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일꾼 삶의 예술 세미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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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일꾼 삶의 예술 세미나 후기
  • 이정화
  • 승인 2026.01.2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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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화 칼럼

지난 주말, 전주 치명자산성지 평화의 전당에서 1박2일 일정으로 열린 '가톨릭 일꾼 세미나'에 다녀왔다. 가톨릭일꾼을 시작한 지 올해로 10년. 그동안 세미나는 세 번 열렸고, 코로나 이후론 처음이다. 그래서 더 기대되고 설레었다. 더구나 서울이 아닌 전주라는 낯선 지역에서, 각지에서 모인 낯선 얼굴들과 만난다는 것은, 호기심과 약간의 떨림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치명자산성지라는 ’기도‘ 공간이 주는 피정의 의미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좀 더 알고자 하는 ’공부‘의 의미가 어우러진 세미나였다. 세미나를 이끄신 가톨릭일꾼 편집장이면서 코디네이터인 한상봉 선생님은 가톨릭 일꾼은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며, 하느님 자비를 찾아가는 ‘캠프’로써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터미널이요, 학교라고 소개하셨다.

세미나에 참가한 인원은 놀랍게도 50명이었다. 예전에 서울에서 했던 세미나는 많아야 20명 안팎의 인원이 모여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는 전국 각지에서 혼자, 부부, 친구, 혹은 자매들이 다양한 사연을 안고 모인 것이다. 한 선생님도 오랜만에 가톨릭 신자만이 아닌, 개신교 신자, 비그리스도인과 함께하는 세미나여서 신경을 많이 쓰신 흔적이 역력하다. ’삶의 예술 세미나‘답게 강의, 영화, 음악, 영상들을 다양하게 준비하셨고, 참석하신 분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을 몸으로 느끼게 하려고 혼신을 기울였다. 어떤 분은 고품격 하이클래스 세미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고품격 세미나를 조금이라도 맛보시라고 나눈다.

 

영화, <이다>를 보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영화 <이다>를 봤다. 파벨 파블리코프스키 감독의 이 작품은 1960년대 폴란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흑백 영화로 절제된 대사인 ‘침묵’이 오히려 모든 것을 말해주듯 관객을 집중시키고 긴장시킨다. 수녀원에서 홀로 자란 ‘안나’. 고아로 알고 커왔고 서원식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런데 원장 수녀로부터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의 존재를 알게 되어 잠시 만나러 떠난다. 이모 완다를 만나서 알게 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이다’라는 본명, 부모의 죽음과 묻힌 곳을 찾으려고 이모와 떠나는 동행,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결국 자살을 택한 이모 완다, 이모을 잃은 후 수녀복을 벗고 이모처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리스라는 남자와 하룻밤을 지내지만, 결혼하자는 남자의 청을 거절하고 수녀복을 입고 다시 거리를 빠르게 걸어가는 이다. 그녀의 마지막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수녀원으로? 결말은 우리에게 열려있다.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는 크고도 무겁다. 자기의 정체성이 유대인인 줄도 모르고, 가톨릭 수녀원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자란 이다의 삶은, 자신이 결단하고 책임지는 주인인 삶이 아니었다. 이다가 수녀복을 벗고 죽은 이모처럼 하이힐을 신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타락이 아닌, 이제야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다가 빠르게 어디로 걸어가는 것은 답을 찾은 자의 걸음이 아니라, 자기가 결정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발걸음이라 하겠다.

이모 완다는 “진실을 알면 신을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이다는 “진실을 알고도 신을 믿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 역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그분이 나와 함께 현존한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사랑이 있다고 믿는다면 이다처럼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지 않을까?

 

선한 능력으로, 노래를 배우다

세미나 동안 노래를 배우고 또 불렀다. 첫 번째 배운 노래는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achten)”이다. 이 노래는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반나치 운동가로 순교한 고백교회 설립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1944년 12월19일 약혼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에게 쓴 크리스마스 편지에 적혀 있는 시를 기초로 독일의 시그프리트 피츠가 작곡한 노래다.

2026년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노래 같아서 가슴이 따뜻하다. 1절만 가만히 불러본다. “그 선한 힘에 고요히 감싸여 그 놀라운 평화를 누리며, 나 그대들과 함께 걸어가네. 나 그대들과 한 해를 여네. (후렴) 그 선한 힘이 우릴 감싸시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주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셔 하루 또 하루가 늘 새로워.” 그는 종전 바로 직전에 죽임을 당한다.

 

 

값비싼 은총으로...강의

이어지는 한 선생님의 강의는 “본회퍼의 영성과 값비싼 은총”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으라 하지 않고 늘 나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를 따르는 삶, 즉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본회퍼는 “자유여,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느님의 얼굴을 보리라”고 했다. 또 “하느님 얼굴에서 자유를 발견하는 것은, 오랫동안 훈련하고 행동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얻은 ‘값비싼 은총’이라고 했다. 우리는 과연 값비싼 은총을 얻고자 하는가? 내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값싼 기도를 하고, 돈만 지불하는 값싼 은총을 바라지 않는가? 우리의 신앙은 내가 아닌, 예수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본회퍼는 ”신앙은 값비싼 은총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고 하면서, ”값싼 은총을 판매하는 교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은폐해 주는 값싼 덮개를 발견한다“고 지적한다. 제도 교회 안에 죄와 벌을 피해 보려는 갖가지 장치들이 있다. 그것은 예수 따르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본회퍼는 “예수를 따르는 것은 몇몇 사람의 칭찬할 만한 특별한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리신 명령”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미움받을 용기와 결단을 요구한다.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가 그랬듯이, 제자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 순교자들이 그랬듯이. 예수를 ‘제대로’ 따른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이 본회퍼가 말하는 값비싼 은총이 아닐까?

