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좋은 일, 뜻밖의 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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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좋은 일, 뜻밖의 좋은 사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3.01.09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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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좋은 일] , 정혜윤, 창비, 2018

‘뜻밖의 좋은 일’이라니요. 세상에 그런 일도 있을라나, 의아해 하면서 책장을 넘깁니다. 정혜윤 산문집 <뜻밖의 좋은 일>은 ‘책에서 배우는 삶의 기술’이라고 해요. 그는 아마 변경할 수 없는 우울한 현실을 안에서도 ‘책’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 현실에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희망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알고 보니 이미 내가 기쁨 안에 젖어 있다는 깨달음일 것입니다. 어차피 삶은 계속될 테니, 사는 건 ‘좋은 일’이야, 하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로버트 M. 브라운이라는 미국 신학자는 알고 보면 복음서는 ‘뜻밖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서는 읽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겠지요. 부자들이 나른한 표정으로 복음서를 읽을 때, 가난한 이들은 복음서에서 ‘혁명적 전갈’을 듣습니다. 이를 두고 독일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한 자의 눈으로 성서를 읽는 것은 배부른 상태에서 성서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만약 성서를 피억압자의 경험과 희망에 비추어 읽는다면 출애굽, 부활, 성령 등 성서의 혁명적 주제들이 되살아날 것이다.”(<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

자메이카의 민요가수인 밥 말리는 “나는 정치를 알지 못한다. ‘민주사회주의’와 같은 거창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성서가 말하는 것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이미 성서를 읽지 않기 때문에 내가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 이 노래를 지어내게 하고, 강하고 힘차게 만든 것은 바로 성서인 것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 안에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하고 응답하던 ‘순종적인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어떤 이들은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루카 1,52)음을 알리는 ‘마리아의 노래’를 떠올립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뜻밖에도 부자들에게는 흉음(凶音)이 되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복음(福音)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뜻밖에’라는 말은 생각하지 못했던 현실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에 발음하게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현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듭니다. 비통한 현실을 통과하여 환호하며 자매형제들을 끌어안는 비전을 보게 합니다. 정혜윤은 이미 있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현실의 다른 측면을 독서행위를 통해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Le Déluge, 1856Charles Gleyre (1806-1874) 

나를 천사로 만드는 것-책

정혜윤이 표지그림으로 선택한 것은 샤를 글레르의 <홍수>입니다. 설명을 들으면, 노아의 홍수를 연상시킨다.

“어두운 폐허 위를 두 천사가 신선하게 날고 있다. 천사들의 커다란 날개는 빛이 난다. 천사들이 날 때 저 위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절망에 빠진 인간들의 영혼도 깨어난다. 모두 가슴을 활짝 열고 위를 볼 것이고 곧 지상의 슬픔도 색이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한 천사는 무슨 소리인가 잘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천사는 우리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알려주려고 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조롱하기 위해 나는 것도 아니다. 천사는 살아있는 무엇인가를 구하고 계속 살아있게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천사가 하려는 일은 성스럽다.”

천사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심판의 잣대를 들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비행하는 것이지요. 정혜윤은 2인조 천사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이 천사들의 몫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르헤스가 소개한 바실리데스 우주발생론은 태초에 빛과 어둠이 만나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빛은 어둠을 보자마자 뒤돌아섰지만, 어둠은 빛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곧 어둠은 빛을 기억하고 빛의 잔광을 취했고, 거기서 인간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천사들처럼 세상이 어두울 때 빛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정혜윤은 믿는 거지요.

빛을 사랑하는 어둠이 인간이라니, 참 아이러니 합니다. 어둠이 어둠만이 아닌 것은 이유가 있는 모양입니다. 어둠이 빛을 머금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아직 ‘타자를 향한’ 사랑이 남아있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정혜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빛나는 이유는 그들이 마음 속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한한 신뢰, 믿음, 너그러움, 이런 것들이 몸 밖으로 흘러나오면 빛이 된다고 믿는 겁니다. 정혜윤은 책을 통해 그 ‘사랑’을 확인합니다.

“응답 없는 세상과 삶에 대한 고통스러운 사랑을 갖가지 아름다움으로 바꿔놓은 것이 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책이 날개를 펄럭일 때 떨어져 나오는 황금빛 가루에 의지하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고, 스스로를 달래고, 은밀히 격려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버티고, 집요하게 미래를 위한 소원을 품고, 슬픔을 잠으로 바꾸고, 꿈을 꿨다.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갔다.”

