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자기 얼굴 아니라 그리스도 얼굴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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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자기 얼굴 아니라 그리스도 얼굴 찾아야
  • 이연학 칼럼
  • 승인 2022.09.2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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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정체성 2: 수도자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여러 차례 언급하셨듯이, 서구에서 ‘그리스도교 세계’(Christendom)
는 진작 끝났다. 원치 않았지만 교회가 이렇게 제 출발점, 곧 세상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 또는 변두리에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면 과연 교회 정체성과 관련해서 위기나 재앙이기만 할까. 오히려 교회 쇄신과 새 복음화를 위한 축복이지 않을까. 

주인공으로서의 강력하고 선명한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일은 진정한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필수 조건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또는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루카 17,33)라는 예수님 말씀으로 보자면, 잃어야 얻는 게 참정체성이 아닐까. 하느님께서 먼저 신적 정체성을 짐짓 잃어버리시고 사람이 되셨거늘!(필리 2,6-7 참조)

 

수도자 정체성

수도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오랜 시기 ‘완덕의 단체’(Istituti della perfezione)라 불렸다. 좀 과장하자면 수도자들은 ‘준비된 성인’ 후보군으로 평신도와 달리 가난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이른바 ‘복음적 권고’를 수용하며 성덕의 길에 전폭적으로 바쳐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공의회를 기점으로 그런 이해는 많이 변했다.

결정적인 것이 “성화 성소의 보편성”에 관한 교회 헌장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 예수님께서는 친히 거룩한 생활의 창시자요, 완성자로서 당신의 모든 제자에게 어떠한 신분이든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활의 성화를 가르치셨다”(「인류의 빛」, 40항).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덕과 자기 신분의 완성을 추구하도록 권유받으며, 또 그러할 의무가 있다”(42항). 

이런 가르침은 새 교리서에 다음과 같이 짧게 요약된다.
“모두가 성덕의 소명을 받았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013항).
사실 신학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축성 생활’은 수도자들만이 아니라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메시아)는 “기름부음받으신 분”, 곧 “축성되신 분”이란 뜻이고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christianoi) 모두가 그분과 함께 축성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이 공의회 이후 수도자들이 겪은 ‘정체성 위기’의 핵심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배려라도 하는 듯 공의회 문헌이나 이후의 교회 문헌에서 더러 수도자들을 두고 “더”라는 말을 덧붙여서 차별화하기도 했지만(수도 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 1.5항 등), 축성이든 예수님 추종이든 신학적으로 ‘더’나 ‘덜’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세례받은 모든 이, 특히 평신도의 정체성이 이처럼 선명히 확립된 것은 교회 전체에 크나큰 축복이다. 이를 수도자 편에서 자기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위험인 양 느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수도자에게도 큰 복이다. 제 정체성을 복음적으로 재발견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반복하지만 수도자 또한 근원적으로는 거룩함이나 예수님 추종에서 다른 교회 구성원보다 “더 나을” 게 없는 그리스도인일 따름이다(E. Bianchi, Non siamo migliori, 2002 참조). 

수도자에게 ‘더’란 수식을 덧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표징’과 관련해서다. 수도자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이란 측면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표징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흔히 ‘복음적 권고’(또는 ‘복음삼덕’)라 불리는 순명과 정결 그리고 청빈을 통해서라기보다(이 모두는 근원적으론 세례받은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 ‘독신’을 통해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가능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겨우 그것뿐이냐고? 글쎄, 그게 ‘겨우’가 아닌 것이, 수도(승) 생활의 본질은 본디 ‘단순함’(simplicitas)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수도 생활의 정체성은 이 단순함만으로 넘치도록 내용이 찬다고 본다. 수도자에 대한 ‘더’ 강력하고 선명한 정체의 추구는 오히려 수도자를, 세상 여타 집단과 다를 바 없이 만들어 버리는 게 아닐까. 

개별 수도회 정체성

한편, 공의회 이후 수도회 세계 내부에서는 이른바 ‘고유 카리스마’를 찾고 강조하는 작업이 활발히 벌어졌다. 개별 수도회 각자의 선명한 얼굴 찾기 작업이 그렇게 시작되었고 지금도 한창이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양날의 칼이다. 자기 수도회의 고유성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지나치게 부족하면 자존감의 상실로 이어지고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그게 과하면 우스운(심지어 무서운!) 모양새가 될 수 있다. 

이른바 ‘고유 카리스마’와 이데올로기는 서로 간발의 차이뿐인 아슬아슬한 관계에 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진출이나 창설 몇 십(백)주년 행사를 치르는 현장에서, 해당 수도회가 참석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 수도회가 이처럼 훌륭하고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인 경우가 있다. 이런 유의 자기 홍보가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역사 날조’ 또는 왜곡의 경우도 드물지만은 않다. 사실상 비슷한 성격의 수도회들 사이에서 ‘고유 정체성’을 어떻게라도 만들어 내려는 노력은 애틋하기도 안쓰럽기도 하다.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매력적인 외모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무어 크게 다르랴. ‘뼈대 있는 집안’이란 과한 자부심은 우스꽝스러운 교만에 근접하고, 반대의 경우는 걱정스러운 우울증에 다가간다. 

수도자 일반과 교회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의 경우에서처럼 여기서도 복수로서의 ‘정체성들’이 아닌 단수로서의 정체성, 더 근원적이고 단순한 수도자 정체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르심을 듣는다. 무슨무슨 수도회원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저 수도자란 정체성이고, 수도자란 정체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저 그리스도인 또는 제자라는 정체성이다. 이 ‘최상위’ 정체성은 각자의 고유 정체성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훨씬 선명하고 힘 있게 한다.

선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교회가 너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교회 공동체의 주된 관심사는 자기 얼굴이 아니라 자기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분의 얼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거울을 안 봐도 곤란하지만, 거울만 바라보며 얼굴 단장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 향기롭고 매력적일 리 없다. ‘큰바위얼굴’을 날마다 바라보고 그리워하던 어니스트처럼 우리도 스승이요 주님이신 분의 얼굴을 더 간절한 그리움으로 찾고 쳐다볼 일이다. 그러면, 얼굴은 생긴다, 만들지 않아도.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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