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인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상태바
나는 교인인가, 그리스도인인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9.22 2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북리뷰; [교회교인가 그리스도교인가], 안토니 블룸, 비아, 2024
사진출처=antonirzasa.pl
사진출처=antonirzasa.pl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 1,22-24)

사랑은 사랑을 하면서 깨닫는다는 말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말이겠지요.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의 영광 뿐 아니라 그분의 고통마저 받아안겠다는 것이겠지요. 그분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공적으로 만인 앞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했다는 성직자들마저 하느님 때문에, 예수 때문에 생계를 해결하지만, 그분처럼 사는 걸 어려워하는 걸 보면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성직자들은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그분에게서 영광만 취하고 고난은 마다하기 마련입니다. 받을 존경은 다 받지만, 희생할 마음은 없는 걸 보면 ‘종교적 절망’이 이런 거구나, 싶습니다. 이럴 바엔 저처럼 평신도로 남아있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지 싶습니다.

성직자들은 그들이 지금 먹는 음식이 그를 고발합니다. 성직자들은 지금 입는 옷이 그들을 고발합니다. 성직자들은 지금 그가 타는 승용차가 그들을 고발합니다. 성직자들은 그가 강론대에서 행한 발언이 그를 고발합니다. 성직자들은 그가 누리는 생활양식과 사제관이며 주교관이 그들을 고발합니다. 스승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탄식하신 분입니다. 스승은 적빈(赤貧)의 처지를 마다하지 않은 분입니다. 그분은 손가락질 당하는 것을 피해가지 않은 분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견해를 거슬러 투쟁하고, 그래서 세상의 법정에서 단죄받은 분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전 교회적인 ‘무사안일주의’(無事安逸主義)입니다. 관공서 같은 교회, 공무원 같은 사제, 민원인 같은 신자들이 교회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말씀’은 실종되고, 복음은 헛되이 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천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스교의 이상과 사뭇 다른 현실

수도사이며 성직자였던 안토니 블룸(Anthony Bloom, 1914~2003)은 스로즈의 안토니오스라고 불립니다. 수도서약을 한 의사로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으며, 1948년 사제로 서품되어 1962년에는 대주교로 서품되어 영국과 아일랜드의 러시아정교회를 관할했습니다. 안토니 블룸은 <교회교인가 그리스도교인가-그리스도인의 현실과 이상에 관하여>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현실적이서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희망적인 이야기입니다.

안토니 블룸은 일찍이 C.S. 루이스가 사용했던 말을 통해 현실교회를 ‘그리스도교’(christianity)가 아니라 ‘교회교’(churchanity)라고 부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아니라 ‘교회’가 자리잡은 삶을 뜻합니다. 크레타의 성인 안드레아(Andrew of Crete)가 남긴 카논 성가에 이런 구절이 있답니다.

"헛되어라 예언자의 외침이여
덧없어라 손에 든 복음이여
열매 없는 계시의 말씀이여"

예언자의 목소리와 복음과 계시를 “메마른 빈껍데기”로 만든 교회에 대한 탄식입니다. 신앙선조들의 모든 고백을 허사로 만드는 교회에 대한 절망에 찬 음성입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교회를 오가는 삶과 교회 생활을 향유하는 삶, 복음을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믿고 간절히 그리스도를 바라보지만 그분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삶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진리를 살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밤낮없이 성경을 읽지만 성경의 요청에 진지하게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게 ‘교회교’에 빠진 삶이라는 것이지요. 교회의 유지-온존-확장에만 골몰할 뿐 자신들이 선포한 복음대로 살지 않는 신앙입니다.

안토니 블룸은 러시아에서 설교하는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설교대에 올라가려는데, 어느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하지 마십시오. 이미 설교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설교대에 올라간 블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들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방금 전해 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주교, 너무나 많은 사제가 설교했지만 그들의 삶, 인격, 거룩함 안에는 그들이 말하던 내용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 설교가 거짓말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 말은 다 사실입니다. 다만 그들은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았지요. 복음이 말하듯, 그들이 한 말이 그들을 정죄할 것입니다.”

안토니 블룸은 “교회에 가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거듭 새삼 강조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5)

 

France. Calais. 1976. The Burghers of Calais by Auguste Rodin.
France. Calais. 1976. The Burghers of Calais by Auguste Rodin.

