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설교는 없다
상태바
좋은 설교는 없다
  • 김선주
  • 승인 2026.01.26 10: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선주 킬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아내는 내게 너무 박절합니다. 품성이 부드럽고 착한 아내는 사람들을 늘 따뜻하고 너그럽게 품습니다. 너무 착하고 순진해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 거짓말을 할 거라는 생각도 아예 못하는 지능으로 고정된 사람입니다. 그런 아내가 나에게만 유독 인색하고 박절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내 목회와 설교에 대해 가끔 피드백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피드백에서 설교에 대한 불평과 요구들이 있습니다. 설교가 어렵다. 우리 수준에 안 맞는다. 은혜가 안 된다, 등과 같은 피드백입니다. 나는 교회 내부의 사정과 피드백의 내용들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내는 아내일 뿐 교회와 목회의 영역에 들어와 간섭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내 설교에 대한 교인들의 피드백을 어떻게 알았는지 한 마디 합니다.

“설교 바꾸지 말아요. 지금 그대로 밀고 나가요. 요즘 당신 설교 물 올랐어요.” 아내의 말입니다. 갑자기 당황스러워졌습니다. 나에 대한 칭찬이나 긍정적인 말을 하지 않던 아내가 갑자기 돌변하여, 이 여자가 미쳤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설교의 레벨을 항상 아내에게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가 이해하면 모든 교인이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교인들이 내 설교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통해 은혜받는다는 말의 뜻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우선 인정하자면 내 설교에 문제가 있습니다. 설교가 분석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이 있지요. 오랜 시절 학원강사로, 과외로 먹고 살았으니 화법을 쉽게 바꾸지 못한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한 감성의 언어로 밑바닥을 채웠던 사람들에겐 낯선 설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차차 고쳐나가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설교를 통해 은혜받았다고 할 때, 교인들이 느끼는 그 은혜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내 고집이 있습니다. 그것이 은혜인지 감정의 반응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감성에 호소함으로써 교인들의 반응을 끌어내고, 그것을 은혜라고 가르쳤습니다. 초월적인 감성으로 부르짖어 뜨거워진 마음의 상태를 성령 충만으로 이해하고 은혜 받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개의 교회 언어를 주술처럼 반복 사용해서 사람들을 마술적인 세계에 빠뜨리는 설교를 나는 잘 압니다. 성령 충만, 천국, 지옥, 은혜, 사랑, 구원 같은 단어들 말입니다.

나는 그 언어 밖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낯설어하는 걸 압니다. 그 낯섦이 어려움인 것을 압니다. 신학의 언어, 교회 언어가 내겐 너무 진부하고 식상해서 사용하기 민망합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 언어들 밖에서 얘기하려 합니다.

나는 한병철 교수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금속공학, 철학, 문학, 신학을 공부(전공)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의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읽습니다. 한병철 얼리어답터인 셈이지요. 그에게 내가 열등감을 느끼는 건 그의 학문적 탁월함이 아니라 학문을 다양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다른 언어와 다른 방식으로 텍스트를 읽어내는 능력입니다. 또 김상욱 교수는 물리학을 문학적 감성이 충만한 언어로 말합니다. 그의 물리학 저술은 문학의 언어로 구축한 축복의 텍스트입니다. 이들처럼 왜 설교는 다른 언어로 말할 수 없는가가 내 고민이고, 그 고민의 결괏값이 교회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설교하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철학과 문학과 역사와 물리학과 신화, 그림, 음악, 사진 같은 자료를 설교에 곧잘 활용합니다. 성서를 연역적으로 전제하지 않고 일상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경험들을 성서는 뭐라 말하는지 귀납적으로 접근하고 풀어나갑니다.

그런데 가끔 사고가 납니다. 작년에는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여름 징역살이’ 한 대목을 소개한 적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사상이나 주의를 설파한 게 아니라 우리네 인생살이 중 이유 없이 타인을 혐오하게 되는 원인을 신영복 선생의 글을 통해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교인이 공산주의자인 신영복을 어떻게 설교에 인용할 수 있냐며 반발하고 교회를 나갔습니다. 교회에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은 물처럼 흘러가도록 두는 게 순리니까요. 물을 가두려고 욕심 부리지 않기 위해 나는 처음부터 교인 등록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인들이 다른 언어와 화법을 사용하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자기에게 익숙한 언어로 설교해 달라고 하는 건 난감한 일입니다. 그 익숙한 교회 언어를 사용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눈치 챘는지 평소에 나에게 박절했던 아내가 나를 칭찬하고 나선 것입니다. 칭찬인지 위로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목회 그만 하겠다고 할까봐 극약처방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 며칠 생각합니다. 좋은 설교란 무엇인가, 라고. 생각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좋은 설교는 없다.’ 좋은 설교가 있다면 사람들이 듣고 싶은 것을 들려 주고, 그에 상응하는 반응을 얻어내서 피차가 만족하는 관계의 도그마가 있을 뿐이라고. 좋은 설교가로 명성을 얻은 한 목사님의 말년을 보면서 좋은 설교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생각합니다. 설교가 쇼맨십이 돼 버린 한국 교회를 보면서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을 조약돌처럼 어루만집니다.

“건너가세, 건너가세, 저 언덕 넘어~”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