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시노달리타스, 교회 조직이 가진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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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시노달리타스, 교회 조직이 가진 한계
  • 최태선
  • 승인 2025.10.27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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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나는 개신교 기사와 가톨릭 기사를 매일 읽는다. 동방교회의 매체도 있다면 읽을 텐데 아직 발견하지를 못했다. 어쩌면 있는데 내가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나는 그리스도교 전체의 소식에 관심이 있다.

그렇게 날마다 기사를 읽으며 나는 두 곳의 가장 빈도수가 많은 기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개신교의 경우는 목사들의 일탈이나 세습이 주를 이룬다. 가톨릭의 경우는 시노달리타스와 관련된 것이 가장 많다. 다양성 측면에서는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가톨릭에 사회교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개신교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오늘날 개신교 교회들이 개교회주의라는 이기적인 사고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가톨릭 매체에서 시노달리타스와 관련된 기사를 보았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국 교회만큼 시노달리타스를 실현하는 데 장애가 많은 교회도 없습니다. 나 같은 주교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보화를 다 가지고 있는데, 이걸 무덤에, 땅속에 묻어 놓고 있는 겁니다."(이병호 주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병호 주교가 한 말로써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아무리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은 이병호 주교가 주교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교로서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주교의 권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누가 주교가 되느냐가 아니라 주교라는 자리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그것은 가톨릭이 오래 전에 조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2세기에 이 문제는 등장했다. 교세가 커지고 교인수가 많아지자 교회는 주교의 권한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주교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교회의 형태였던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순수성을 지키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조직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유혹이었고, 최대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유혹에 넘어가 조직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합당한 명분이었고, 시대적인 소명이었다고 착각하기에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악마에게 엎드려 절하고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받는 길이었다. 그리고 생각대로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모든 권세와 영광을 받았다. 그것이 절대적인 권력이 되어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세상의 지배자들과 다르지 않은 권세가 되었다.

이곳이 바로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떨어진 지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이 지점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아무리 이천 년 가까이 쌓인 엄청난 전통과 유전이 그득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하다. 복음은 조직 안에 담길 수 없다. 시노달리타스가 계속해서 대두되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조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대로 두고 아무리 시노달리타스라는 복음의 요구를 실현하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병호 주교와 같은 사람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아무리 파격적이고 탁월한 선택을 하더라도 그것은 이병호 주교와 같은 개인의 영광이 될 따름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마귀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이미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깨달은 이병호 주교는 조직이 된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떠나야 한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교회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성서에서 이야기하는 "처음에 하던 일"을 하는 것이다.

개신교의 경우도 근본적인 문제의 핵심은 가톨릭과 다르지 않다. 개신교의 경우 목사들의 일탈과 세습과 같은 교회의 선택이 반복해서 쉽게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의 공교회로 존재해야 할 교회들이 암세포가 되어 각 교회들이 각자도생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교회로서 교회는 바울 사도의 비유처럼 한 몸으로서 존재하며 약한 곳이 더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각자도생의 길은 힘을 가진 교회가 힘없는 교회를 무시하게 만든다.

생각을 해보라. 대형교회들은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가. 작은 교회들은 권토중래를 꿈꾸지 않는가. 한 마디로 개신교 교회들은 각자도생하는 곳으로 무한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능력주의가 판을 치지 않을 수가 있으며, 희생의 체제가 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개신교에서도 이병호 주교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큰 교회로서 책임을 다해 작은 교회들이나 농촌과 같이 열악한 상황에 있는 교회들을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도움은 같은 지체로서의 자연스런 흐름이 아니라 큰 자가 작은 자에게 베푸는 시혜로서 큰 교회의 영광이 된다. 사회로 눈을 돌린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이미 마귀로부터 모든 권세와 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의 경우도 가톨릭과 동일하게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회개다. 교회의 회개는 교회가 유기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조직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것은 무익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무리 시노달리타스를 강조하고 그에 대한 노력을 경주해보라. 아무리 교회의 개혁을 외치며 교회 자정에 매진해보라.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이천 년 동안 그 일을 반복해왔다. 이제 그것이 결국 조직이 가지는 한계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봉착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되었음을 안다. 하지만 용기 있게 자신이 속해 있던 곳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이들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사실에 절망하지 않는다. 이미 조직이 되어버린 정통이라는 이름의 그리스도교와 교회 밖에 하느님께서 남겨놓으신 칠천 명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남은 자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물론 그들도 여전히 조직에의 유혹을 받으며 무엇보다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와 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나는 늘 2003년 아켈마인에 있는 아미시 마을에서 일어났던 총기사건을 반추한다. 총기를 들고 아미시 학교에 침입해 열 명의 아이들을 인질로 잡았던 범인은 그 마을에서 생산되는 우유를 수거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러 총기를 소지하고 있던 그가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인질로 잡혀 있던 아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먼저 죽이라(shoot me first!)고 외쳤다. 아이들은 두려움 없이 자신의 목을 내밀었다. 범인은 총기를 난사했고 다섯 명의 아이들이 죽었고 부상을 당한 아이도 있었다. 대치하고 있던 경찰이 즉각적으로 진입하자 범인은 자신에게 총을 쏘았고 상황은 끝이 났다. 죽은 아이들과 부상당한 아이들은 즉각적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상황은 종결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실시간으로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잃은 아미시 사람들은 곧 바로 자식을 잃은 범인의 가족들을 찾아가 위로하였고 범인의 장례식에도 참석해 애도를 표했다. 뿐만 아니라 중계를 보고 전국에서 답지한 성금을 범인의 가족들에게도 똑같이(!) 나누어주었다. 범인의 가족들은 그런 아미시 사람들을 “검은 옷을 입은 천사들”이라고 불렀다.

이 사건은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신학적인 통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사건이 있기 2년 전 있었던 9·11테러가 그 비교대상이 되었다. 만일 9·11테러 후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아미시 사람들처럼 범인의 가족을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했더라면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생각해본 논설들이 이곳저곳에 게재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논쟁은 지속되지 않았고, 다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미국은 과거의 사고를 따르는 사회가 되었다.

나는 이 사건이 조직이 된 그리스도교와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외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층 더 어두워진 세상을 향한 한 줄기 빛이었다. 바울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가톨릭 신자건 개신교 신자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모쪼록 하느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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