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혀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얹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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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혀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얹혀 있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5.10 1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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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 김동규, 사무사책방, 2022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 두 가지 있다고 했다. 들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정작 들꽃이 피고 사람이 오면 우리는 말을 잇지 못한다. 들꽃과 사람을 보는 일만으로 가슴이 벅차기 때문이다. 필시 시인이 분명한 이 사람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기에 희망의 사람이다. 희망이 불가능한 현실이 전복되길 바라는 것이라면, 그는 혁명적 시인일 것이다.

김동규의 <사람이 온다>(사무사책방, 2022)를 읽었다. 프로필을 보니, 그이는 시인이 아니었고, 카피라이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학에서 광고를 가르치고 있는데, 페이스북에서 이따금 그의 정치적 언설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게서 프로파간다의 냄새가 난 이유가 있었구나, 생각한다.

이 책은 표지가 내용을 압도하고, 산문은 켜켜이 쌓인 사람의 땀내가 나고, 그 사이사이 향긋한 들꽃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기꺼이 필자에게 표지로 들어갈 그림을 허락했다는 임옥상 화가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이참에 드리고 싶다. <우리시대의 풍경-달동네>, 화면을 가득채운 다닥다닥 판잣집은 어둠에 깊이 잠긴 채, 그래도 노랗게 빛나는 백열등의 전깃불이 따뜻하다. 거대한 무덤 같은 달동네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어두워서 오히려 편안한 사람의 마을이다. 그 너머로 필시 형광등이거나 LED가 분명한 빌딩숲은 죽어야 건너갈 수 있는 저승처럼 숲을 이루고 있지만, 그곳엔 인기척도 들꽃향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새벽녘, 착검한 소총 뒤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2009년 봄, 노무현이 꽃처럼 지면서, 김동규는 세상을 향해 글을 써야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종이신문과 인터넷언론에 칼럼을 썼고, 블로그와 페이스북에도 생각을 올렸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참극을 바라보면서 글쓰기만으론 안 되겠고, 뭐든 개혁적 지식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려고 애를 써 왔다. 그에게 세상은 곧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사람이 살면 집(주택住宅)이 되고, 비인간이 살면 무덤(유택幽宅)이 된다. 그 사람들이 거룩하면 성지(聖地)가 되고, 그 사람들이 저속하면 지옥(地獄)이 된다. 항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다.

김동규가 경험한 그분은 가장 참혹한 순간에 찾아왔다. 1980년 2월 말,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내고 대구로 돌아왔을 때였다. 대구에서도 5월에 전두환 신군부의 군사반란과 비상계엄에 저항하는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5월 14일 낮 2시경 창문을 열어놓고 공부를 하다가 큰길에서 최루탄 터지는 소리, 청년들의 다급한 발소리를 듣고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덮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경북대 농성장이었고, 이튿날 대구역에서, 반월당 네거리에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독재 타도! 계엄철폐!” 골목에선 시위대와 뒤 따라 들어온 전경이 뒤엉켜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전경 대여섯 명이 여학생 하나를 짓밟고 있었다. 그녀였다, 연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던.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고, 도망가다 돌아서서 검은색 방호복 전경의 등짝을 향해 온몸을 날렸다. 그날로 터진 입술과 멍든 얼굴로 잡혀간 곳은 남부경찰서였다. 그녀도 그곳에 있었다. 그녀에게 “너는 그냥 골목길을 지나다가 대열에 휩쓸렸다고 얘기하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이날 그는 경찰서에서 M16소총에 착검한 군인들에게 넘겨지면서, 곤봉 세례를 받으며 하수구 시멘트 바닥을 기어야 했다. 보안대에서 심문을 받는 동안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밥을 먹고, 새벽에 깨어나 잠들 때까지 가혹한 육체적 압박이 가해졌다. 그때 그분이 찾아왔다.

“그러한 어느날 새벽. 악몽에 시달리다가 더러운 매트리스 위에서 잠이 깨었다. 동이 휘뿌윰하게 터오고 있었다. 바람이 사정없이 실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바라크 주위에는 오래된 포풀러나무들이 둘러서 있었다. 높고 기름한 나무의 가지 위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새소리였다.이름을 알 수 없는 새 한 마리가 맑고 슬픈 소리로 울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겪은 참혹한 세상에서 그분을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난데없이 그분이 이 상황 속으로 들어오셨다고 김동규는 기억한다. 영혼의 빛을 꺼버릴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찾기란 어렵다. <이것이 인간인가>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 화학자이자 작가로서, 나치하에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그는 지옥을 뚫고 기적적으로 생존했지만,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현실을 허락한 신에게 절망한 나머지 1987년 끝내 자살했다. 김동규는 자신이 1980년 5월에 겪은 충격이 그러했다고 고백한다. 보안대에서 풀려나온 뒤에도 절망감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부정했어도 겨자씨만큼은 신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짜부라지듯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절망과 허무가 차지했다. 이러할 때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세상을 잊기 위해 세상을 탐닉하고, 밑바닥까지 스스로를 소진하는 일뿐이었다.”

