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 영혼의 자유를 향한 길_비움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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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 영혼의 자유를 향한 길_비움의 역설
  • 조광호
  • 승인 2025.07.2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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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하나

손에 쥔 것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가난해진다. 물질이 우리를 소유하기 시작하고, 욕망이 우리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스로 선택한 가난, 즉 청빈은 우리를 진정한 부유함으로 이끈다. 이것이 모든 종교 전통이 발견한 영적 진리의 역설이다.

청빈은 단순히 물질적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사슬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영적 혁명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탐욕의 소멸, 그리스도교에서 추구하는 세속적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이슬람의 금욕적 수행, 힌두교의 무소유 정신 - 이 모든 것들이 같은 진리를 가리키고 있다. 우리가 소유하려 할수록, 우리는 소유당한다는 것을.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가졌다." 라고 말 한 청빈한 수행자의 마음에는 온 우주가 담길 수 있다. 욕망으로 가득한 마음에는 그 어떤 것도 진정으로 머물 수 없지만. 청빈은 또한 이 세상의 덧없음을 인식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종말론적 의식의 표현이다.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다. 이는 단순한 가난의 서술이 아니라, 이 땅의 것들이 궁극적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언적 삶의 방식이었다.

부처가 궁전을 떠나 걸식 수행자가 된 것도, 프란체스코가 부유한 상인의 아들에서 청빈한 수도자로 변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가치체계가 궁극적으로는 환상임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둘

소비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청빈의 정신은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더 많이 가져야 더 행복할 것이라는 거짓 약속에 속아 살고 있다. 하지만 청빈한 자들의 삶은 진정한 풍요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청빈은 결핍이 아니라 선택이다.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여, 진정 중요한 것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그것은 물질적 가난이 아니라 영적 풍요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다.

궁극적으로 청빈은 외적 조건보다는 내적 태도의 문제다. 많은 것을 소유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청빈할 수 있고, 적게 가져도 탐욕으로 가득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는 기묘한 역설이 있다. 수백만 원짜리 "빈티지" 청바지를 입고, 일부러 해진 옷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며 가난한 척을 한다. 깁는 품삯이 새 옷 사는 것보다 더 비싸진 시대에, 인위적인 낡음은 또 다른 사치가 되었다. 이는 청빈의 본질을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셋

진정한 청빈은 형식이 아니라 정신이다. 누더기를 입어도 마음이 교만하면 그것은 청빈이 아니고, 좋은 옷을 입어도 마음이 겸손하고 감사하면 그것이 진정한 청빈일 수 있다. 청빈은 외적 모양새로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자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아무 책임도 없이 무위도식하며 청빈하게 지내는 수행자도 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오로지 내면의 평화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길도 하나의 청빈이다. 하지만 또 다른 청빈이 있다. 일하기 위해 많은 것을 소유하면서도 부에 집착하지 않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청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재물의 관리자로서 살아간다.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고, 사용하되 탐하지 않는다.

기업가이면서도 모든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이, 의사이면서도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이, 정치가이면서도 권력욕보다 공익을 추구하는 이들이 바로 이런 청빈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부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고, 소유는 집착이 아니라 책임이다.

넷

진정한 청빈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이미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고, 더 큰 선물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 자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이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보여준 것도 바로 이런 청빈의 정신이었다. 그녀는 물질적으로는 가장 적게 가졌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부유한 삶을 살았다.

청빈은 비움을 통해 충만에 이르는 길이다. 불필요한 집착들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청빈은 개인의 덕목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와 종교 기관에도 적용되어야 할 영적 원칙이다.

부를 축적하고 쌓는 데 혈안이 된 교회와 사찰은 그 본래의 향기를 잃어버린다. 화려한 건물과 거대한 재산을 자랑하는 종교 기관들이 정작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는 무관심할 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예수의 탄생지는 마구간이었고, 부처의 첫 설법은 사슴동산에서였다. 이들의 가르침이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웅장한 건물 때문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과 자비 때문이었다.

타란트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잘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의 타란트라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지혜다. 그것이 돈이든 재능이든 귄력이든 가진 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청빈의 의미가 있다.

자신의 소유가 나와 나의가족 혹은내가속한 공동체에 만 머물게하는 모든 이기심을더러낸 삶이 헁기로운 청빈의 삶이다. 진정한 청빈은 공동선을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이다. 자신의 안락과 우리의 안전이 위협받더라도, 보다 큰 공동선을 위해 재화를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청빈한 자의 역설적 풍요함이다.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잘 쓰는 것이 진정한 청빈의 정신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놓았을 때, 그것은 수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되었다. 움켜쥐고 있었다면 그저 한 끼 식사로 끝났을 것을, 나누었기에 영원한 은혜가 되었다.

다섯

"미래 사목을 위해 부를 축적한다"는 것은 종종 자기기만적 속임수다. 평생 교회 사람으로 일하고 살다보니 교회는 언제나 미래를 내세워 현재의 탐욕을 정당화 하는것을 나는 눈여겨 봤다. 욕심을 정당화시키는 속임수다. 그 날이 오면 또 다른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며 축적을 계속한다.

결국 그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진정한 신앙은 지금 여기서, 오늘 이 순간에 실현되어야 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사랑을 미루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변명이다. 청빈한 자는 현재에 충실하고, 지금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한다. 

이 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청빈의 길을 선택한 성인들의 삶이 보여주듯이, 그 길 끝에는 세상의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값진 평화와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청빈의 지혜를 통해 진정한 자유인이 될 것인가.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로서 그 선택이 우리의 영적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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