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돈, 교회의 스캔들을 넘어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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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돈, 교회의 스캔들을 넘어서는 법
  • 이연학
  • 승인 2022.11.08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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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스캔들

나는 아직도 종종 놀라고 걸려 넘어진다. 세상과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놀라고, 존경하던 이가 그 빛과 함께 거느렸던 그늘에 걸려 넘어진다. 재작년, 깊이 존경해 오던 어떤 분의 경우가 그랬다. 생전의 성추행이 피해자들을 통해 사후에 알려졌다. 가까운 지인도 이 일에 마음을 깊이 다쳤다. 이럴 때 우리는 그만 사람에 대한 희망을 내려놓고 싶은 유혹에 빠지곤 한다. ‘스캔들’이란 주제에 대해서는 그즈음 제법 긴 기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성(性)과 돈

예나 지금이나 흔한 것이 성(性)과 관련된 스캔들이다. 앞서 언급한 이나, 근자에 교회를 곤혹스럽게 하는 성직자의 아동 성 추문이 그런 경우다.

교회 안팎을 막론하고 영적 지도자들의 성 추문이 심각한 것은, 흔히 영성이나 거룩함의 이름으로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약자’로 만드는 영적 권위는 개인의 허접한 욕망 추구에 예나 이제나 효과적이다. 이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으로 돈과 관련된 스캔들이 있다.

‘성 추문’이 주로 개인적인 영역에 머문다면, ‘돈 추문’은 공동체와도 곧잘 관련된다. 예컨대 수도회든 교구든, 교회 사업체가 어느 지점까지 복음적인지에 대한 고민은 오늘도 많은 교회 구성원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다. 교황께서도 자주 강조하시는, ‘가난한 교회’의 문제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부유한 구성원들이 ‘주님의 만찬’에서 다른 형제들을 기다리지 않고 제각기 싸 온 음식을 먼저 먹었을 때 깊이 마음을 다쳤다. 그것은 ‘주님의 만찬’(kyriakon deipnon)은커녕 부자들끼리 즐기는 ‘자기의 만찬’(idion deipnon)으로,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짓이라며 혹독히 나무랐다(1코린 11,20-22 참조).

재력이나 사회 계층(또는 사는 지역)을 기준으로 소속감이 달라지고 마치 서로 다른 세상에 살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면, 바오로 사도는 오늘도 틀림없이 걸려 넘어지리라. 기실 사람들 통상의 예배 방식이 하느님께는 늘 걸림돌이었고,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 또한 사람들을 늘 걸려 넘어지게 했다(아모 5,21-24; 호세 6,6; 미카 6,6-8; 예레 7,5-7; 이사 1,11-17; 58,6-8 등 참조).

권력과 성공

첫 번째 수난 예고를 들은 베드로의 반응은 “예수님을 … 반박”하는(마르 8,32)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사탄’이요 ‘걸림돌’(=스캔들)이라 부르신다(마태 16,23 참조).

따지고 보면 둘 다 서로에게 걸림돌이었을 터! 야고보와 요한이 수난 직전의 주님께 장차 높은 자리를 하나씩 달라고 ‘청탁’하는 장면도 뺄 수 없다(마르 10,35-45 참조).

실로 성경은 암만 가르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특히 제자들!)이 주님께 초래하는 스캔들로 가득하다. 몇 년 전 교황께서는 각국 교황 대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교 선임과 관련하여 예로부터 교회에 전해 오는 라틴 격언(‘Volentes nolumus’)을 인용하신 적이 있다. “(높은 자리를) 바라는 사람들을 (교회는) 바라지 않는다.” 정도로 풀면 된다.

주님께서는 얼마나 오래전부터 신심 깊은 야심가들에게 시달려 오신 것일까. 그러나 힘과 영광을 탐하는 마음 또한 위험하기로는 개인 수준보다 교회 수준에서 더하리라.

헨리 나우웬 신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의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는 교회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정치-군사-경제적 권력의 유혹에 굴복했다는 점이라고 썼다.

“교회의 고통스러운 오랜 역사 또한 사랑보다 권력을, 십자가보다 통솔을, 인도되기보다는 인도하는 것을 선택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은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 유혹을 끝까지 이겨 내고 우리에게 희망을 준 사람들이 진짜 성인들입니다”(한현 역, 「참사람되어」2001년 1월 호 별책, 38쪽).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개인적 신심의 영역에 갇힌) 신앙과 복음적 시민 생활의 괴리 현상과 교회 분열 같은 구조적 문제도(사목 헌장, 43; 81항 참조) ‘추문’이라 호명했다. 스캔들이란 개인 윤리 영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의 문화‧사회‧정치‧경제 전 영역과 교회가 맺는 관계가 모두 추문의 영역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신앙 유무와도 별 상관없이 어디서든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가짜 뉴스’ 현상과 그 원인이라 할 뿌리 깊은 ‘확증 편향’ 또한 치명적인 스캔들이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 또한 “유다인의 왕이라 자처했다.”는 가짜 뉴스의 희생자가 아닌가!(정현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예수도 가짜 뉴스의 희생자였다’ 참조)

사람의 추문과 복음의 걸림돌

‘추문’(醜聞)이란 한자어보다 ‘스캔들’이란 외래어를 선호한 이유는, ‘걸림돌’이란 성경 원어(skandalon)의 뉘앙스를 잘 살리기 때문이다. 인생은 여기저기서 터지는 스캔들로 가득하다. 곰곰 생각하면 인생 자체가 스캔들인 듯도 싶다. 인간은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하다는 것을 나이 들면서 통감한다.

어떤 깊은 수준에서는, 하느님께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이, 그리하여 자신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이 뉘 있으랴! 그러나 놀랍게도 이렇게 걸려 넘어진 바로 이 자리에서만 비로소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도 절감한다.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복음은 기실 전대미문의 걸림돌이었다(1코린 1,23 참조). 사람의 추문을 궁극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윤리적 질타나 개선의 노력이라기보다 궁극에는 십자가의 말씀, 그 어처구니없는 ‘자비의 추문’뿐이다. 걸림돌에 넘어져 찢긴 상처, 그 틈을 통해서만 근원적 치유의 빛이 들어온다.

물론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 17,2)는 말씀도 늘 덧붙여야 한다. 자비의 걸림돌은 가해자의 합리화나 그에 대한 손쉬운 용서 설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제는 어떤 얘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아.”

오래전, 지금은 돌아가신 어느 수도회 할아버지 신부님께 들은 말씀이 지금껏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뿐 아니라 복음적 자비 체험에서 솟는 어떤 달관 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나도 조금씩 덜 놀라며 살고 싶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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