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다가온 문장들
벌써 세 번째 미소의 편지를 나를 아는, 혹은 모르는 ‘너’들에게 쓴다. 이번 세 번째 강의는 외부 일정 관계로 집중해서 듣지 못했으므로, 편지의 내용이 부실할지도 모르겠다. 감사한 것은, 강남순 교수님께서 “읽기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자 데리다의 ‘근원적 질문’으로 시작하자고 제안하신 것이다. 그 의미는 모든 듣기, 읽기, 해석하기, 쓰기는 ‘자서전적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나’ 자신이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교수님은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의도성’을 가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하시면서 잠시 텍스트에서 ‘내게 다가오는 말’ 세 가지 정도를 써보라고 하셨다. 내게 다가온 문장은 이 세 가지다.
1. “‘비본질적인 것들’의 집착을 과감히 버리고, ‘본질적인 것들’의 소중한 의미를 깨우칠 때다.”(p100)
2. “떠남과 도달함이란 언제나 완결성이 아닌, 진행형임을 나는 조금은 안다.”(p101)
3. “마음속 책상이란 우리가 읽고, 쓰고, 사유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낮꿈을 꾸고, ‘자기-너머의 자기’를 만들어 가면서 우정, 사랑, 따스함과 같은 이 살아감의 본질적 가치들을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공간이다.”(p102)
지난주 주제에 이어 이번 주는 ‘관계의 정원 가꾸기’이다. 관계란 ‘너’와 맺는 것이다. 나에게 ‘너’는 누구일까? 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한나 아렌트의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타자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을 새겨야 한다. 그럼 ‘나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나? 교수님은 본인의 ‘자기 사랑’을 예로 들면서, “‘고정된 본질이란 없다’는 데리다의 말처럼, 나 사랑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애도’조차 어떤 ‘관계’ 속에 있을 때 가능하다. 소중한 관계가 형성되자마자 ‘한편으로는’ 행복하고 즐겁고 의미로운 관계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또는 네가 먼저 떠날 수 있다는 슬픔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애도, 슬픔을 넘어 책임성으로
나는 ‘세월호 참사’ 이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다. 그전에는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삶이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나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내 안에 다른 이들을 향한 ‘연민’이 있음을 체감했다. 안산 분향소에서 304명의 꽃 같은 아이들의 영정사진을 보며,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뻐근함을 느꼈고, 팽목항으로, 광화문으로 다니며, 자식 잃은 유가족들에게 ‘기억하겠다고,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또다시 거리로 나갔다. 그 후 일어난 10.29 참사를 비롯한 국가 폭력 반대 시위,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에 작은 목소리와 힘을 보탰다. 그것이 내가 해야만 하는 애도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나만의 애도’를 했다.
그런데 “애도란, 매일 슬픔 속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먼저 간 사람이 남긴 자취,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을 하면서, 그가 다 살지 못한 삶을 어깨에 매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가는 ‘책임성’이다”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나에게 깊은 울림과 위로를 주었다. 아마 내 안에 ‘어른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있었는지 그 말씀을 듣고 많이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애도 역시, 슬픔이라는 ‘상투성’에서 빠져나와 관계를 새롭게 가꾸고, 늘 새로움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관계 속의 ‘너‘는 ‘자아’의 이해와 ‘분리 불가’하다면서 “너는 나에게 누구인가?(who am I to you)”를 묻는다. 여러분은 좋은 친구, 좋은 동료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교수님에게 좋은 친구는 “내가 보지 못하는 나의 잠재력과 능력을 끄집어내서 내게 상기시켜 주는 친구”라고 하신다. 과연 내게 그런 친구가 있나? 요즘은 남이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고, 시기 질투를 넘어서 말로, 행동으로 상대방을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가.
타자, 함께 살아가는 동료 인간
사적 자아와 공적 자아라는 개념은 쉽지 않다. 사적 자아는 너무 private 해서 공적 자아 앞에 ‘은폐’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공적 자아는 우리의 말과 행위를 통해 드러나고, 내 말과 내 행위를 통해서 타자와 함께 연결된다. 결국 ‘타자’가 없다면 내 공적 자아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내 공적 자아를 구성하는데 타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너’는 나와 상관없는 ‘구경꾼’이 아니라, 내 자아를 드러나게 하는 ‘조건’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료 인간’, 특별히 강남순 교수님과 함께하는 ‘이론그룹 동료 인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이유다. 이 동료들은 나와 생각을 같이하면서도,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각기 다른 삶의 결들을 온전히 끌어안으면서, 나의 삶을 의미롭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데리다에게 타자는 누구인가? 첫째, ‘알지 못함의 존재’다. 여기서 데리다의 ‘double jesture’를 작동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나는 타자를 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타자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타자를 다 안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와의 진정한 관계는 사라지고 황폐하게 된다. 그래서 ‘너’를 안다는 것은 언제나 뒤로 미뤄진다는 것이 ‘차연’이다.’ 둘째, 타자는 ‘환대’의 대상이다. 여기서 환대는 ‘적대’로서의 환대와 ‘미소’로서의 환대가 있다. 데리다는 환대는 미소 없이는 불가능하고, 미소는 환대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편지도 ‘미소의 편지들’이 아닌가!
