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가 먹을수록 ‘친절’이 얼마나 소중한 덕인지 깨닫게 됩니다. 생의 밑바닥을 경험해 보아야 작은 친절에도 눈물이 아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책상머리에서 평생 ‘가난의 영성’을 탐구한다고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 정말 죽고 싶다는 감정에 휘말릴 정도로 아파보아야, 막다른 골목길에서 깊은 심연에 빠진 듯 주저앉아 보아야 우리는 다정한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손길이, 그 눈빛이 나를 살리겠구나, 직감합니다.
“인간을 입은 내 가슴에로
이제야 너 맘껏 쉬리니
내 영혼이 널 입맞추리라”
막데부르크의 메히틸드는 예수님과의 속삭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느님과 합일하는 신비적 체험은 관능적 체험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나의 사랑을 달리 생생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R. 모서 H 하아크는 <행복하여라, 다정한 사람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성적 결합을 이루었을 때 바로 나의 울타리는 허물어져 두 개체는 멈추어 선 시간 속에서 하나가 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성경은 <아가>에서 이런 사랑을 노래합니다. 포도밭에서, 사과나무 아래서, 만발한 꽃들 사이에서, 포도밭 아가씨와 양떼를 치는 목동은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면 이성 따위는 멀리 사라져, 이들은 사랑의 정열이 타오르는 불꽃이 되고, 포효하는 바다가 된다고 합니다. 사랑에 빠지면 다른 세상을 경험합니다. 아가씨에게 낭군은 “눈부시도록 볼그레하며” 머리에선 금빛 후광이 떠돕니다. 낭군에게 아가씨는 머리가 카르멜산처럼 오똑 서고 드리운 머리채는 보랏빛 융단처럼 매끄럽습니다. 어찌나 이쁜지 하늘에서 별똥이 튄 듯 아찔하답니다.
그래서 이 청춘남녀는 도덕이나 윤리 따위로 위축되거나 남의 눈길에 몸을 사리는 법 없이 마음껏 사랑을 나눕니다. 결혼이나 아이가 생길 염려 따위의 번거로움도 저만치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이와 나누는 사랑뿐입니다. 이를 두고 하아크는 “아가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우리는 거기서 끊임없이 함께 계신 하느님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사랑 그 자체니까요.
하아크는 이처럼 하느님께 가서 닿는 ‘육감적인 사랑’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소설가 하인리히 뷜처럼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정(情)의 신학”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합니다.
육감적인 사랑, 다정함의 신학
하아크는 ‘다정함의 신학’을 전하면서 루카복음 7장(36-50)에 등장하는 죄 많은 여인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그녀를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부르면서,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이 음식을 드시는데, 그 고을에 사는 여자가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타박하자,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합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여기서 하아크는 “육감적인 사랑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어서 거룩한 사람은 으레 세속적인, 특히나 육체적인 세계와는 늘 거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합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눈물로 자신의 발을 적시고 입 맞추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남자들은 자신이 꽤나 이성적이고 자신을 통제할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정다움을 오히려 기꺼워하십니다. 사랑하면 몸이 먼저 움직이는 법입니다. 남자들은 한걸음 물러나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안 보는 데서라면 몰라도, 남들 앞에서는 적어도 그러한 다정함에 상대해 주질 말아야지.” 스스로 고상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마땅히 지켜야 할 관습이나 예의범절을 따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마리아 막달레나의 처신은 천박하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그녀가 죄 많은 여인이라니, 이들이 하는 말에 힘이 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이런 말보다 그녀의 마음을 먼저 헤아립니다. 다정한 그녀의 행동에 그분 역시 다정하게 응답합니다.
다정함이 무장을 해제시킨다
하아크는 이런 ‘다정함의 힘’에 대한 사례로 아시시 프란치스코와 구비오의 늑대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탈리아 움브리아 구비오 마을에 사나운 늑대가 살고 있었다는 거지요. 늑대가 어찌나 포악한지 사람이며 가축들까지 옴짝달싹 못하니, 사람들은 마을을 나설 때면 단단히 무장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기대어 살던 프란치스코는 방패와 투구로 무장하지 않고 십자가 하나만을 목에 걸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이에게 쏜살같이 달려드는 늑대에게 프란치스코는 형제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늑대는 오른쪽 앞발을 들어 프란치스코의 손에 몸을 맡겼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정함입니다. 하아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죽음’으로 에워싸인 존재이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그 위협을 버텨 나가는가? 너무나 자주 우리는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막강한 보호벽을 쌓곤 하는데, 이를테면 저와 비슷한 생활수준, 저와 동일한 시선, 동일한 가치관을 가진 축끼리만 동아리를 짓고, 저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무리들을 헐뜯고 비방하여 내몰곤 한다. 그러다 계급사회라는 것이 나타나고, 그렇게 내몰린 사람들도 무리를 이뤄 좌파다, 우파다 나뉘어 허겁지겁 힘을 모으느라 버르작거려 본다.”
