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공관 복음이 모두 전한다. 16장으로 형성된 마르코 복음에서 오늘 복음이 위치한 제8장 후반부 대목은 위치상 복음의 정 중앙에 위치하면서 전환점이 된다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베드로의 고백이 등장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공생활 안에서 중요한 a key moment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이라는 구절로 시작했던 마르코 복음은 오늘 복음에서 “스승님은 그리스도”(마르 8,29)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거쳐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마르 15,39)이라는 백부장의 고백으로 이어진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고백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 모시지만, 아직도 자기 대답의 크기와 본질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한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의미가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첫 번째 수난의 예고’가 뒤따르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사목활동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여정, 제1독서에서 말하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 가야 할 길(이사 50,5-9)이라는 대장정에 오르신다. 이에 화답송은 “나는 주님 앞에서 걸어가리라. 살아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시편 116,9)라고 노래한다.
이번 주부터 3회의 수난 예고(마르 8,27-38;9,30-37;10,32-45)가 담겨 있는 8,27-10,52 대목을 10월의 마지막 주인 연중 제30주일까지 7주간 동안 나누어 듣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집중적으로 가르치시고 제자 됨의 본질(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을 설파하신다.
1.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너희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마르 8,27)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떠나셨다” 하는데, 말마디 상으로만 본다면 ‘나가셨다(나서시었다)’ 할 것이다. 갈릴래아를 거점으로 활동하시던 예수께서 갈릴래아를 벗어나신다. 아마도 적대적인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로부터 잠시 벗어나고자 하셨거나 시기상조인 메시아의 비밀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래아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인 헤로데 필립보가 헤르몬 산기슭, 요르단 강의 발원지가 있어 지하수가 솟아나는 자리이며 동시에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국경이 있는 곳에 기원전 2년경 세운 도시이다. 소위 헤로데 대왕이라 알려지는 이는 이곳에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리는 신전을 지었고, 여기에는 로마군의 주둔지가 있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100리쯤 떨어진 곳으로 현재는 ‘바니야스(Banias)’라고 불린다. 바니야스는 옛말로 Paneas 곧 희랍의 神이었던 Pan을 섬긴답시고 성性적인 문란과 폭력이 조장되었던 곳이다.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었던 필립보가 이 도시를 짓고 카이사리아(=황제적인 것)라 부르면서 자기 이름을 거기에 덧붙임으로써 ‘카이사리아 필리피’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장 먼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곳, 뿌리 깊은 이교도와 그 상징물들이 있는 이 고장에서,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서 도전하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이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하시면서 자기 신분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를 물으신다. “길을 떠나셨고”, 그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으신다. “길”이라는 단어가 두 번 반복된다.
복음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상당 기간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셨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이 그분을 예언자나 위대한 라삐(스승)라고 여기거나 마귀나 사탄이나 악령을 쫓아내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의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과 같은 종교적 권위를 지닌 이들에게까지도 예수님의 명성이 알려진 상황이었다. 물론 이러한 예수님의 명성에 반대하여 예수님을 두고 사탄이 들렸다거나 사탄의 우두머리라고까지 하며 적대감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참조. 마르 3,22-30)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혀 일단 정리하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기시어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듯하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르 8,28) 하고 대답한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곧 하느님이 보내셔서 하느님께서 주신 힘으로 당신의 말씀을 전하고 사명을 수행하시는 분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하고 다시 물으신다. 스승이자 예언자로 여겨 따랐던 제자들이 과연 당신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확인이라도 하시려는 듯이 물으신다. 오늘 복음이 있는 8장에 있으면서 조금 전의 행적으로 기록하였던 마르 8,17-21에 따르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보고도 빵 걱정을 하는 제자들에게 왜 그렇게) 마음이 완고하냐?” 하고 제자들을 꾸짖으신 바가 있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과연 무엇을 믿느냐고 묻는 셈이다.
2. “스승님은 그리스도”
제자들 전체에게 하신 질문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첫 번째로 부르심을 받았던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하고 대답한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으신 이’(기름을 붓는다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크리오Χρίω에서 오는 말)로서(참조. 루카 4,18 사도 4,26.27) ‘메시아’라는 뜻이다. ‘메시아’는 히브리어 ‘마쉬아흐מׇשִׁיחַ’, 아람어 ‘메시아’의 음역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고백한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번역한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왕(1사무 9,16;10,1 2사무 19,10)이나 제사장(탈출 29,7 레위 4,3.5.16), 예언자(1열왕 19,16 시편 105,15 이사 61,1) 등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성별聖別 하였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음을 기록하고, 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당신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일러라”(마르 16,7) 하면서 부활 소식을 맨 먼저 알려야 할 제자로서 기록한다.
