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영원을...예수가 하려던 말들
상태바
일상에서 영원을...예수가 하려던 말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6.01 1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수가 하려던 말들] , 김호경, 뜰힘, 2022

“하느님 나라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예수가 기대고 있는 것은 심오한 깨달음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의 풍경이다. 비범한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된 일상적인 이야기. 예수는 일상의 창을 통해 영원을 바라본다.”(김기석)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다.”(루카 4,32)고 전합니다. 당대의 지식인 반열에 서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볼 때 한낱 목수에 불과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권위를 느꼈다 하니, 놀랄 일입니다. 지식인의 언어는 저들끼리는 통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와서 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의 어부들과 아낙네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영향력이 있었고, 그래서 권위가 발생합니다. 율법학자나 성직자나 신학자처럼 거룩한 직분에 속해야 그 말에 권위가 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에서 솟아나온 언어가 사람의 마음을 울려야 권위가 생깁니다.

김호경은 <예수가 하려던 말들>에서 예수님의 언어가 일상의 풍경을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늘 듣던 이야기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예수님 언어는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늘 비교를 당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때문에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동가’라고 부르면서, 그분을 제대로 공격하고 가로막지 못한다면, 그들이 이룩한 모든 질서가 무너진다고 여겼습니다.

익숙한 말씀을 낯선 시선으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는 새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이 익숙한 말을 낯설고 새로운 방식으로 전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종교-정치권력에게 그 자체로 큰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권력자들은 하느님의 대리자나 중개자로 행세하며 자신의 권력을 누리고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제국의 질서를 따르지 않습니다. 로마제국뿐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체제의 질서에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선 어떤 중개자도 필요하지 않으며, 하느님은 사람들과 직접 교류하며, 그들을 당신 앞에 당당하게 세웁니다. 하느님은 모두를 구원하며 그 자비 앞에서 제외되는 사람도 없고, 유별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하느님 나라는 늘 조상들에게 전해 듣던 나라였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손에 잡힐 듯 보여주어야 “지금 고통 받고 가난한 백성”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식인의 언어로는 곤란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곧잘 하느님 나라[하느님의 통치]를 이야기 했지만, 언제나 율법준수 여부를 따지며 ‘자신들의 통치’를 희망했을 뿐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가난한 백성들은 그 나라에서 언제나 배제되고, 그곳엔 그들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루카 6,20)이라고 말합니다. 율법학자들이 볼 때 이런 나라는 “(가난한) 죄인들의 나라”에 불과하니, 불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과 거룩함을 모욕한다는 여겼을 것입니다.

구원의 열쇠는 ‘실천적 사랑’

이럴 때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합니다. 비유란 은유를 하나의 이야기로 확대한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루카 6,46-49)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13,24-28)

이런 이야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담한 도전이 됩니다. 김호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예수가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혹은 예수를 빙자하여 행하는 일에 대한 예수의 비난은 단호하다.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나 예수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구원을 보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들음과 행함이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을 가리켜 ‘불의’라고 말한다. 나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는 없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불의하며 나쁜 나무는 불의한 열매를 맺는다. 예수는 들음과 행함의 괴리를 극복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다.” 결국 구원의 열쇠는 ‘행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행하다’라는 말이 곧 긍정적인 열매만을 맺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행하다’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고 말할 때처럼 ‘힘쓰다’ ‘애쓰다’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다보면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놓치지 않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도 말씀에 따라 투쟁하는 삶 자체가 중요합니다.

김호경은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일상적 삶 속에서 예수의 말로 인내하고 투쟁한 시간들이 ‘행함’이라는 이름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싸우기 마련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한다면, 예수님의 사람이 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기준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는 들은 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훗날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호통을 치실 게 분명합니다.

 

현실과 일탈 사이

김호경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을 식별하는 무거운 과제에 직면할 때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그림 <우유 따르는 여인>를 떠올린다 했습니다. 매일 아침 어김없이 식탁에 소박한 빵과 우유를 놓아두어야 했던 그녀는 우유를 따르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녀가 매우 ‘정성스럽게’ 우유를 따르고 있다는 것만 알아챌 수 있을 뿐입니다. 고작 우유 한 잔,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평범한 일 뒤에도, 그녀가 겪어야 했을 수많은 서글픈 사정과 절망, 그리고 또다른 희망이 뒤엉켜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보기와 달리, 세상엔 ‘평범한 시간’이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그림과 더불어 언급되는 같은 화가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인물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이 소녀의 정체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같은 제목의 소설과 영화에선 ‘하녀’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진주 목걸이는 ‘일탈’을 상징한다고 김호경은 이야기 합니다. 이 진주 귀걸이는 평범한 소녀를 특별한 존재로 부각시키며, 관능적인 입술과 당돌한 눈빛이 겹쳐지면서 도발적으로 보입니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의 시선은 흘러내리는 우유를 향하지만,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의 시선은 당혹스럽게도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 내가 살아내야 하는 현실이라면,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는 내가 이르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공간은 마땅히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자북자북 눈 위에 발자국을 박으며 걸어가듯이 새겨놓아야 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잠시 일상을 멈추고 나 자신을 응시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차마 잊을까 하여 순간순간 멈추어 그분을 바라보면서도, 오늘 하루 정성스럽게 일상를 돌보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현학적인 언어로 공상적인 사랑을 논하는 것보다 부질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유튜브 강의: 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