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광화문에서 ‘2025 기후정의행진’ 이 열렸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강우일 주교님이 제주에서 오신다니 가슴이 설레었다. 미사 후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공교롭게 ‘가톨릭일꾼학교’ 강의랑 겹쳐서 고민되었다. 결국 그곳은 많은 분들이 채워주시리라 믿으며 ‘은혜의 뜰’로 발길을 정했다. 예상대로 강의를 들으러 오신 분은 나를 포함, 여섯 분. 그나마 감사하게도 네 분이 줌으로 자리를 채워주셨다. 저녁에는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전쟁을 방불케 하는 굉음을 내는 ‘불꽃축제’를 한강공원에서 한단다. 기후 정의와 불꽃축제가 한 날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신은 죽었다. 그러니 교회는 장례식을 시작하라
한상봉 선생님은 지난달에 이어 ‘가출한 하느님 2강’을 교회에서 가장 싫어하는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니체,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야기로 시작하셨다. 니체는 저서 <즐거운 학문>의 「광인의 비유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다. 기독교인들은 무턱대고 니체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니체가 죽었다고 말한 그 신은 어떤 신인지 질문해야 한다. 그 신은 선과 악의 구분을 통해 상벌을 내리는 ‘심판자 하느님’이고,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잠들어 있는, ‘죽어있는 하느님’이다. “그러니 교회는 장례식을 시작하라”고 니체는 준엄하게 말한다.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흐는 저서<기독교의 본질>에서 “하느님이 인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류가 하느님을 창조했다”고 한다. 결국 인간의 욕망이 빚은 상상력의 결과가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생의 환란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강력한 아버지의 형상에 투영된 환영이 하느님에 대한 욕망”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완벽한 사회(perfect society)’라고 믿는다. 혹시 하느님이 완벽하시니 그 대리자인 성직자들이 하느님에게 투영한, 그들이 욕망하는 하느님이 아닐까?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이런 하느님의 ‘우상’을 걷어내야 한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
마르크스는 저서<헤겔 법철학 서문, 1843>에서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했다. 마르크스는 그 종교를 끊고 일어서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순교자들이 떠올랐다. 그 당시 그들은 인간이 아닌, 지체 높은 자들의 ‘재산’이었다. 고된 노역과 굶주림, 매 맞음, 모욕과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는 말보다 더 기적 같은 말은, “이 종교는 양반과 상놈이 평등하대”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니체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외마디가 ‘종교’라고 했다. 그들은 그게 비록 아편이라 해도 먹었을 것이다.
한스 큉은 “이전 세계가 작은 세상에서 큰 교회를 소유했다면, 지금은 훨씬 큰 세계의 작은 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제 신앙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신앙의 무풍지대’가 시작되었다. 유럽 교회는 이미 신자들이 교회를 버렸고, 텅 빈 교회를 채우는 건 관광객뿐이다. 하지만 교회가 비었다고 그들에게 신앙이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의 사회, 문화 속에 신앙이 녹아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장애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들을 차에서 내려주는 운전사, 그들이 내릴 때까지 당연하다는 듯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 나라의 수준을 본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기다리고 싶어 하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들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배려가 없는, 습관적 신앙에 머물러 있다.
겨울 같은 교회, 신앙의 핵심으로 돌아가라
현대 철학자 칼 라너는 신앙의 무풍지대인 이 교회가 “겨울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낡은 유신론과 독실한 믿음을 강조하는 성직자들의 강론이 “마치 새가 얼어 죽어 겨울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힘없이 강단에서 떨어진다”고 표현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은 가장 깊은 신앙의 핵심으로 돌아설 필요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이다. 이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언제나 말했던 “넘치는 사랑”의 하느님이다. 그분은 초월적인 신비에 싸여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현실에 ‘개입’하는 존재이며, 특별히 간절한 상황에 처한 안타까운 사람들을 깊이 ‘근심하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선물은 무조건적 ‘이웃사랑’이라는 책임 있는 행동 속에서 드러난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 25장 35-40) 는 구원의 ‘심판 기준’의 핵심이다. 칼 라너가 “이웃사랑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의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한 이유다. 그는 또 “나뭇잎이 더 이상 경건의 나무에 무성하지 않은 겨울에, 앙상한 나뭇가지들 덕분에 우리는 숲의 더 깊은 곳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거기서 우리는 은혜로운 하느님의 ‘신비’를 본다는 뜻이다. 그는 “우리의 약삭빠름이 거주하는 작은 오두막에서 질식할 것인지, 아니면 지식과 행위의 문을 열고 세상에서 보살피는 사랑을 실천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주문한다.
