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종교미술, 특히 그리스도교미술은 더 이상 하나의 분명한 길 위에 서 있지 않다. 과거처럼 미술사적 규범이 존재하지도 않고, 과거처럼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종교적 세계관도 이미 해체되었다. 그럼에도—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종교미술은 오늘 다시 질문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이 글은 ‘단토 이후’의 예술 조건 속에서, 현대 종교미술, 특히 그리스도교 미술이 감당해야 할 과제와 방향을 미학적·신학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제시하려는 시도다.
1. ‘단토 이후’란 무엇인가: 예술을 지탱하던 이야기의 종료
오늘날 “단토 이후”라는 표현은 한 철학자의 이론을 지칭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이 놓인 역사적·사유적 조건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전환을 분명히 한 인물이 미학자이자 미술비평가였던 아서 단토다.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소멸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을 이끌어 오던 하나의 방향성, 하나의 진보 서사의 종료를 의미한다.
오랫동안 서구 미술사는 “예술은 발전한다”는 전제 위에 놓여 있었다. 재현은 점점 정교해져야 했고, 형식은 점점 순수해져야 했으며, 이전의 양식은 다음 양식에 의해 극복되어야 했다.
예술은 늘 이렇게 질문받았다. “이것은 충분히 새롭고, 충분히 진보적인가?” 이 기준 앞에서 반복과 상징, 초월을 다루는 종교미술은 쉽게 주변화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 전제는 결정적으로 흔들린다. 미술관의 브릴로 박스와 슈퍼마켓의 브릴로 박스가 시각적으로, 물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 앞에서 단토는 질문을 바꾼다. “무엇이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가?” 그의 답은 분명하다.
예술은 더 이상 형식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예술은 의미를 구현한 대상, 그리고 해석의 맥락 속에 놓인 대상이다. 이 순간부터 예술에는 더 이상 ‘가야 할 하나의 길’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2. 단토 이후의 예술 조건: 자유와 책임
이로써 형성된 ‘단토 이후의 예술 조건’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예술에는 더 이상 단일한 역사적 방향이 없다. 회화가 설치보다 뒤처진 것도, 종교미술이 세속미술보다 낡은 것도 아니다. 모든 양식은 동시에 가능하다.
둘째, 예술은 스스로를 설명해야 한다. 형식이나 장르로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은 이제 “이것은 예술인가?”가 아니라 “왜 이것이어야 하는가?”다.
셋째, 예술의 중심은 형식이 아니라 의미다. 단토 이후의 예술은 얼마나 새로워 보이는가가 아니라, 어떤 의미가 여기에서 발생하는가로 평가된다.
이 조건은 역설적으로 종교미술에 불리하지 않다. 오히려 종교미술의 본래적 성격—의미의 필연성, 사건성, 현존—을 다시 전면으로 불러낸다.
3. 현대 종교미술의 첫 번째 과제: 설명을 멈추는 용기
현대 종교미술이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설명하려는 충동이다. 오랫동안 종교미술은 교리를 전달하고 이야기를 가르치며 신앙 내용을 시각화해 왔다. 그러나 정보와 이미지가 과잉된 시대에 또 하나의 설명 이미지는 쉽게 소비되고 소진된다.
단토 이후의 조건에서 종교미술은 보여주기보다 일어나게 해야 한다. 의미를 전달하는 대신, 의미가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종교미술은 교훈의 미술에서 벗어나 사건의 미학, 현존의 미학으로 이동한다. 신앙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4. 상징에서 성사로: 사건이 일어나는 미학
상징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현대 종교미술의 핵심은 상징의 나열이 아니다. 상징이 의미를 가리킨다면, 성사(sacrament)는 의미가 실제로 작동하는 사건이다. 빵과 포도주는 무엇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은총은 일어난다.
현대 종교미술의 과제는 상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성사적 구조를 지닌 공간과 형식을 만드는 데 있다. 빛, 침묵, 반복, 느림은 미적 장식이 아니라 신학적 조건이다. 종교미술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머무는 자리가 될 때, 의미는 전달이 아니라 발생으로 경험된다.
5. 추상미술의 재발견: 신학적 언어로서의 추상
추상미술은 종교미술과 멀어 보이지만, 신학의 언어 구조를 살피면 오히려 가장 가깝다. 하느님은 재현될 수 없고, 개념으로 포획될 수 없다. 그래서 신학은 부정의 언어, 침묵, 빛과 어둠의 대비를 사용해 왔다. 추상미술은 이 태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추상이 신학적 언어가 되는 순간은 형식이 아니라 태도에서 결정된다. 설명하려 들지 않고, 결론을 강요하지 않으며, 의미 이전의 자리—곧 신비(mysterium)의 문턱—를 열어둘 때, 추상은 무의미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음의 충만이 된다.
6. 현대 그리스도교 미술의 방향: 현존과 관조의 회복
오늘의 그리스도교 미술은 과거의 형식을 반복할 필요도, 세속 미술을 모방할 필요도 없다. 대신 회복해야 할 것은 현존과 관조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선을 멈추게 하고, 시간을 늦추며, 몸과 침묵을 호출하는 미술—판단하기보다 머무르게 하는 미술이다.
이때 종교미술은 종교 내부의 장르가 아니라, 의미의 공백 속에 놓인 현대인 전체를 향한 공간이 된다. 교리를 아는 사람만이 아니라, 질문을 가진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자리에서 종교미술은 다시 공적 언어를 획득한다.
7. 마무리 말: 단토 이후,
종교미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단토 이후의 시대는 예술이 자유로워진 시대이자, 동시에 책임을 지게 된 시대다. 아무 것이나 예술이 될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왜 예술이어야 하는가를 끝까지 물어야 한다.
현대 종교미술은 신앙을 보여주는 미술이 아니라, 신앙이 사건으로 발생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미술이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단토 이후의 예술 조건은 종교미술—특히 그리스도교 미술—에게 위기가 아니라 늦게 도착한 정당성이 된다.
예술이 다시 인간의 깊이를 감당해야 하는 시대, 종교미술은 가장 오래되었고 동시에 가장 동시대적인 언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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