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란 무엇인가, 하느님 현존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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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란 무엇인가, 하느님 현존 안에서
  • 이연학
  • 승인 2023.03.06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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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기도

‘기도’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란 버거운 일이다. 너무도 오래전부터 너무도 많은 가르침이 이미 글로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 뭘 보탠다는 게 자못 가소로운 일이다. 그래도, 살아오며 나름으로 기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체험한 점만 몇 가지 나누어 볼까 한다. 공동체 전례 기도와 거룩한 독서의 맥락에서 기도를 살펴보는 일도 빠트릴 수 없겠지만 생략한다. 졸저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성서와함께, 2006년)에서 적었던 바와 생각이 달라지지도 않았거니와 이 지면에 담기엔 분량도 넘칠 것이다.

 

사진출처=teaser-trailer.com
사진출처=teaser-trailer.com

기도 학교인 <시편>

<시편>은 참말이지 ‘기도의 학교’라 할 만하다. 수도자, 성직자의 ‘시간 전례’ 또는 ‘성무일도’의 대부분이 시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편>엔 감사와 찬미, 기쁨과 희망, 뉘우침과 깊은 신뢰 같은 거룩한 감정만이 아니라 탄원과 원망, 분노와 슬픔, 심지어 저주 같은 부정적 감정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한때는 이런 표현이 불편하기도 하고 유치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시편>이야말로 기도의 학교임을 깨닫게 되었다. 시편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가르치는 태도는 정직함이다. 하느님 앞에선 착한 척, 신심 깊은 척해 봤자 소용없다. ‘있는 그대로’가 ‘장땡’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정직하게 인식되고 어떻게든 표현되는 게 좋으리라. 그러나 타인들 앞에서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기도는, 이런 감정들이 표현되기에 가장 안전하고도 필수적인 장소다. 하느님 앞에서라면 어린이처럼 맘껏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심지어 화를 내도 된다. 그것이 ‘기도’로 표현되는 한, 억눌린 감정이 뒤에 더 큰 낭패를 불러오지도 않거니와 어리석음과 죄를 더하는 일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 죄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모든 감정도 우리를 하느님 앞에서 단순하고 정직하게 서도록 초대한다. 이런 과정을 충분히 거칠 때만 뉘우침과 승복, 감사와 찬미의 기도도 비로소 서서히 샘솟는다.

자비, 신뢰, 쉼

청원 기도는 당연히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의 여정에 깊이 접어들면서 이런저런 기대와 소원은 현저히 줄어들고 그저 깊은 신뢰로 잠잠히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게 사실이다. 하느님께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하는 기도 행태에서 벗어나 내적 ‘골방’에 들어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마태 6,6-8) 아버지의 현존 안에 더 깊이 잠기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은 이 가르침 바로 다음이다(9-15절 참조). 주님의 기도는 유다인들 신앙생활의 이른바 ‘세 기둥’인 자선, 기도, 단식에 관한 가르침의 한복판에 등장한다(1-18절 참조). 세 기둥에 관한 가르침에 마치 후렴구처럼 공통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마라.’는 말씀이다(1.5.16절 참조).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만 드러내라.’는 말씀, 곧 늘 현존하시는 하느님 앞에 제대로 현존하라는 초대이다. 이 자리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린다. 시편 말씀 그대로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139,4).

이 모든 것의 한복판에 하느님 자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로 느끼지 못하면 이런 현존은 불가능하다.

하느님의 현존, 나의 현존

어떤 이들은 그저 순수한 은총으로 이런 현존의 심장부로 아주 깊이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른바 ‘수동적 관상’(contemplatio passiva)이겠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도에 관한 더 깊은 이해와 어느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누구에게나 기도는 어렵거나 심지어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매우 쉽고 쾌적한 ‘쉼’과 기쁨의 체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마태 11,28-30 참조).

노력하지 않아도 인체는 절로 물에 뜬다. 그런데 가라앉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바로 그 노력(과 가라앉는다는 두려움) 때문에 수영을 배우기가 그토록 힘들고, 익사 사고도 그래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기도를 열심히, 그리고 잘하려는 노력 또한 물에 가라앉지 않으려는 노력과 비슷한 데가 있다.

그리스도교 수도승으로 힌두의 비이원(非二元, Advaita) 영적 여정을 깊이 걸었던 앙리 르 소 신부(H. Le Saux, 1910-1973년)는 “하느님 현존으로 들어갑시다.”라는 투의 기도 초대가 얼마나 가소로운 오해에 기반을 둔 것인지에 대해 실감 나게 지적한 바 있다(Eveil à soi, éveil à Dieu, 1990).

하느님의 현존은 도대체가 사람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하느님 현존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금방 분명해진다. 시편 139편은 모두 이런 깨달음을 표현하거니와(특히 7-12절), 그분 현존은 우리가 그저 (그리고 거저!) 알아차리고 누릴 수 있는 어떤 노력으로 얻거나 도달하는 자리가 아니다. 도달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이미 내게 충만히 와 있는 현존을 못 알아차리게 만든다.

“하느님께서 여기 계신다고 알아차리는 일은 우리 감각이나 영의 활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느님께서 지금 여기 계신다(현존하신다). 이게 전부다. 그리고 나 또한 여기 있다면(현존한다면), 이 사실 자체로 이미 나는 하느님 현존 속에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현존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현존이다”(위의 책, 25쪽). 그렇다면, 기도는 사실 ‘행위’라기보다 ‘존재’에 가까운 무엇이라 해야 한다. 사막의 안토니오 성인은 “스스로 기도하는 줄 알고 있다면 아직 기도하는 게 아니다.”라고 했거니와, ‘끊임없는 기도’의 이상도(1테살 5,17 참조) 이런 맥락에서만 실천할 수 있다.

기도에 관한 모든 이야기의 종착점은 결국 일상 또는 삶이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요한 4,24; 로마 12,1-2 참조)가 오늘 이야기의 결론이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해선 다음에 따로 다루는 게 좋겠다.

기도의 가장 큰 결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이렇게 대답하겠다, 인생의 보람이나 가치 또는 의미가 하는 일의 성과나 업적, 타인의 평가 따위에 달리지 않았음을 깊이 깨닫는 것이라고. 지금의 자기 아닌 다른 무엇이 될 필요가 전혀 없음을 새삼 알아차리는 마음에 고이는 맑은 안심(安心, amerimnia)이라고. 거기 어쩔 수 없이 함께 샘솟는 감사라고.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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