교회교,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마르 11,12-14)

교회교는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차라리 이 나무에 잎사귀가 하나도 없었다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면 예수는 이 나무를 저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새롭게 소생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나무는 많은 잎사귀를 달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고, 사람들은 이 나무가 잘 익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채 수확을 기다리고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그저 나뭇잎 뿐이었습니다. 외양은 그럴 듯 한데 실상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끝내 공평과 정의를 저버리고, 예언자들을 쳐내며, 급기야 예수마저 십자가에 못박았던 예루살렘 성전세력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웅장한 성당과 들끓는 예배자들, 교리와 신학과 전례로 촘촘하게 구성된 구조물 안에서 쉼없이 하느님을 찬양하지만, 정작 ‘복음’은 실종된 교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적대자였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하느님 앞에 당당했습니다. 율법보다 세밀한 전례 규정을 지키느라 바쁘고, 경건한 얼굴을 지녔습니다. 이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유는, 자기같은 사람을 만드셔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리나 노숙인이나 매춘부가 되지 않고, 가난으로 내몰리지 않아서 찬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하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잎사귀로 감추고, 자신을 신실한 무화과나무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리들은 하느님 나라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설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들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삶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분 앞에 전혀 위풍당당하게 설 수 없다고, 자신은 경건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정직함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메마른 영혼에 생기를 돌려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고백하는 죄를 용서하시고, 하느님께 마을 돌이킬 용기를 주십니다. 짐짓 경건한 무리처럼 포장하는 자에겐 참회가 없으니 하느님께서 끼어들 미래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 없이’ 만족합니다.

 

Sainte Trinité de Anzy le Duc
Sainte Trinité de Anzy le Duc

박물관 교회와 생활하는 교회 

교회란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교리를 선포하며, 초대교회로부터 전승된 사도적 믿음 안에서 초대교회와 같은 신비와 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교회의 겉모습입니다. 사실 어떤 교회가 살아있는 유기체라면, 어떤 교회는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사제들은 학예사가 되어 교회 역사와 유물에 담긴 거룩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관람객들은 줄지어 해설사를 따라다니며 완벽하게 세팅된 전시물에 감탄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믿습니다. 물론 이 모든 서비스는 관람료를 지불한 사람들에 한정해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교회가 본래 ‘살아있는 유기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교회 자체가 완벽한 구조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영적 여정을 시작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시리아의 에프렘(Ephraim of Syria) 성인은 교회를 가리켜 “성도들의 모임이 아니라 뉘우치는 죄인들의 무리”라고 말했습니다. 뉘우치는 죄인이란, 죄를 고백하며 용서해달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돌이키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 길에서 죄와 뉘우침을 반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룩할 때도 있지만 하찮은 모습일 때도 있습니다. 헌신하고 배신하며 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과오와 희망을 하느님과 나누어 갖는 사람들입니다.

스코틀랜드 신학자 제임스 모팻(1870-1944)은 “우리는 천국의 선봉대입니다. 우리 집은 천국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면, 또 우리가 하느님이 계신 곳에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든 천국에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본을 보이신 대로 살아가려고 분투하고 있다면 우리는 ‘천국의 선봉대’라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를 이미 앞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아는 만큼, 힘 닿는 데까지 그분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하느님 앞에 온전히 내려놓을 때, 하느님의 권능이 우리 안에서 드러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교회를 일종의 ‘피난처’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복음의 기쁨> 49항)한다고 하셨지만, 교회교 신자들은 “삶에서 교회로 도망칩니다.” 예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2-3) 하였으나, 그들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고 그분 옷자락에 숨어 버립니다. 그들은 이를테면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죽는 게 두렵습니다. 저를 위해 죽어주세요. 저는 그들을 만날 시간이 없어요. 주님께서 제 이웃을 위해 대신 죽어주세요.”

여기서 우리는 신앙을 고백한다는 게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그저 하나의 세계관을 선택하는 것인지, 타당한 여러 철학 가운데 마음에 드는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인지, 어떤 구원을 위한 약속을 믿는다는 뜻인지 말입니다. 살던 대로 살면서 덤으로 현재의 복락과 사후의 영생마저 보장받자는 것인지 말입니다. 그래서 안토니 블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받은 것에 만족하고 더 완전한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붙어 기생충처럼 살아가며, 하느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실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존재가 되는 대신 하느님의 보호를 구하고 하느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사실상 오락거리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교회에서 신학은 지적인 오락에 불과합니다. 안토니 블룸은 안전하고 안온한 신앙을 비판하면서 선불교 전통에서 나온 이 말을 소개합니다.

"화살이 화살 쏜 사람의 가슴을 뚫지 못하면
과녁도 꿰뚫지 못한다."

복음이 전하는 모든 말씀은 우리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복음적 명령이 매정한 말로 들리고, 어떤 이에게는 용기를 주는 격려와 위로가 될 것입니다. 복음을 아름다운 이상으로 여기며,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능력 밖의 것이라며 포기합니다. 심지어 주교와 사제들조차 복음을 능력을 넘어서는 요청이라며 ‘완화된 복음’을 생각한다면, 그런 교회에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그런 교회가 ‘교회교’에서 ‘그리스도교’로 전진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들은 ‘교인’일지언정 ‘그리스도인’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지요.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갈망하는가? 교인으로 남기를 희망하는가?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