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이래서 일꾼에 오고 저래서 일꾼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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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래서 일꾼에 오고 저래서 일꾼을 떠난다
  • 도로시 데이
  • 승인 2023.01.15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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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27-편집자들 또한 요리한다 1

<가톨릭일꾼>은 신문이지만 그것은 또한 운동이다. 한편으로 “가톨릭 일꾼들” 이라고 불리는 편집자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 전역에 아니 전세계에 보내지는 7만부의 신문을 읽는 가톨릭일꾼 독자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군비철폐, 쿠바, 평화주의, 혹은 가장 최근의 파업에 대하여 실은 기사들에 대하여 격렬한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독자들이 우리와 동의할 때 그들은 가톨릭 일꾼들이다. 그들이 동의하지 않을 때는 가톨릭 일꾼 신문의 독자들이 된다. 그것은 유동적인 상황이다.

편집자들은 일반적으로 스텝(full-time volunteer)들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스텝들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또 어디에서 끝나는가? 죠우 마티카와 폴 그리고 챨리, 독일인 죠지, 폴란드인 월터 그리고 이태리인 마이크 또한 스텝들이며 그들은 신문을 펴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가톨릭 일꾼은 또한 운동이기 때문에 우리의 편집자들과 집필자들은 요리하고 청소하고 설거지를 한다. 그들은 병든 이들을 돌보고 병원으로 몸이 불편한 이들을 데려다 주고 해충이 가득한 아파트들을 깨끗이 치우고, 때론 장식을 하고 조각을 하고 페인트칠을 하거나 기타를 연주하며, 모두가 교회의 저녁 기도인 노래로 하는 저녁기도에 함께 참여하는데, 그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친다.

1962년 지금, 그 이름들을 다시 생각할 때에 나는 숙고하기 위해서 잠시 멈춘다. 왜 사람들이 오는 것일까? 이유들이 다양한데, 어떤 이들은 그들의 이상들을 살기 위하여 온다. 어떤 이들은 막 고등학교나 대학을 나와서 그들 자신들을 발견하려고 온다. 어떤 이들은 더 이상 하고 있는 일들의 단조로움을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자극과 모험을 찾으며 온다.

왜 그들은 떠나는가? 어떤 이들은 결혼하기 위해서다. 가족을 부양할 필요성은 그들이 도망 나온 그 지루한 일로 되돌아가게 하지만 바람직하게도 그들은 피터가 노동의 철학이라고 부른 것을 가지고 돌아간다. 스텝들과 방문자들 사이에는 끊임없이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즉, 조립 라인에서 향수병들을 채우는 일, 광고지를 만들어 내는 일, 풍선껌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성화될 수 있을까?(가톨릭인들은 이 환상적인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 않는가!) 어떤 이들은 수도원에서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하여 봉사의 삶을 살고, 직업인으로 살기 위하여 혹은 더 이상 우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이 가톨릭 일꾼에서 떠난다. 떠나는 이유들은 그들을 오게끔 자극했던 이유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우리와 함께 일함으로써 노동과 정치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은 그들이 선택한 분야에서 해야 하는 전문적인 일에 어떤 발판을 마련하였다. 사회사업, 편집, 노동자 조직과 정치, 가르치는 것, 저술, 간호 등 이 모든 활동적인 분야에는 가톨릭 일꾼들이나 혹은 이전에 가톨릭 일꾼이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행할 때 나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본다. 가톨릭 일꾼은 피터 모린이 인가했듯이 사람들의 운동이다. 그는 사상가요 지도자였다.

가톨릭 일꾼을 둘러싸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오고 가는가! 나는 내가 편집장을 맡고 있을 때 다른 편집자를 쫓아내는 것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떠났던 초창기 편집자들 중의 한 사람을 기억한다. “누구도 쫓아 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들이 스스로 물러난다”라고 피터는 말하였다.

반대자들은 최근에야 생겼다. 젊은 “비트족” 몇 사람이 와서 자유라는 미명하에 우리 아파트에서 기거하며 가난한 이들의 침대를 차지하고 가난한 이들의 음식을 먹으며 맥주와 여자들과 마약을 가져왔다. 그들에게 나가 달라고 요구하였을 때 편집자들의 한 명도 떠났다. 그는 젊은이들의 정열에 대하여 우리가 매정했고 따라서 우리의 원칙들에 관해 거짓으로 처신했다고 말했다. “만일 누가 너의 겉옷을 가져가면, 너의 외투도 주라. 그리고 7번씩 70번 이라도 용서하라”는 원칙을 우리는 말하지 않았던가? 인용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얼마나 괴상하고 제 멋대로가 되는지 나에게는 신비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퀘이커 그룹이었더라면 우리는 모임을 갖고 만장일치의 동의에 도달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구성원이 의견을 달리 했기에 우리가 무기한으로 질질 끌려가는 상태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피터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베네딕또 수도회의 방법을 따른다. 한 사람이 환대의 집을 책임지며, 그가 말한 것은 그대로 진행된다. 그의 권위는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기에 받아들여진다.