얼굴, 대체불가능하고 무한한 책임의 자리
그런데 미소를 지으려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성당에서 백주간 성경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세 반 중에 우리 반만 대면이고 나머지 두 반은 줌으로 수업한다. 어쩔 수 없이 줌으로 수업하지만,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것도, 반원들과의 관계도 대면반이 훨씬 좋다. 매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면서 자기의 내밀한 사적 자아를 열어 타자와 나누는 시간이고, 미소로 환대하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자 레비나스가 ‘너’를 가장 먼저 인지하는 것은 ‘얼굴’이라고 한 이유가 아닐까? 그는 ‘얼굴의 철학’에서 “얼굴은 이름보다 선행한다”고 했다. 강 교수님은 “얼굴은 목소리처럼 ‘대체 불가능’하고 무한한 ‘책임의 자리’”라고 하셨다.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이력서다”라는 말이 있다. 그건 외모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책임성을 가지고, 어떻게 잘 살 것인가 고민하고 살았는지 알게 된다. 바로 그 타자가 나의 “관계의 정원”이라고 한다. 데리다의 책 <우정의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Oh my friends, there is no friend.”라고 말했단다. 앞의 친구는 긍정, 뒤의 친구는 부정이다. 왜?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진정한 친구는 ‘숫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교수님은 그래서 소위 ‘친구 diet’를 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신다. 지금부터는 강남순 교수님의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건강한 잔소리’ 시간이다. 반드시 귀를 쫑긋 세우고 귀를 기울이시라.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들이다. 나에게 남은 시간과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내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첫째, 삶에 개입하는 것들이 많을 때 ‘우선순위’를 정하라. 둘째, ‘No’, 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연습을 하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보호하는 것은 무의미한 관계들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내 정원도 잘 가꾸게 되고, 너와의 관계도 잘 가꾸게 된다. 셋째, 무수한 단톡방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그 시간을 나와 나 자신과의 ‘대화의 시간’, ‘고독의 시간’으로 만들어라. 아렌트는 자기와의 ‘시간’과 ‘고독의 공간’을 갖는 게 자기와의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라고 했다. 아렌트는 ‘고독(solitude)은 겉으로는 혼자 있지만, me and myself(나와 나 자신)의 시간이라고 했다.
공유하는 언어 만들기
”나는 ’집단을 사랑‘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 뿐.”이라는 아렌트의 말이 나는 너무 이기적인 사랑 아닌가? 의문이 올라왔다. 그런데 교수님은 개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체적 관계를 형성시키고, 나의 삶과 연결이 되어야, 서로에 대한 이해가 확장이 되면서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나눌 수 있는 관계까지 간다고 하셨다. 나는 ’아하‘하고 이해가 되었다.
그럼 어떻게 관계의 정원을 가꾸어야 하나? 그것은 어떻게든, 매번, 끊임없이 내가 그 방법을 고민하고 ’나만의‘ 관계의 정원을 가꾸어가야만 한다. 그리고 한번 시작하면,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건 맞다. 강남순 교수님을 만나기 전으로, 데리다를 만나기 전으로. 아렌트를 만나기 전으로 절대 나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친절하게도 친구와 관계의 정원을 가꾸는 방법 ’Tip‘까지 주셨다. 그것은 ‘공유하는 언어’를 만들라는 것이다. 대상은 친구, 연인, 부부, 자녀 아무라도 좋다. 영화, 얇은 책, 음악 등을 골라서 따로따로 보고,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얼마나 classic하고 낭만적인 방법인가! 그럼, 오늘부터 대상을 찾아야겠다. 남편은 위험하다. 싸울 확률이 크므로. 언니나 동생은 그 취향이 아니다. 가장 좋은 나의 ‘벗’이자, 대화상대는 우리 ‘딸’이다.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훨씬 잘 들어주고, 눈과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로 환대해 줄 사람, 나는 이미 ‘관계의 정원’에 입성했다.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