관적으로 그분 앞에 나를 끌어당기는 방법은 수시로 때때로 십자성호를 긋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의식하지 않아도 그분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는 생각, 내 일상이 낱낱이 그분과 함께 걷고 있다는 믿음이 발생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무장하지 않은 채 거리에 나섭니다. 내 욕망에 끌려다니며, 복음적 명령에 복종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나한테 말해주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복음적 현실을 기쁨으로 뒤집을 용기가 생깁니다.
4세기의 뛰어난 설교자이며,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였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7-407)는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성호를 긋지 않고 절대 집을 나서지 마라. 그것은 그대에게 지팡이이며 무기이고 무너뜨릴 수 없는 요새가 될 것이다. 그대가 그 강력한 무기로 무장한 것을 보면, 인간도 악마도 감히 그대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성호는 그대가 군인이며 악마와 대적할 준비가 되어 있고, 정의의 왕관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십자가가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가? 그것은 죽음을 이겼고, 죄를 없앴으며, 지옥을 비웠고, 사탄을 물리쳤고, 인류를 구원하였다.”
예수의 낙인을 내 몸에 찍으며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성호로 사람이나 물건을 축복하였다고 합니다. 4세기의 교부 성 바실리오(329-379)는 “사도들이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들, 즉 세례를 받는 사람들을 십자성호로 표시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1,13) 하고 말하며, 갈라티아 신자들에게는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 6,17) 하고 전했습니다. 내 안에서 나를 통해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지가 십자성호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동방정교회는 십자성호를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 어깨로 긋습니다만, 가톨릭교회에서는 15세기 이후부터 영국 미들섹스의 브리지트 수녀회와 베네딕도 수도원의 관행에 영향을 받아 줄곧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 어깨로 성호를 긋습니다. 그 의미를 <Mirror of our Lady>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이 축복의 행위를 할 때, 먼저 손을 이마에 대고 가슴으로 내린 다음 왼쪽, 그 다음에 오른쪽으로 가져간다. 이 행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위에서 내려오셨고, 즉 거룩한 강생에 의해 성부가 계신 곳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셨고, 지상에서 왼편으로, 즉 모진 고난에 의해 저승으로 가셨다가, 다시 그곳에서 영광스럽게 승천하심으로써 성부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렇게 믿는 것이다.”
이 문장의 중세적 어법을 다시 읽어본다면,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기에, 사람들 안에 현존하시며, 그것도 고통을 받는 인민들에게로 가시고, 그들에게 결국 기쁜 소식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천상/하느님과 지상/인간이 통합되고, 고통/십자가가 기쁨/부활로 전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성호를 그을 때마다 우리 안에 이미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십자성호를 가톨릭교회에서는 ‘준성사’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축복과 힘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해주는 행위가 준성사입니다. 그래서 버트 게찌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십자성호를 그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로 생긴 영적인 힘의 원천에 플러그를 꽂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미사를 비롯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시작하기 전에 성호부터 긋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그분 현존 안에서 일하겠다는 뜻입니다.
치체스터의 주교 성 비카르도(1197-1253)는 “오, 친구이며 형제이며 가장 자비로우신 구세주시여, 제가 당신을 더 분명히 알게 해주시고, 더 사랑하게 해주시며, 매일매일 더 가까이 따르게 하소서.”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십자성호는 그분과 우리의 친밀감을 더 느끼게 해주고, 그분을 나의 동료이며 동지이며 동무이며 형제이며 연인으로 부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성호는 그분을 내 곁에 초대하는 일이며, 그분이 기뻐할만한 일을 하겠다는 작심(作心)입니다.
결국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제 욕망에 따라 사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인간성을 입겠다는 다짐입니다. 그것은 그저 종교적 감흥이나 감정적 동의에 머물지 않고 복음적 행동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트 게찌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품성을 그대로 만들어 우리도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계실 때 하셨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동정, 겸손, 자비 등 이러한 특성은 느낌이 아닌 행동에 관련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감정이 아닌 행동을 닮도록 이끎으로써 우리를 점점 더 주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만든다. ... 증오에 찬 행동 대신 애정어린 일을 하는 것으로, 싸움 대신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화를 폭발하는 대신 참을성 있게 자신을 절제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존 헨리 뉴먼 추기경(1801-1890)은 “죄에 물든 내 몸에 성호를 그을 때마다 온갖 선한 생각들이 내 안에서 일어나, 잠자고 있던 신성한 힘이 회복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성호를 긋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습관이 인격에 새겨져 우리가 언제든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는 모든 순간에 그분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제로부터 영원히 아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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