작가이기도 한 정혜윤은 자신이 책을 쓸 때도, 천사처럼 독자인 당신을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당신의 고독을 떠올리고, 당신의 아까운 시간이 이 책으로 낭비되지 않기를 바라고, 혼자서 책을 읽는 당신에게 말할 필요도 없이 뜻밖의 좋은 일이 생기길 바란다고 했다.

 

사진출처=caffeinatedepiphany.typepad.com
사진출처=caffeinatedepiphany.typepad.com

당신 덕분에 내가 사랑합니다

정혜윤은 동정 없는 세상에서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어?” 하고 놀라는 순간을 기억하라고 조언합니다. 사람들의 좋은 면을 알아보는 것은 좀 더 나은 나를 찾는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먼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덕분에”라는 말을 찾아냅니다. “아폴로니오스 덕분에 나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어떤 것도 행운에 맡기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라든가, “플라톤학파 철학자 알렉산드로스 덕분에 나는 누군가에게 ‘시간이 없소’라고 불필요하게 너무 자주 말하거나 그 말을 편지에 써서는 안 되며,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더불어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는 말이 그렇습니다.

사람이란 타인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어떤 얼굴, 목소리, 손짓, 표정, 이름에 대한 따스한 기억은 선물”이라고 말하는 정혜윤은 “그것들이 마음의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펼쳐질 때 기억은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정혜윤은 자기 경험을 통한 “...덕분에” 시리즈를 펼치면서 공감할만한 아름다운 기억을 기록합니다. “나의 어머니 덕분에 작은 일에도 평생에 걸쳐 감탄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눈이 내려!’ ‘천지사방 꽃향기 때문에 어질어질해.’ ‘귀뚜라미가 운다!’ ‘내 어머니에게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이다. 많은 인간적 약점이 있지만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지 않을 때 얼마나 강한지도 몸소 보여줬기 때문에 나 역시 내 약점에 힘을 싣지 않으려 애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송경동 시인 덕분에 지옥 같은 세상에서 천국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다소 길지만 송경동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의 온갖 시시함과 추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인간의 다른 면, 드높고 깨끗한 면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악을 잘 알지만 깊게 순수했다. 그는 인간 삶에 드리워진 고통스러운 면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상황을 만드는데 온 힘을 다 썼고, 그 일을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생색도 짜증도 내지 않고 해냈다. 그 과정에 자신이 겪은 가난과 궁핍함에 대해서는 입고 뻥긋하지 않았다.

나는 그 덕분에 체호프가 단편 <굴>에서 한 말, ‘나는 그의 옷이 낡을수록 그를 더 사랑했다’는 말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나도 그의 옷이 낡을수록 그를 더 사랑했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적들을 귀찮게 했고 지치게 했지만 친구들에게는 한없는 관대함과 다정함을 보였다.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즐겁고 기쁘고 성스러운 순간을 세상에서 만들어내길 바랐다. 그런 순간을 함께 사는 누구나 가리지 않고 친구로 삼을 줄 알았다. 그렇게 얻은 친구들을 평생에 걸쳐 귀하게 여길 줄 알았다.

까뮈는 세상은 부조리하지만 부조리는 사랑할 대상을 준다고 했다. 그는 우리 각자에게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사랑할만한 대상이 되어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주었고, 그 자신이 먼저 사랑할만한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

변영주 감독에 대해서는, “그녀 덕분에 삶의 무거운 문제를 공을 가지고 놀 듯 가볍게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가장 탁월한 점은 사람을 웃게 만들 줄 안다는 거였습니다. “웃음은 삶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므로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그녀를 천사의 반열에 올려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늘 내게 천사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혜윤은 자기 마음속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더 이상 내 생각을 하지 않을” 몇몇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앞날에 나의 이야기는 없을 것”이라고 예감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시절인연’이어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것”도 행복한 삶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뜻밖의 좋은 일’은 ‘뜻밖의 좋은 사람’이란 말로 들립니다.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야!”라고 말할만한 사람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주문처럼 외우며, 내 삶에 천사가 되어 주었던 이들을 낱낱이 헤아리며 빠뜨리지 않고 이름을 떠올려보려고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간에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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