한상봉 선생님은 황지우 시인의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새는」이라는 시를 묵상 거리로 던져주신다. 보이지 않지만 다만 멀리 있을 뿐인 하느님께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갈 마음이 있는지?, 자기를 매질할 마음이 있는지?, 지레 포기할 것인지?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새는
_시인 황지우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또 다른 연안(沿岸)으로 가고 있다.
순교 정신,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살자
강의를 마치고 참석한 분들의 질문과 생각을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요약한 것을 나눈다. 첫째, 교회 실정이 이 지경인데 ‘순교자 성월'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본당에서 소위 '성지순례'를 간다. 성지를 방문해서 순교자들의 삶과 정신을 기리고 그 정신으로 살자는 좋은 의도다. 그런데 성지순례를 가려면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고, 대형 버스를 빌리는데 엄청난 액수의 돈이 든다. 오고 가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잠깐 미사하고 성지 신부님의 ‘홍보성’ 강론을 듣고, 점심 먹으면 떠날 시간이다. 이렇게 ‘상투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마음이 없는지 묻는 거다. 성지순례는 떼거지로 몰려가 관광하고 오는 시간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며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내가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어야 한다.
둘째, 2027년 서울에서 열리는 WYD 청년대회는 해외 참가자 20만~30만 명을 포함해 약 70만~100만 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인구 대이동 축제다. 입시와 취업 경쟁에 내몰려 스트레스를 받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치를 제시하고, 위로와 화해의 장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그 취지다. 교종 레오 14세가 한국에 오셔서 미사도 드리고, 종교에 상관없이 다양한 종교의 청년도 참가할 수 있는 ‘열린 행사’다. 하지만 성지순례와 같은 맥락에서, ‘군중집회’는 사람이 보이지 않고 숫자만 보인다. 세계의 청년들이 지금처럼 심각한 기후 위기에, 악영향을 끼치는 비행기를 타고 엄청난 돈을 들여서 대거 움직인다?, 문제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지금 WYD를 위해서 ‘묵주기도 10억 단 바치기’를 본당별로 하고 있고, 세계에서 온 청년들에게 숙박을 제공할 신자들의 집(홈스테이)을 찾고 있다. 우리나라 청년들에게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면서, 외국 청년들에게는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대문을 활짝 열어 환대한다? 이것 역시 미스터리다. 오히려 그 돈으로 청년 밥집을 세워 배고픈 청년들이 언제든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현실적 방법이 아닐까? 물론 어떤 일이든 긍정적, 부정적 효과가 둘 다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교회는 세상과 좀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리스도인,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윤석열, 김건희를 비롯해서 요즘 법정에 줄줄이 세워지는 이들을 보면 결국 그 끝에는 ‘돈’과 ‘권력’이 걸려있다.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교회의 죄질이 더 나쁜 것은 하느님, 예수님 이름으로 그분들을 배반한다는 것이다. 나는 교회가 세상과 극명하게 달라야 하는 점은 '투명성'이라고 생각한다. 돈과 권력에 발목 잡힌 교회는 더 이상 투명할 수 없고, 정의의 목소리를 낼 수 없으며,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지 못한다면, 더 이상 신앙에 대해 강요할 수 없다.
각자도생의 삶이 대세인 세상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오천 명이면 그 오천 명의 하느님이 다 다르다. 하느님을 자기 식대로 믿을지라도, 제발 이제 ‘낡고 누추하고 진부한’ 하느님을 믿지는 말자. “하느님은 작은 우연처럼 오지만,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용기다.”라는 <녹색평론> 고 김종필 선생의 말씀처럼,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보자.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우주가 흔들린다.”는 이어령 교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신비를 살아보자. 이럴 때 우리는 진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신은 낙원에 머무르지 않는다>라는 어려운 책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잘 이해하고 만날 수 있도록, 새로운 해석으로 이끌어주신 한상봉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글은 책을 완전히 이해해서도, 내 생각이 옳음을 주장하는 글도 아니다. 내가 아는 만큼, 이해한 만큼 쓴 글이고, 나머지는 여러분들과 생각을 나눈 뒤 느낌을 쓴 글이다. 불편한 분들에게는 사과를, 칭찬해 주시는 분들에게는 감사드린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속에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지 살피시면서, 달님께 간절한 소원을 비는 행복한 추석 명절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