본회퍼는 말씀을 ‘영성화’ 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응답하지 않고, 복종의 행위로 응답해야 한다.”면서 “복종하는 것밖에는 믿음에 이르는 길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르기 어렵거나 싫을 때,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 명령을 다른 방식으로 영성화 시키려 한다.

본회퍼는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따르는 제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넘어서는 비범한 사랑을 요청받는다”며, 이들은 항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이 비범함은 그분에 대한 ‘온전한 복종’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본회퍼의 영성은 시몬 베유의 영성과 통한다. 상투적인 신앙, 관성적인 신앙, 값싼 은총은 중력에 해당하며, 값비싼 은총만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없다. 사랑은 수동태다. 그분은 주시고 우리는 받는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라는 기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에 대한 갈망이고 온전한 복종이다. 값싼 은총과 값비싼 은총 사이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생애가 놓여있다.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는 우리 몫이다.

 

나를 만드는 나...진흙 작업

영화, 음악, 강의가 일방적으로 보고 듣는 사간이었다면,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야기>는 진흙으로 ‘나’를 만드는 적극적 참여 시간이었다. 진흙을 가지고 놀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까마득하다. 더군다나 미술이 젬병인 나에게는 곤혹스런 시간이다. 한 선생님은 하느님이 나를 창조하실 때의 마음을 생각하며 상반신을 만들어보란다. 절대 흙을 떼어 붙여서는 안 되고, 흙을 밀어서 이목구비, 그리고 머리까지 만들라고 한다. 조를 나누어 동그랗게 앉아, 내게 아직 남아있을지 모를 창의력을 끌어와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자기가 만든 작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나만 빼고 어찌 그리 잘 만드셨는지 놀라웠다.

시몬 베유는 <신을 기다리며>에서 “신의 입장에서 ‘창조’는 자기 확장의 행위가 아니라, 후퇴와 포기의 행위다. 신은 이런 감퇴를 받아들이셨다. 자기 존재의 일부를 비우셨다. 이 창조 행위에서 이미 자신의 신성을 비우셨다”고 한다. 이렇듯 당신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인간을,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빚으신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그건 ‘조건 없는 사랑’이다. 그분은 우리와 깊숙이 연결되고 싶어 한사람한사람 당신의 지문을 흠뻑 묻혀가며 우리를 빚으셨을 것이다.

그 마음으로 내가 빚은 ‘나’를 다시 보니, 사랑의 내 지문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축복 안에서...파견 미사

전주 기차 여행 삼아, 설렘반, 기대반으로 가볍게 떠났던 길이, 돌아오는 길엔 몸과 마음에 새로운 질문과 과제들을 꽉 채워 온 듯한 조금은 무거운 느낌이었다. 전국에서 오신 낯선 얼굴들을 만나면서 반가움과 함께 ‘이분들은 어떤 목마름과 간절함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셨을까? 생각하니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이 이분들에겐 엄청 소중한 시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바람을 채워 주시려고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강의, 영화, 음악, 영상들을 다양하게 준비하시고, 참석하신 분들에게 하나라도 더 내어주고 싶어 열정을 다하시는 한상봉 선생님의 열정에 감동했고, 마지막 파견 미사를 주례하신 김상식 바오로 신부님의 강론은 혼란과 어둠과 죽음의 문화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묵직한 질문을 남긴 ’성찰‘의 시간이었다. 압권은 안수! 50명이나 되는 참석자 한사람한사람에게 땀을 뚝뚝 흘리시며 ’축복‘을 빌어주시는 사제의 모습은 ’착한 목자‘였다.

이번 세미나 주제가 “어찌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이지만, 오히려 하느님 사랑을 전하려 애쓰는 한상봉 선생님, 바오로 신부님, 정경일 선생님, 묵묵히 뒤에서 세미나 봉사를 하신 분들, 그리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는 우리 모두를 보시고 “내가 어찌 너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칭찬하셨을 것 같다.

세미나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여기가 종착역이 아닌 ‘출발점’인 것이다. 세미나에서 내게 다가온 질문, 과제, 은총, 감사 모두를 일상으로 가지고 가서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 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고 어깨를 토닥여 힘을 주시길 기도한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하느님 안에서의 만남은 우연이 없단다. 우연을 넘어 필연으로, 삶의 구비에서 다시 만날 때. 더 환한 미소로 환대하며 서로를 꼬옥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대들과 함께 한 시간, 행복했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덧, 둘째 날, 점심 먹고 산책 정도로만 생각하고 오른 산길이 ‘십자가의 길’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까지 오르니 천국인 듯, 아름다운 성전이 펼쳐지더라, 문제는 아직까지 군데군데가 쑤시고 다리에 알이 배었다는 것. 이번 주는 세미나 후유증, ‘피정앓이’를 제대로 해야될 것 같다.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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