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악마보다 더 디테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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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악마보다 더 디테일하다
  • 최태선
  • 승인 2025.12.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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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나는 늘 내가 내게 함몰되는 것에 유념한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한 예수의 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우물이 자신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개인의 경험은 주관적이지만 경험의 주체인 개인에게는 절대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보다 더 실증적인 것은 없다. 아무리 객관적인 것이라도 개인의 경험보다 더 강력할 수는 없다.

나이 듦은 곧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나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일들을 반추하게 된다. 물론 당시와는 다른 관점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과거의 나의 경험은 나의 일부분이 되어 나의 무의식 속에서 어떤 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나의 일부임과 동시에 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정리해보는 것은 곧 내 인생을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큰 흐름은 내 인생을 이끈 것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셨다는 사실이다. 악마만 디테일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악마보다 더 디테일하게 나의 삶을 빚어 만드셨다. 내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우연이 아니었음은 물론 하느님은 그 일을 통해 나에게 무언가를 깨닫게 하시고 가르치셨다. 당시에는 못 알아들었더라도 결과적으로 나는 거기에 반응했고, 내 삶이 이루어졌다.

이런 생각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끈다. 과거에 그토록 세세하게 나를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함은 물론 내 인생 자체를 새롭게 받아드리게 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나를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막연한 신뢰가 막역한 신뢰로 바뀌고 있다. 나는 그래야 마지막 죽음이라는 성화의 시간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제야 내 신앙이 신앙답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 하느님께서 모세를 팔십에 부르셨는지를 이해할 것 같다. 신앙에는 천재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우는 것이다. 물론 예전에도 알고 있었던 내용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것과 그렇게 사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인습적 지혜가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들이다. 성공과 출세, 그리고 업적이나 학위와 같은 것들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들이다. 인간이 자랑으로 아는 것들이 사실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깨뜨리거나 더 깊은 신뢰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들이다.

이런 말은 자칫 어설픈 자기이해나 아전인수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함은 물론 자신이 빠져 있는 우물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막 14:36)

“아빠”의 의미는 바로 깊은 신뢰를 의미한다. 그렇게 깊어진 신뢰 속에서 예수님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신다. 그 말이 바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 주십시오.”다.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뢰가 결과적으로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커지려는 이들, 성공의 가도를 달려온 이들, 아직도 여전히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런 이들은 자신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큰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종국에는 누구나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이튿날 길을 가던 그들이 그 도시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베드로는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다. 때는 정오쯤이었다. 그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베드로는 무아경에 빠졌다. 이어서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사도 10,9-16)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닭울음소리에 통곡하는 순간, 변화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유럽의 종탑에는 십자가가 아니라 닭이 매달려 있다. 그것은 누구나 닭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함을 의미한다. 맞다. 베드로는 변했다. 항상 우쭐거리며 나서기를 좋아했던 베드로는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가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의 반석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변한 그도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야 하는 과정이 아직 남아있었다. 위 말씀이 바로 그 순간이다. 베드로는 변했고, 온전히 충성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이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고 있다. 하느느님과의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이 관문에서 그는 자신이 평생 금과옥조로 알고 있던 것을 내려놓아야 했다. 유대인에게 정결의식이란 가장 기초적인 것이면서 끝까지 지켜내야 할 절대적인 것이었다. 베드로는 지금 그것을 내려놓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이 별 일 아닌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결의식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사람마다 그것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 일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생명은 포기해도 그 일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은 예수의 제자들은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일 수도 있다.

이해가 안 된다면 엔도 슈사크의 <침묵>에 나오는 로드리고 신부를 생각해보라. 로드리고 신부가 밟은 성상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그리스도를 그는 자기 발로 밟아야했다.

나는 이 일이 기도의 황홀경에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꿈과 같은 환상이 세 번 반복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오직 그리스도교 신앙에 전념하는 사람만이 이 과정을 지난다. 이 과정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때까지, 다시 말해 자신의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완전히 내려놓을 때까지 반복되어 가역불가능이 된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자기를 부인하고 출발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처럼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내려놓음으로써 들어가게 되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관계를 이룸으로써 완성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완성은 곧 하느님과의 사랑의 완성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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