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과 교회의 미묘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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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과 교회의 미묘한 관계
  • 도로시 데이
  • 승인 2022.12.26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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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24-영적인 조언자들-1

가톨릭일꾼이 생겨난 첫해에, 헤이즈 추기경은 그 당시 뉴욕의 성 아녜스 성당의 사목자인 취드윜 몬시뇰을 통해서 우리에게 한 메시지를 보냈다. 몬시뇰은 추기경이 우리의 일을 인증하였다고 말했다. 우리가 실수를 해온 것들은 이해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들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는 물론 실수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보는 대로 판단하고 진리를 표현하고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잘못을 하였다. 이 진리란 우리가 살고 있고 평신자로서 우리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하는 현세의 질서에 관한 진리를 의미한다. 나는 ‘신앙의 진리들’ 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닌데, 이 신앙의 진리는 믿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가 우리에게 주었기 때문에 받아들인다.

우리가 무염시태나 동정성모 몽소승천 교리와 같은 신앙의 진리들을 다룰 때는 교회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가 자본대 노동과 같은 현세의 질서에 관한 것에 이르게 될 때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오류가 없이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큰 차이가 있는 다양한 견해들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우리의 일과 진보적인 성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물론 위의 의미로서의 교회는 결코 우리에게 어떤 판단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주교와 대주교들을 포함하여 개별적인 교회 사람들은 때때로 어떤 때는 찬성하고 어떤 때는 반대하며 어떤 뚜렷한 관점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공식적으로 그들의 의견들을 내놓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징병을 거부하도록 촉구하는 글을 <가톨릭일꾼> 신문에 실었던 것에 대해 ‘정정하도록’ 요구받았던 사건을 이미 말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현세의 문제들에 관하여 교회사람들 사이에 나타나는 견해의 차이를 보면서 나는 신시내티의 맥 니콜라스 대주교가 전쟁의 전야에 만일 미국이 그 전쟁에 참가한다면, 양심적인 병역거부자들과 관련해 갈등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교구신문에 천명한 적이 있었다.

그는 양심적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우리의 첫 보호 시설에 300불을 주었으며, 죽기 바로 전에 우리에게 그의 강복을 보내주었다(그러나 그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과 평화에 관한 공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스페인 시민전쟁 동안에 우리가 취한 평화주의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그는 그의 교구에서 <가톨릭일꾼> 신문의 공적인 배포를 금지시켰다. 다만 그는 개인적으로 신문을 받아보는 사제들과 사람들에겐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문이 너무 도전적이라고 판단했다.

비슷한 일이 워체스터에서도 일어났는데, 그 당시 그 곳은 매사추세츠의 스프링필드 교구 소속이었다. 우리는 워체스터에 환대의 집이 있었는데, 그 쓰라린 시민전쟁 기간동안 사제들이 그곳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주교가 명하였다. 그리고 어떤 그룹이 로드 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서 환대의 집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주교는 그들을 단념시켰다.

우리는 결코 애덕의 일을 하는데에 허락을 요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환대의 집들과 공동 농장들은 항상 평신자의 활동으로서 우리 자신의 책임감에서 시작되었지, 일반적으로 교회의 지도를 받는 ‘가톨릭 액션’ 이 아니었다. 우리는 <가톨릭일꾼> 신문에 표현된 견해들에 대해 교구당국의 판단을 늘 요청할 필요는 없었다. 

가톨릭인들 사이의 논란은 우리의 평화주의에 대하여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노동 기구가 강철과 방직사업체들 분야에서 조직되기 시작하였을 때, 노동조합의 조직자들 중 몇몇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성직자들로부터 큰 반대가 있었다. 우리는 노동조합주의의 성장을 신문에 실었으며 그러자 신문발행부수가 스페인 시민전쟁이 발발했을 때처럼 급격히 떨어졌다.

한편 우리의 서류함들은 사회적 정의와 인종차별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던 때부터 함께 했던 사제들이 보내온 편지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지금 워싱턴 D.C에 주재하는 로마의 교종대사가 보내온 편지와 수표를 받았다.

어떤 특정한 성직자들과 우리의 관계는 매우 가까웠으며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서로 보완적이었다. 예수회원인 콘라드 하우저 신부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루 방문을 위해서 피터 모린 농장에 내려와서는 두 달간이나 머물렀다. 그가 도착한 아침은 화창하고 맑았는데 그래서 하우저 신부는 그곳을 너무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커피와 토스트로 두 번째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는 중국의 선교사였어요. 그런데 쫒겨났지요. 수주일 전 까지만 해도 나는 하이티에서 일했어요. 그리고 거기에서도 쫒겨났지요. 그곳의 힘있는 사람들이 나를 소환하라고 몬트리올에 있는 내 장상들에게 편지를 쓰며 요청하였지요. 나는 뉴욕에 잠시 들렀고 그래서 가톨릭일꾼을 방문한 것이지요. 나는 일꾼 신문을 중국과 하이티에서 읽었어요. 그리고 내가 당신들을 보지 않고 어떻게 그 세계의 일부가 되겠어요? 그리고 또한 나의 인디언들도 보고 싶었지요”라고 말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캐나다에서의 초기 소임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는 17세기에 성 이삭 죠그, 성 쟝 드 브레베프와 기타 많은 다른 사람들을 잔혹한 고문으로 순교하게 한 이로코아족을 위한 성 로렌스 인디언 선교회에 배치되었었다. 이제 20세기에 이로코아족은 고도의 숙련된 강철 노동자들이며 우리는 뉴욕시에 떠오르는 새로운 고층 건물들의 대들보 위로 그들이 기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훈련된 음악가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자신의 말로 그레고리안 성가를 가르쳤어요. 나는 그들 대부분이 부룩클린에 산다고 들었지요. 나는 그들을 너무도 찾고 싶어요”라고 하우저 신부는 말하였다.

