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아름다운 것들은 교회와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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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아름다운 것들은 교회와 상관없이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5.03.3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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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민중음악가 박종화가 작사 작곡에 노래까지 직접 부른 민중가요 ‘바쳐야 한다’가 있습니다. 대학시절 학교앞 막걸리집에서 술을 마시면, 친구들은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박종화의 이력을 보면 세 권의 시집 낸 시인이자 전시회까지 열었던 서예가라고 했습니다. 이른바 예인(藝人)이라 불러 드려야 할 분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런 시퍼런 노래를 불렀다고 생각하니, 내 삶은 참 부끄러운 청춘이었더군요. 그리고 그때는 왜 이렇게 만사가 비장했던지요.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쳐라.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다워라.
술 마시고 싶을 때 한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거라.
전선에서 맺어진 동지가 있다면
바쳐야 한다. 죽는 날까지
아낌없이 바쳐라.
번쩍이는 칼창 움켜쥐고
나서라 전사여, 그날을 위해
이 한목숨 걸고 나서라.

구차한 목숨으로 사랑을 못해.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두려움에 떨면은 술도 못 마셔.
그렇게 먹은 술에 내가 죽는다.
붉은 맹세, 붉은 피로 맺어진 동지여
죽어도 온다. 그날은 온다.
민족의 해방이여.
번쩍이는 칼날 움켜쥐고
지켜라 전사여, 우리의 깃발
이 한목숨 걸고 지켜라.

박종화는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 바치라고. 사랑은 그럴 때 아름답다고, 구차한 목숨으로는 사랑을 못한다고.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다고 노래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은 못해도 술은 마실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술도 못하니 박종화의 제안에 이래저래 화답할 수가 없군요. 그때 그 시절 생각하면, 서강대 정문 길 건너편에 있던 초원다방에서 조용필의 ‘친구여’를 듣던 기억만 가물거립니다. 다 옛사랑의 그림자지만, 이런 추억 하나쯤 있어야 누추한 오늘을 견딜 수 있나 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참에 파주에 있는 헤이리시네마에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원작인 클레어 키건의 소설도 읽었습니다. 빳빳한 양장커버로 인쇄한 이 책을 두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작가가 단편 분량의 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다”고 했습니다. 르포작가 은유는 이 소설을 두고 “뒤돌아 보는 인간의 탄생”이며, “‘가족 인간’이기를 멈추는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타인에 대한 숙고를 통해 자기 회복에 이르는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주연을 맡았던 킬리언 머피가 이 영화에서 주인공 펄롱의 역할을 맡은 것이 인상적입니다. 그이는 두꺼운 입술과 높은 광대뼈, 깊고 푸른 눈을 가진 아일랜드 배우입니다. 그이의 서늘한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영화입니다. 펄롱은 석탄, 토탄, 무연탄, 분탄, 장작을 파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사소한 선택이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그 겨울 펄롱은 혹독한 시절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밖에 나가면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 줄이 점점 길어지고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 더 추운 집에서 지내며 외부를 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고, 어느 이른 아침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사제관 뒤편에 놓인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걸 봤다고 합니다. 사제관에서 키우는 고양이보다 못한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펄롱은 이런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선 누구와도 척지지 않고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은 수녀원에서 발생했습니다.

“강 건너 언덕 위에 있는 수녀원은 위풍당당한 건물이었다. 활짝 열린 검은색 대문 안에서 길고 반짝이는 창문 여러 개가 마을 쪽을 향하고 있었다. 앞쪽 정원은 연중 관리가 잘되어 잔디는 바싹 깎여 있고 관상용 관목이 깔금하게 줄지어 자라고 키 큰 산울타리는 사각형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 날씨가 춥고 건조해지자 사람들은 수녀원이 자아내는 모습이 그림 같다고, 마치 크리스마스카드 같다고 말했다.”

이 선한복자수녀회는 직업여학교와 막달레나 세탁소도 운영했는데, 이 세탁소는 평판이 좋아서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 요양원, 병원, 부유한 집에서는 전부 세탁물을 거기로 보냈습니다. 직업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알려진 것처럼 학생이 아니라 타락한 여자들이어서 교화를 받는 중이라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모자 보호소라고, 가난한 집의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가족이 미혼모를 그곳에 보내 숨기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는 부유한 미국인에게 입양시키거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고, 그렇게 외국으로 보내는 과정에서 수녀들이 상당한 돈을 챙긴다고, 그게 수녀원에서 하는 사업이라고 말했습니다.

펄롱은 이 수녀원에 석탄이나 장작을 배달하곤 했는데, 어느 날 그곳에서 엉망으로 머리카락이 잘린 채 바닥을 기어다니며 걸레질하던 여자아이를 보았고, 그 아이는 펄롱에게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그거면 돼요.”라고 호소했지만, 펼롱은 그냥 돌아나와야 했지요. 그가 길을 잃었을 때 길가에서 만난 노인은 펄롱에게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마 그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다른 길이 열릴 것이라는 암시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 펄롱은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울적한 기분이었습니다. 펄롱이 그날 본 이야기를 아내 아일린에게 들려주자, 그녀는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당신은 너무 속이 물러. 그래서 그래. 주머니에 잔돈이라도 생기면 다 나눠주고.”
“우리가 가진 것 잘 지키고 사람들하고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우리 딸들이 그 애들이 겪는 일들을 겪을 일은 없어. 거기 있는 애들은 세상에 돌봐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 거야.”

