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있어서 행복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나 또한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3-4)라고 하였으니, 가난하고 슬픈 영혼들은 예수님께 “그대가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고, 그분이 이승를 떠난 뒤에도 그분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랑과 존경이 차고 넘쳐서 그분을 ‘주님’이라 발음하기 시작했을 텐데, 나를 온통 차지하신 분이란 뜻이겠지요.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십시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25년 4월 21일 이승을 떠났지만, 우리는 아직 그분을 기꺼이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있어서 행복했던 날들이 사무치는 까닭입니다. 2025년 10월 4일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기념축일에 레오 14세 교종께서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 TE)라는 교황권고를 발표하시면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마음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레오 14세 교종은 프란치스코 교종이 쓰신 초안을 수정보완하여 당신 이름으로 첫 권고문을 작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헌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마지막 권고이면서, 레오 14세 교종의 첫 권고인 셈입니다.
이 문헌의 부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입니다. 아르헨티나의 마리오 호르헤 베르골료 추기경은 2013년 3월 13일 오후 6시 45분,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그의 당선이 확실해졌을 때, 교황청 성직자성 명예장관이며 브라질 상파울로 교구의 명예대주교인 클라우디오 후메스 추기경이 옆에 앉아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마십시오.” 베르골료 추기경은 그 말을 기억하여 자신의 교황명으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교종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개표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나는 지난 세월의 여러 전쟁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는 가난과 평화,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대변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창조물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의 사람, 평화의 사람, 피조물을 사랑하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는 피조물과 그리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저는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원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고통받는 피조물과 그중에서도 ‘가난한 이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분의 마지막 발언에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전합니다. “내가 당신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주시길...” 그분은 저승에 가시면서도 교황좌에 오를 때의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다른 형제들과 더불어 평범한 일상을 살기 위해 사도궁 대신 바티칸의 게스트하우스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어차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순례란 뜻이겠지요. 그리고 2022년에 미리 작성해 둔 유언에 따라 교종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바티칸 바깥 로마 시내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묻혔습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 경당과 스포르차 경당 사이의 측면 복도에 위치한 매장소”라고 유언장에 적시되어 있는 그곳은 본래 촛대를 보관하는 창고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묘비에는 라틴어 로 “프란치스코”(Franciscus)라는 말만 새겨졌습니다. 망자에 대한 어떤 찬사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유언대로 묘지는 지면보다 낮은 위치에 안장되었고, 무덤 뒤 벽면에는 프란치스코 교종이 생전에 착용하던 철제 십자가 목걸이와 같은 디자인의 소박한 십자가가 걸렸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유언은 이렇습니다.
“나를 사랑해 주고 계속해서 기도해 준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합당한 보상을 내려 주시기를. 내 삶의 마지막 부분을 채운 이 고통을 주님께 바칩니다, 세상의 평화와 인류의 형제를 위하여.”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
교황권고의 첫 구절은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묵시 3,9)입니다. 레오 14세 교종은 이 성서 구절이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다”(루카 1,52-53)는 마리아 찬가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회의 최하층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으며,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쏟으심으로써 이들이 특히 약하고 비참하거나 고통받을 때 이들의 존엄을 확증해 주셨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관상할 때 “타인의 고통과 필요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주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서 해방을 가져다주시는 주님 사업에 함께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확신을 얻는다”(2항)고 말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곧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은 하나”이며, “낮고 무력한 이들과의 접촉은 역사의 주님을 만나는 근본적인 방식”이고, “그분은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계속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만날 방법은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가난한 이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며, 그분에게 가까이 가는 길 뿐입니다.(6항 참조)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면서 동시에 불편한 소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용기도 얻지만, 그 복음에서 달아나거나 외면하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복음’은 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우리 자신과 교회는 아직 충분히 가난하게 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저 예수님의 말씀이지, 그분의 희망사항일 뿐이지, 하고 짐짓 비껴가고 싶어합니다. 어떤 이는 “내가 아파트 사는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가난한 사람은 보이지 않던데” 할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할 일도 없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눈에 보여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면 자꾸 눈에 밟히는 세계가 있기도 합니다.
교황권고 108항에서 레오 14세 교종은 대 그레고리오 교종 성인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찾기만 하면 언제나 라자로를 만날 수 있고, 찾지 않아도 날마다 우리 문 앞에서 그를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거지들이 우리를 에워싸며 자선을 구걸하지만, 나중에는 그들이 우리의 변호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자비의 행위를 할 기회를 낭비하지 말고, 여러분이 가진 좋은 것들을 그냥 쌓아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더라도 그들을 멸시하지 말라고 타이릅니다. “가난의 불길이 그들의 죄스런 행위를 이미 정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우리들의 필요와 행복과 성취에만 골몰할 때,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교만을 일깨우고, 겸손한 마음을 심어주는 “조용한 스승”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108항 참조) 우리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사실상 간단합니다. 내가 지금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친절과 호의를 기꺼이 베풀고 있는지 보면 됩니다. 내 믿음이 깊으면 내 사랑이 커집니다.
자선은 기도의 날개
하느님께서 ‘살’(sarx, 肉)이 되어 오셨듯이, 미사 때마다 그분의 살을 받아먹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당신의 살을 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제 살을 누군가에게 주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굶주리고 가난한 육신을 취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중심에 있다”고 레오 교종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신을 안전하다고 여기며 ‘나는 다른 이의 것을 훔치지 않고 내 몫을 누릴 뿐”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109항 참조)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자선은 기도의 날개이다. 기도에 날개를 달지 않으면, 기도는 좀처럼 날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같은 맥락에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이여, 그분의 형제요 공동상속자들이여, 내가 무언가를 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를 찾아갑시다. 그분을 돌보고, 먹이고, 입히고, 맞이하고, 공경합시다. 단지 어떤 이들처럼 식사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향유로 그분에게 기름 붓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아리마태아의 요셉처럼 무덤을 빌려주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니코데모처럼 반쯤 사랑하는 마음으로 장례를 치러드리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동방박사들처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땅바닥에 누워 있는 가난한 이들의 모습 속에서 그분께 자비를 베풉시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그들이 우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레오 14세 교종은 “어떤 형태로든 자선은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감동시키고 부드럽게” 한다면서, 우리들의 자선이 세계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의 살에 다가가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멀리 있던 이들을 가깝게 하며, 낯선 이들을 하나로 묶고, 원수들을 화해시킵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을 가로지르며, 사회의 가장 은밀한 틈새에까지 스며듭니다. 그 본성상 그리스도교적 사랑은 예언적이며, 기적을 일으키고 한계를 모릅니다. 그것은 겉보기에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자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사랑에 한계를 두지 않고, 싸워야 할 원수를 두지 않으며, 다만 사랑해야 할 남녀만을 아는 교회야말로 오늘 세상이 필요로 하는 교회입니다.”
누군가 교회를 두고, 나를 두고 “그대가 있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보다 먼저 교종께서도 흐뭇해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랑은 상호적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면, 사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지금 여기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