그러나 정다운 사람들은 스스로 대단한 척 떠벌리지 않고, 스스로 방어하지 않으며, 내몰리고 따돌려진 사람들을 다독거리고, “다 지나간 얘긴데, 그거 뭐 별 거겠냐고 얘기해 준다”고 하아크는 말합니다. 사랑의 적은 미움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유롭고 다정한 사람은 무장하지 않고, 결코 남을 지배하지 않으며, 자신의 한계를 숨기지 않을 만큼 용기 있다고, 그게 복음적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그러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추상적 진리도 아니고, 그때그때 찾아보는 법전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가서 닿는 다정함입니다.
배제되기에 마땅한 사람은 없다
바오로 사도가 편지에서 썼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그분은 “저 위에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여기, 아래에 계시다”고 하아크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사는 곳에는 형제들과 자매들이 있을 뿐이다. 거기선 ‘마님’이나 ‘나으리’라고 떠받들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기에 저명인사라 해서 별다른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 그윽하게 그러나 엄청나게 예수님은 구태의연한 가치관을 뒤엎어 버리고 아래에서 겸허하게 살아가는 얼굴 없고 이름 없는 훌륭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찬양하신다. 그렇게 예수님은 군림하는 주종관계를 모두 마감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백성을 지배하려 드는 전제군주나 민중들을 무시하는 신학자들과 달리 모든 다스림을 뛰어넘는 분이라고 하아크는 말합니다. 아울러 남성들의 가부장적 지배도 그분 앞에서 허물어졌다고 전합니다. 그분이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만 봐도 획기적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권력과 증오와 혐오주의도 반대합니다.
다스리지 않아야 다정함이 돋는다
예수님이 이런 태도를 취하신 것은 다정함 때문입니다. 다스리지 않아야 다정함의 분위기가 감돌게 되고, 그래야 사람들이 경계를 풀고 두려움의 곳간에서 풀려나와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배하지 않으려는 예수님의 ‘약함’이 그분의 세상을 생기 돋게 만드는 ‘강함’이 됩니다. 이런 태도는 정치지도자나 교회의 지도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이런 다스림 없음에서 하느님과 나누는 ‘우정’이 발생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요한 14,9)이라고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본 사람입니다. 거기에는 세상을 모두 끌어안는 탁 트인 호흡이 돋고 하느님의 입김이 활동하시기에, 우리들은 거기서 왈칵왈칵 솟아오르는 생명의 힘을 느낍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이 지배자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애틋한 정을 몸으로 입었기에 우리와 함께 상처받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로마제국에서는 아주 생소한 모습입니다.
니체는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온유를 가르친 그리스도교 윤리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바오로 사도는 다르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10) 하아크는 온유함이란 “이 험한 세상에서 그럭저럭 발뺌하며 살아가는 수완”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도발행위”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정다움에는 손길이 따라가게 마련이다
라스커 쉴러라는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의 두 뺨과 어깨와
그리고 가슴을 더듬어
나의 두 손은 이제
네가 살아 있음을 만진다”
이처럼 예수님이 바라시던 온유함은 다정한 몸가짐에서 나옵니다. 정다움이 몸으로 스며나오지 않는다면 박제된 목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정다움에는 손길이 따라가게 마련이고, 감촉을 느끼는 살갗과 거기에 있는 핏줄이 더불어야 한다. 붉어지기도 하고 창백해지기도 하는 민감한 얼굴과 표정을 담은 눈망울, 그리고 풀잎이 자라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섬세한 두 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얼크러설크러진 삼라만상에서, 입맞춤에서, 얼싸안음에서, 함께 자면서, 웃으면서 그리고 울면서, 온 가지로 얘기를 나누면서 그리고 단 한마디의 말을 통해서, 나누어 먹으며, 마시며, 함께 춤출 때, 이렇게 정을 나누는 가운데라야 온유함이 살아 있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교의로 남지 않고 살이 되어야 한다고 하아크는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손가락 끝에서 선포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보듬어 주시고, 아픈 이들의 눈과 귀와 입술을 어루만져 주시고, 사람들의 발도 씻어 주시고, 모래 위에 뭐라고 써보기도 하실 뿐 아니라, 와서 만지고 향유를 발라 드리며 입 맞추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즐기시고, 애정 어린 눈으로 부자 청년을 바라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힘겹노라 눈물을 흘립니다. 그분에게 ‘이웃사랑’은 그냥 해 본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렇게 고스란히 사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녀와 세리들과 한패”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분은 몸으로 부딪쳐 구성지게 당신 삶을 사셨고, 거기서 다정함과 우정이 묻어 나옵니다. 이런 예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고맙습니다, 그렇게 살아주셔서.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