우리 일꾼들중 한 사람이 부룩클린 까지 그를 데리고 갔지만 결실이 없었다. 본당 신부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들은 거대한 도시의 몇몇 본당들 구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본당들에는 만 오천 내지는 이 만명 가량의 신자들이 있었다. 하우저 신부는 사순절 동안 우리와 함께 머물겠다고 결정하였다. 그는 농장을 사랑했으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오랫동안 순명의 인생을 살았던 그가 장상들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농장에 남아서 우리를 위해 매일 미사를 드리겠다고 갑자기 공표하였다.

자연히 몬트리올의 그의 장상은 이 특별한 행동에 호기심이 일었고 우리를 방문하도록 부관구장과 동료 한사람을 스테튼 아일랜드로 보냈다. 나는 항상(하느님께 큰 감사의 마음으로) 긴 식당에 있는 식탁 앞 쪽에 세 명의 예수 회원들이 앉아 있었던 그날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약 20명 쯤 되는 우리의 식구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농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몇몇 노인들과 수줍은 타는 사람들, 수다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으며 식탁의 먼 다른 끝에는 ‘부랑자’ 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한 젊은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긴 검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며, 꽉 끼는 검은 색 투우용 바지와 남자용 흰 셔츠를 입고서 무릎에 아기를 앉고있었다. 농장의 젊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 그녀의 상황에 대하여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그녀에게 매달리고 기다리는 것을 보면서 몹시 놀랐기에 세 명의 사제들도 잊은채 그녀에게 빠져있었다.

그러나 고맙게도 세 명의 예수회원들은 “눈은 있으나 볼 수 없었으며,” 만약 알았다 해도 그들은 이해하였다. “온전한 이들은 의사가 필요치 않으나 아픈 사람에겐 필요하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으며 더군다나 그들의 수도원 이름이 ‘예수’ 의 이름을 따라 지어 졌으니. 나는 그들의 짧은 방문 동안에 하우저 신부가 조금 이상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겠다. 그는 이상하게도 쾌활하고 활동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그와 다른 두 명의 예수 회원들을 그날 오후에 해변으로 데리고 갔다. 날씨는 얼음이 얼 정도로 차가웠지만, 하우저 신부는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지고는 잔잔하지만 얼음이 언 차가운 만을 걸어서 건너갔다.

두 명의 공식적인 방문자들이 몬트리올로 돌아간지 얼마되지 않아서 나는 장상에게서 미묘하고도 거의 자신없는 듯한 편지를 받았다. 나는 하우저 신부가 매우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그렇다, 그는 머물 수 있는 허락을 얻을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를 설득해서 치료를 받도록 해야 했을까? 그들은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세계에 대한 그의 감정들에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몬트리올에서 저술가이자 음악가이며 정신과 의사인 칼스턴 박사가 일주일 후에 우리를 보러 올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하우저 신부와 대화해 주길 부탁하였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사제들 중의 한 분이지요. 그런데 조금 피곤한가 봅니다”라고 그는 후에 내게 말하였다.

그리고 선교사 생활 내내 혹독함을 겪은 후에 누가 피곤해지지 않겠는가? 그의 나이는 알지 못했지만 70세쯤은 되었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한 그의 일상적인 일은 7시 미사였는데, 노래하길 좋아했음으로 우리는 노래 미사를 하였다. 그는 미사 중에 우리의 부족한 노래 실력을 최대한 참아 주었다. 때때로 그는 미사 전례 중에 우리에게 즉흥적으로 열심히 기도를 통역해 준다. 한번은 요한 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를 읽으면서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그의 뺨에 눈물이 흐른 적도 있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려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라며 기쁨에 차서 외쳤다. 식사 때에는 늘 작은 모임이 이루어지곤 했으나,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흥이 났기에 아무도 설교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해의 성주간은 장엄함과 기쁨이 함께 있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서 하우저 신부는 몬트리올에서 피정 지도를 하기 위하여 돌아가야만 하였다. 우리는 그가 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우저 신부는 어느날 아침 미사후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마치도 하우저 신부는 자신에게 지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선교사로서 우리 그룹에게 자신의 마지막 선물-참으로 소중한 선물-을 주었던 것 같았다.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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