신문의 경우를 보면(내가 책임자이다), 발행인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수년전에 내가 우리를 요긴하게 도와준 어떤 사람의 이름을 실었을 때, 한 편집자는 그 사람의 이름이 실리면 자신의 이름을 빼겠다고 선언했다. 논박이 계속 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었고 결국 모든 이름들이 다 빠졌다. 그리고 나서 작년에는 너무나 많은 편집자들의 이름이 나열되었으므로 아몬 헤네시는 자신의 이름을 빼 달라고 요구하였다. 피터처럼 그는 “모든 이의 신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라고 느꼈으며 그래서 그는 “홀로” “한 사람의 혁명“을 더 선호하였다. 스텐리는 우리 신문의 정치에 관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그의 이름을 뺐다.

사람들은 왜 오고 왜 가는가? 스텐리는 가벼운 냉소적인 유머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쇼핑백을 가지고 와서 갈 때에는 도서관에서 꺼낸 모든 책을 말도 없이 자기 트렁크들에 넣어간다.” 탁자 옆에 앉아 있던 어떤 다른 사람이 “그들은 눈에 별들을 가지고 오고, 입에 저주를 달고 떠난다”고 말한다. 스텐리는 계속 해서 “나는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농장을 만들고 운영하려고 오는 여자들에 관하여 쓸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 모든 변화들을 이루었을 때, 처음에는 참 멋졌었다고 말하며 회한 속에 그들이 어떻게 떠나는가에 대하여 쓸 것이다”라고 말한다. 주님은 사람들을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로부터 밀어내시는 그분 자신의 방법을 갖고 있다.

또 다른 어떤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그룹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온다. 모든 저항적인 가톨릭 신자는 조만간 가톨릭 일꾼이 되고 만다. 거기에서 그들은 다른 모든 이들 안에서 그들 자신을 보게 되고 스스로를 치료한다.”

그들 모두를 열거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가장 중요한 사람인지 도대체 누가 아는가: 길거리에서 신문을 팔았던 댄, 접시를 닦는 말라깽이 본, 모든 허드렛일을 하고 옷방에서 일하는 아써 J. 레이시, 또는 빛나는 말들을 말하고 열정적으로 일에 관하여 쓰는 사람들-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이 실행하는 동안?

그들 모두 중에서 첫 번째는 막 학교를 졸업한 검은 머리칼과 빛나는 눈을 가진 우아하고 젊은 아일랜드 소녀로서 이름은 도로시 웨스턴이었다. 그녀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즉 그녀의 언니가 수녀로 있는 예수성심 수도원 학교와 포담 대학과 콜롬비아 져널리즘 학교이다. 그녀는 언론인이기보다는 오히려 학자였다. 산아제한과 오르바크 파업에 관한 자료를 준비하였을 때 그녀는 철저하게 끝마쳤다.

그녀는 정오까지 잠을 자는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랬고 대부분의 젊은이들처럼, 그녀는 일할 수 있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밤의 고요함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서부지역의 끄트머리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우리와 함께 살려고 왔다. 사무실 뒷편에 만들어진 침상에 한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 잠들어 있는 것은 난처한 일이었다. 그녀의 팔은 이마에 포개 있었고 검은 머리카락은 베개쪽에 실루엣을 만들었다. 그녀 주위로 칸막이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러 왔던 남자친구들은 물이나 오전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부엌에 갈 때에 그 방을 지나서 가야만 했다. 뒤에 그녀는 결혼하였으며 지금은 유럽에서 산다.

그 다음엔 그녀의 조카(그는 영화 부두에서 생생하게 묘사되었던 사제이다) 처럼 지독한 일꾼인 아일린 코리던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잡지를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를 떠났다. 그리고 우리의 첫 총무 역할을 했던 프랭크 오도넬이 있었는데 그는 결혼과 동시에 가족을 부양해야했기에 떠났다(다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프랭크는 메사추세츠 업튼에 있는 가톨릭 일꾼 공동농장에서 살았다).