펄롱은 “하지만 만약 우리 애가 그중 하나라면?”이라고 말하지만, 아일린은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하며 오금을 박았습니다. 그때 펄롱이 기억해 낸 것은 늘 친절했던 미시즈 윌슨이었습니다.

 

미시즈 윌슨의 사소한 친절

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임신을 했고, 가족들도 외면한 그녀를 미시즈 윌슨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개신교도였지만, 가톨릭이었던 펄롱의 엄마를 거둔 것입니다. 미시즈 윌슨은 펄롱에게 잔심부름도 시키고 글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전사한 남편의 유족연금으로 검소하게 살던 윌슨은 빚진 돈이 없었기 때문에 이웃과 부딪치는 일도 없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일이면 윌슨은 교회에 갔고, 엄마와 펄롱은 성당에 갔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둘 다 기도서와 성경을 현관 탁자 위에 올려두고 다음 일요일이나 축일이 올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합니다. 클레어 키건은 “그들의 신앙은 미적지근한 것이었다”고 썼습니다. 열렬한 신앙은 다른 신앙을 가진 이에게 잔혹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뜨뜻미지근한 신앙이 인간을 구원하기도 합니다. 

수녀원 일을 겪고 나서, 펄롱은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미사가 시작되자 사제는 양팔을 벌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하고 말합니다. 회중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하고 화답합니다. 펄롱에겐 이 모든 언사가 공허합니다. 미사는 길게 느껴졌고, 펄롱은 무심하게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볼 뿐입니다. 강론 시간에 훑어보았던 성당 벽면에 걸린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지고, 성모와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만나고, 두 번 넘어지고 옷이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무덤에 묻힙니다. 그뿐입니다. 성당에 앉아 있는 그 누구도 예수처럼 살 생각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날 펄롱은 영성체도 받아 모시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펄롱은 미사 내내 석탄광에 갇혀 있던 여자아이를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는 석탄이 새카맣게 낀 긴 발톱을 하고 있었고, 펄롱에게 “내 아기가 어떤지 물어봐 주시겠어요?” “배고플 텐데 누가 젖을 주죠?” 하고 물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아기를 낳은 지 14주 되었고, 수녀들이 데려간 뒤로 소식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아이는 석탄 광에 갇혔습니다. 그날 펄롱은 이 아이를 수녀원장에게 넘겨주었고, 수녀원장은 펄롱의 가족들 안부를 물어보며 50파운드의 지폐가 든 크리스마스카드를 선물했습니다. 거기엔 서둘러 쓴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일린, 빌, 딸들에게. 여러분 가족에게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기를!” 펄롱은 그날 이 봉투를 구겨 석탄통에 던져 넣었습니다.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는다면

눈이 소심하게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 펄롱은 결국 수녀원으로 다시 갔고, 아직도 광에 갇혀 있던 여자아이 세라에게 말했습니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처음엔 이 아이를 사제관으로 데려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문득 ‘다 한통속이야’ 하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지역에서 유력한 인사들은 사제든 수녀든 누구든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속내는 뻔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펄롱은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시내를 에둘러 가지 않고 용기를 내어 평소에 다니던 길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그 길에서 펄롱이 평소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하지만 펄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생각했습니다. 이때 펄롱에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들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그 순간 펄롱에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펄롱이 지닌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 때문에 분명히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펄롱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는 수녀원과 척을 짓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넘어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미시즈 윌슨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기억해 냈기 때문입니다. 미시즈 윌슨은 어린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사소한 친절을 베풀었고,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펄롱의 어머니도 결국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막달레나 세탁소로 갔을 것이고, 지금의 펄롱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여자아이 세나는 또 다른 의미에서 펄롱의 엄마였고, 펄롱에게는 미시즈 윌슨이 보여준 친절을 세나에게 주고 있다는 기쁨이 뒤따라올 대가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최악의 일은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 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미사에서 사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라고 말할 때, 그분이 주시는 은총과 사랑과 친교는 성당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펄롱의 사소한 선택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은 “나는 왜 작고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사소한 것들을 대하는 태도에 내가 세상과 인간을 대하는 존재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사소한 일에서 늘 좌절하는 법입니다. 자잘한 착함이 쌓여 습관이 되고, 내 삶을 온전히 이끌어 가기를 희망합니다. 사순절입니다. 사소한 친절을 베푸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가 용기를 내야 다른 이도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신앙은 사소한 선택에서 판가름 나기도 합니다. 관습적 신앙에서 생활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오늘 내가 나에게 다시 요청합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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