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어도(nobody) 정말 괜찮다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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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어도(nobody) 정말 괜찮다는 깨달음
  • 이연학
  • 승인 2023.03.1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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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도착 그리고 출발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시나브로 올해도 저물어 간다. 하루해든 한 해든, 저무는 해는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끝’에 세우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어디쯤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새삼 묻게 된다. 끝과 시작, 도착과 출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종말 영성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이런 말씀은 우리를 곧바로 ‘끝’ 또는 ‘끝장’에 세운다. 끝과 끝장에 관한 이야기를 신학에서는 ‘종말론’이라 하거니와, 교회 안에서 수도 생활이 시작된 것도 바오로 사도가 이 맥락에서 사람들을 독신의 삶으로 초대한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그러니까, ‘끝’이 가르치는 것은 아무것에도 애착하지 말라는 것이다(이어지는 32-35절 참조).

이런 내적 자유의 경계를 일러 요한 카시아노(360-435년)는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라 했고(「담화집」, 9,8), 나중에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년)는 ‘치우치지 않음’(不偏心, indiferencia)이라 불렀다. 예수의 데레사(아빌라의 데레사, 1515-1582년)가 “모든 것이 지나간다. 하느님만 불변하시다.”라며 “하느님만으로 만족”할 것을 가르쳤을 때도 한결같이 이런 종말 영성의 전통에 서 있었다.

도착

한 해의 끝에 서서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늘 부끄럽다. 하느님 현존을 감당하기에 내 삶은 늘 터무니없이 남루하고 준비되지 않았다. 더 딱한 것은, 죽는 순간에도 딱히 다르지 않으리란 다분히 합리적인(!) 예측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니 어쩌면 바로 그래서, 나는 더 기쁘고 고맙다고 고백할 수 있다. 뻔뻔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이게 바로 ‘복음의 기쁨’인데,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버벅거리면서라도 몇 마디 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내 편에선 끝내 준비되지 않겠지만 그런 나를 하느님께선 늘 받아들여 줄 준비가 되어 계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의인보다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이 오늘도 하늘 나라에 먼저 들어감은(마태 21,31 참조) 바로 이런 연유이며, 그래서 나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1090-1153년)과 함께 진심으로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공로는 그리스도의 자비입니다. 그분 자비가 마르지 않는 한 제 공로도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자비가 무량하다면 제 공로 또한 그러합니다. 제 비록 죄 많음을 모르지 않으나, 죄가 많은 곳에 은총 또한 풍성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아가 설교」, 61,5).

사실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1873-1897년)도 꼭 같은 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저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고 공로를 쌓지 않습니다. … 제 인생의 저물녘, 저는 당신 앞에 빈손으로 나설 겁니다. 주님께서 제 선행을 헤아려 주시길 청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온갖 정의가 당신 눈에는 불완전할 따름, 저는 당신 자신의 정의로 옷 입고, 당신 사랑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영원히 소유하기만을 바랍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문득 내가 이미 도착해 있음을 알아차린다. 전혀 내 노력이 아니라 순 하느님 자비로, 이미 나는 더 오를 데 없는 정상에 올라와 있음을 본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년 무렵)는 마리아와 마르타 대목(루카 10,38-42)을 두고 한 설교에서 영적 여정의 ‘세 길’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첫째는 “많은 활동과 뜨거운 열정으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통상의 영적 여정이다. 둘째는 이보다 진보해서 “길 없는 길”이라 불리나 아직 완전하진 않다. 반면 셋째는 “길이라 불리지만 사실은 이미 집에 (도착해) 있는 상태”로서 사람은 여기서 “하느님을 그 어떤 매개도 없이 본질(또는 존재) 그대로 뵙는다”(M. O’C. Walshe, The Complete Mystical Works of M. Eckhart, New York, 2009, 87쪽).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이 “(제 허약함을 통해) 절뚝거리며 더 안전하게 도착한다.”고 표현한 지점(「겸손과 교만의 단계들」, 25-26쪽),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승강기’, 곧 예수님의 팔에 안겨 도달한다고 표현한 그 ‘꼭대기’가 바로 이 셋째 길이 아닐까. 꼭대기에 도착했으니 이제 남은 일은 실로 ‘하산’(下山)뿐이다.

출발

“하느님을 매개나 방편 없이 뵙는다.”는 말씀은, 모든 것과 모든 순간이 (다음 순간의) 어떤 목적을 위한 방편이나 발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목적이란 사실을 가르친다. 하느님 자비의 현존 안에서 이미 하나가 된 나의 현존을 발견한 순간, 모든 것과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하느님 영광을 투명하게 보여 주는 ‘종점’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비로소 지금 여기서 온전히 깨어, 만나는 모든 이와 하는 모든 일을 미래를 위한 방편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에크하르트는 “이유 없이(ohne Warum) 산다.”고 표현했는데, 고 정일우 신부(1935-2014년)가 철거민들과 함께 살면서 “닥치는 대로 산다.”고 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고 믿는다(「예수회 신부 정일우 이야기」, 제정구기념사업회, 2009).

필경, 그리스도교 영적 전통의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도착하려고 출발하는 게 아니다. 도착했기 때문에 출발한다. 도착하는 데는 시간도 노력도 전혀 들지 않는다. 그저 알아듣고 알아차리면 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투신(또는 수행[修行])의 여정에는 시간과 노력이 꽤 든다. 그리고 이렇게 출발할 때만 사람의 노력은 열매를 맺는다.

그럴듯한 무언가 또는 누군가(some-body)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어도(nobody) 정말 괜찮다는 깨달음, 그 감사(appreciation)와 미안할 정도의 고마움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도착했기에 비로소 시작되는 이 수행 여정을 일러 앙드레 루프 아빠스(1929-2010년)는 “허약함의 수행”이라 불렀거니와, 이는 사막 교부들한테서도 발견되는 복음적 수덕론이다(A. Louf, The Way of Humility, Kalamazoo, 2007, 16-24쪽).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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