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반사적으로 주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번 재의 수요일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어지럼증으로 저는 거의 유체이탈 수준의 자아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내 영혼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 5,3-4)
얼핏 생각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인내의 형성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환난을 즐거워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환난이 자신들의 부푼 자아의 바람을 빼서 원래대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가들에게서는 물론 목사들에게서도 일어나는 성범죄를 보고 있습니다. 자아가 부풀면 그에 따라 욕망도 부풀어 오릅니다. 성범죄는 바로 그들의 부푼 자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이 인내를 형성한다는 사실 이전에 인내라는 것이 부푼 자아를 다시 작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작점이자 복음의 발화점이기 때문에 환난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늘 그리스도교 신앙은 작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해왔습니다. 가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해지면 자아가 쪼그라듭니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자아가 쪼그라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자가 되면 자아가 부풀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입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물론 그 선택은 자유입니다.
저는 바늘귀라는 표현이 과장법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은 자아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침내 소멸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 입구를 바늘귀에 비유한 것은 오히려 적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아를 부풀리는 것은 단순히 소유뿐만이 아닙니다. 정치가들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권력 역시 자아를 부풀립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고 있는 일 역시 자아를 부풀립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자아가 부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겸손으로 자신을 위장합니다. 하님은 그런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을 세례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
그리스도교 신앙이 일(doing)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being)의 문제라는 사실은 바로 자아와 관련된 언급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일은 자아를 부풀립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아를 본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재”라는 단어입니다. 사순절은 근본으로 돌아가 자신이 재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도토리를 주워보면 크기의 차가 상당합니다. 큰 것을 주우면 그래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하지만 그런 도토리를 하늘에서 바라보면 크기의 차이는 사라집니다. 남은 것은 도토리라는 정체성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선 도토리와 같음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늙어서 가뜩이나 아름답지 않은 제 외모가 더 초라해졌습니다. 가진 것이 없고, 하는 일조차 변변한 것이 없으니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제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자아가 부풀 수 없는 상황과 조건을 주님이 제공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저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저의 자아가 부풀지 않게 해주는 좋은 조건 중의 하나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히브 11,36-38)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왜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생하는 것을 좋아 하시겠느냐?”고 반문하며 ‘번영신학’을 내세우고 지지합니다. ‘번영신학’을 지지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그들의 내면에서는 어느 정도 ‘번영신학’을 심정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제가 인용한 히브리서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이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니라는 주장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복판에는 “자아”가 있습니다. 이 자아가 부풀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끝장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아가 부푸는 길을 달려가며 하느님을 찬양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그리스도교의 변질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교가 변질되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생각하는 이라면 이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원점에 서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 원점이 바로 “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우리의 신앙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지난 일 년 간 자신도 모르게 부풀어 오른 자신의 자아를 보고 회개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파심에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자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주기적으로 자신의 자아를 면밀하게 살펴보고, 원래의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창세 3,19c)
새삼 제게 어지럼증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재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손길에 감사를 드립니다.(흙이라는 단어는 재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주님은 올해의 사순절을 제대로 시작하게 해주셨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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