이 사람들이 첫 번째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온 실업자들에 의해서 도움을 받았다. 이 실업자들 중에는 3명의 댄이 있었다. 즉 큰 댄(내가 이미 말했던), “작은댄”, 그리고 우리가 “중간크기의 댄” 이라고 불렀던 양조장에서 일했던 댄이다. 또 래리 도일과 메리 쉬한 그리고 신문을 팔았던 나의 첫 번째 동료이며 젊은 나이에 심장병으로 죽은 죠우 베네트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강가 근처의 웨스트 찰스가에 있는 두 번째 집으로 이사했을 때에는 또 다른 세 명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즉 빌 칼라한, 에디 프리스트와 그리고 짐 몬테규이다. 빌은 신문 편집일을 도왔으며 에디는 팜플렛을 내기 위하여 우리의 첫 번째 조그만 인쇄소를 시작했고 짐은 펜실베니아의 이스톤에서 첫 공동농장을 시작하였다.

모트가에 집을 얻었을 때, 가장 중요한 일꾼들은 게리 그리핀(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사랑하여서 나에게 귀여움을 받았던, 성미가 불같고 열심히 일하는 젊은이였다)과 죠우 자렐라였다. 그들은 미군야전 병원에서 구급차를 운전하다가 종전을 맞았는데 우리 집에서 충실하게 십년을 살았다. 죠우는 지금 결혼했으며, 퀸스대학의 선생인 게리는 이제 결혼하려고 한다.

쥴리아 포첼리는 우리와 함께 있었던 가장 책임감 있고 열심히 일하는 처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18살이 되면서 그녀는 여자들의 환대의 집과 아이들의 캠프를 운영하였으며 그 이외에도 사무실에서 일하였다. 지금 그녀는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예술가이다. 그리고 그녀의 삶은 그 이상 풍성할 수가 없다.

키가 크고 금발이며 하버드대에서 졸업한지 얼마 안되는 존 코트는 교사들과 언론인들의 집안출신인데 그당시 우리에게 왔으며 노동에 너무나 관심이 많아서 가톨릭 노동 기구가 생기기 직전에 있었던 가톨릭 노동조합 연합회가 그의 노력을 통하여 출범하였다. 그와 빌 칼라한 그리고 죠우 휴즈와 챨스 오로어크 모두는 1936년에서 1937년까지 있었던 전국해양 노조파업 때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우리의 서부지역본부를 운영했는데 그곳에서 우리는 파업하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3개월 동안 탁아소를 열었었다. 죤 코트가 일꾼을 떠났을 때, 그는 보스턴에 있는 신문연합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지금 필리핀에 있는 평화봉사단에 자문인으로 있는데 아내와 10명의 자녀들과 함께 그곳으로 이사하였다. 잭 쏜턴과 데이빗 메이슨 둘다는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때에 우리를 도우러 필라델피아에서 왔는데 잭이 징병을 당하자 데이빗과 보스턴의 환대의 집에서 온 아서 쉬한이 스모키 죠우와 던컨 치셤의 도움을 받으며 그 일을 이어받았다.

전쟁후의 그룹은 시카고 환대의 집에서 온 탐 설리반과 클리브랜드 환대의 집에서 온 잭 잉글리쉬를 포함하였다. 두 사람 다 군복무를 했었는데, 탐은 태평양 지역에서 그리고 잭은 루마니아에 있는 전쟁포로수용소에 있었다(그는 폭격기의 사수였는데 비행기가 추락했다). 탐은 지금 롱아일랜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잭은 죠지아주의 콘예즈에 있는 트라피스트회 사제이다. 밥 루드로우는 3인조 평화주의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우정어린 도전으로 시작하였다가 자주 그들 사이에 악의에 찬 침묵으로 끝나 버리는 토론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들 세 사람은 모두 환대의 집을 훌륭하게 운영하면서 함께 일을 잘 하였다. 탐은 매달 한번씩 유머가 넘치는 글을 썼다. 전쟁과 평화, 자본과 노동 그리고 사람과 국가에 관한 밥의 글들은 너무도 사려 깊고 핵심을 찌르는 것이었기에 그것들은 미국전역에 있는 가톨릭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주의를 끌었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 역시 가르치는 일로 돌아갔는데, 그 분야의 훈련을 이미 받은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우리와 함께 했던 많은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즉, 우리가 뉴버그에 가지고 있었던 농장을 관리하였던 제인 오도넬, 둘 다 농장에서 도왔으며 도움이 필요할 때에 도시에서도 일했던 이렌느 노튼과 헬렌 아들러이다. 제인은 아름다웠지만 농부 죤이 그녀를 “특공대원” 이라고 불렀다. 그녀 안에 대단한 투지가 있었기 때문에 남자들은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는 항상 버거운 상대들과 힘차게 싸우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그녀는 지금 어머니들과 아이들과 함께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한 본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진심으로 그 일을 사랑하고 있으며 또한 그 일은 그녀를 아주 온화하게 해 주고 있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유튜브 강의: 한상봉TV-가톨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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