베드로가 어쩌다가 엉겁결에 고백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항상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시게 될 예수님의 이 칭호에는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내용이 담겼다. 단지 한 스승이나 예언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름을 부으시어 성별하신 분, 성경 말씀에 담긴 약속을 이루시는 분,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분, 메시아라는 뜻이 담겼다. 예수님을 향한 이러한 일차적인 베드로의 고백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곁들이면서 베드로의 고백이 단순하고 인간적인 고백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밝힌다.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베드로의 고백은 무척 단순하고 간결하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에 그 어떤 말씀을 덧붙이시지도 않고 그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르 8,30) 하신 것으로만 기록한다. 아마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에 관한 분명한 진리이지만, 사람들이 전하는 말들로 이루어진 종합적인 의견이거나 정치적 의미에서 선포되는 메시아가 아니고, 사람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개선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궁극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만 온전히 드러날 메시아이심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물음에 따라 터져 나오는 대답이다. 보통으로 인간들이 자기가 하는 말이나 어떤 고백에서 그 말의 크기를 모두 이해하고 하는 것이 아니듯이, 베드로의 고백도 그 고백의 내용이나 크기를 베드로가 제대로 이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베드로에게는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마태 16,24 마르 8,34 루카 9,23;14,27) 성실히 그분을 뒤따라가면서 자기 고백의 내용을 온전히 깨우쳐가게 될 것이었다.
올바른 고백이라 할지라도 신앙은 그 고백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고백의 내용을 내 몸으로 살아낼 때만 신앙이다. 고백을 산다는 것은 자기희생과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삶의 내용(십자가)을 내 삶 안에서 다시 이루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팔을 벌리고 섰을 때 십자가 모양』이라고 테르툴리아노(155?~240년?) 성인은 말씀하신다. 그렇지 않고 입의 고백만으로 끝날 때,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다음 순간 곧바로 예수님 곁에서 물러나야 할 사탄으로 전락하고 만다.(참조. 마르 8,35)
3. “사람의 아들…반드시…고난…죽음…다시 살아나셔야”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당신에 관해서 말하지 말라는 당부 뒤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내용,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르 8,31) 중요하고도 참된 가르침으로서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뜻을 담은 “반드시(데이, δεῖ)”라는 말마디와 예수님께서 새롭고 중요한 내용으로서 제자들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어 적극적으로 나서시어 “가르치기 시작(에르사토, ἤρξατο)” 하셨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드시”라고 해서 예수님이 그런 운명이라거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처절한 고통을 원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죄에 물든 인간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극히 의로우신 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거부를 당하고 박해를 당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의로운 분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사악함, 그저 그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그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제거하려는 자들의 악행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지혜서의 저자는 “악인들의 행실과 말로 죽음을 불러내고 죽음을 친구로 여겨 그것을 열망하며 죽음과 계약을 맺는다.”(지혜 1,16) 하면서 이미 오래전 그러한 인간의 속성을 간파한다.
참으로 의로운 분,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사악함으로 인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익히 아시면서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쫓아 온전한 자유로 “반드시” 이를 당신 몸으로 살아내셔야만 했다. 인간적인 실패를 겪으면서도 가야만 한다는 운명론적인 체념으로 가는 길이 아닌 길,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인간적이거나 세속적인 방어 수단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오로지 인간을 사랑하시어 “끝까지”(요한 13,1) 하느님의 뜻을 쫓아 나아가야만 하는 길,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길이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어 성실히 나아가는 길, 그 길이 예수님의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이러한 수난과 부활의 첫 예고 이후에 원수들이 쳐 놓은 수난과 죽음의 그물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께서 당신을 동반하시고 지탱해주시며 마침내 다시 살게 하시리라고 믿으며, 단호하게 오르신다.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악인들과 함께 묻히는…(그런데도)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며…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그래서) 고난의 끝에 빛을 보는”(이사 53,8-12) 길에 들어서신다.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릇된 하느님의 형상을 지어내거나 예수님의 죽음을 두고 그저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우연적 사건 정도로 이해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인간적 숙명도 아니고 그저 그런 사건이 아니다. 배반과 거부, 적대감으로 십자가에 달아매 하느님을 죽이기까지 하는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길, 온전한 사랑과 자유, 그리고 그토록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놓여있고 “반드시” 가야만 하는 그 길,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있는 그 길을 내다보시며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마르 8,32)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33) “사탄”은 ‘적대자’를 뜻하는 히브리어(שָׂטָן)를 그대로 음역한 것이다. “물러가라” 하신다. 네가 가야 할 너의 자리로 가라는 말씀으로서 직역하면 ‘내 뒤로 가라(휘파게 오피소 무, Ὕπαγε ὀπίσω μου, get behind me)’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직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후,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예수님의 여정에 걸림돌이 되고 만다. 신자일지라도 누구든 예수님의 걸림돌이 되거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직역하면 ‘내 뒤에 오너라’)”(마르 1,17)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행여 예수님 ‘앞에 나서서’ 예수님 앞길에 걸림돌이 될세라 염려하면서 성실하게 그분의 ‘뒤를 따르는’ 제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4-35) 하신다. 예수님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도 가야 할 길이다. “자신을 버리고”라고 하는데, 이는 동양적 사고에서 흔히 말하는 것처럼 ‘비움’만이 아니다. 자신을 비워낸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채워지기를 갈망하여 그 은총을 기도하는 길이다. 그 길은 말로만 고백하는 길이 아니라 기꺼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어서’ 목숨을 ‘구하는’ 길이다. 아멘!
[출처] benji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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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