김동규는 절망의 밤길을 걷고 있을 때 다시금 그분을 만났다. 산골짜기에 있는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선배를 찾아가다 막차를 놓쳐 밤길을 걷다가 올려다 본 하늘 때문이었다. 은하수 때문이었다. “저 많은 은하들이 어떻게 한 치의 충돌도 없이 제 갈 길을 가면서 완벽하게 우주를 구성하는 것인가?” 물었다. 저 하늘과 별과 우주를 만들고 움직이는 누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수백만의 별들이 무슨 생명을 얻은 듯 기우뚱 기울어지더니, 파도처럼 일제히 내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김동규는 고백한다.

그는 하느님을 “허물어지고 허물어져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이 끝난 자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처절한 고백이 나오는 자리에만 오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김동규는 바닥에서만 하늘을 볼 수 있다고 강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절망을 동반하지 않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 무덤에서 만난 변방의 혁명가들

김동규가 꿈꾸었던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당연하다. 영영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불가능한 미래를 희망하는 일은 더욱 거룩한 과업이 된다. <사람이 온다>는 책의 말미에 평생 혁명을 꿈꾸었으나 혁명을 만나지 못한 망명객 마르크스의 무덤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마르크스 무덤을 찾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미리 하이게이트 묘지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 런던 지하철 노든라인의 하이 바넷 지선을 타고 올라가면 2존과 3존 경계에 아치웨이 역이 있다. 역에서 나와 언덕을 쭉 걸어 올라가면 묘지가 나온단다.”

10.26과 5.18을 겪으며 20대를 통과한 세대에게 “이 유대 혈통의 혁명가 이름은 마음에 새겨진 하나의 화인이었다”고 고백하는 김동규에게 마르크스는 “아득한 옛사랑의 그림자”였다. 그러니 런던에 찾아와서 마르크스를 만나러 가는 발길은 “아픔이라고도 서글픔이라고도 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뒤엉킨 감정을 던지는 것”이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친구 무덤에 꽃 들고 찾아가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대리석 좌대 위에 놓인 마르크스의 두상 아래 <공산당 선언>의 유명한 구절이 적혀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 아래쪽에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인용한 “철학자들은 단지 세상을 이모저모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ways; the point is to change it)

마르크스의 무덤가에서 정작 김동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혁명운동가들의 묘비와 그곳에 새겨진 문장들이었다. 마르크스 묘비에서 2미터도 안 떨어진 곳에 트리니다드 토바고 출신의 여성운동가가 ‘아버지’ 곁에 묻힌 딸처럼 잠들어 있다. 좁은 길을 건너면 쿠르드 공산당 창시자를 비롯한 혁명가들의 묘비가 즐비하다. 어떤 것은 아랍어로 새겨져 뜻을 알 수 없었다. 여기서 김동규는 생각에 잠긴다.

“‘나 죽으면 마르크스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본인의 유언을 따랐던 것일까. 아니면 동지들 뜻을 모아 이곳에 영원의 몸을 뉘게 한 것일까. 상세한 내력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모국의 정치적 환경을 생각해 볼 때 대부분이 세상을 떠날 당시 정치적 박해를 피해 런던에 망명 중이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들이 죽어서까지 가까이에 묻히기를 원했던, 사상의 아버지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이듬해인 1849년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 발생한 혁명이 진압되면서, 독일 쾰른에서 추방되어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겪은 경제적 어려움은 대단했다. 런던의 낙후된 주택에 살면서, 질병에 시달리고, 6명의 자식 가운데 3명이 죽는 참담함을 견뎌야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도움을 받으며 34년 동안 런던에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곳 망명지에서 1867년에 출판된 책이 <자본론>이다. 결국 김동규는 마르크스처럼 망명객이 되어 런던을 떠돌다 죽은 제3세계 변방의 혁명가들을 만나기 위해 런던에 찾아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 속에서 우울한 대한민국의 혁명가들도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묘지 한 귀퉁이에 앉아 그들이 걸어갔을 인생을 떠올려 본다. 아프고 쓰라렸던 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생애를 던진 목표가 살아생전 달성되리라는 희망은 까마득했을 슬픈 망명자의 삶. 이들의 평생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지.”

나무그늘 사이로 누군가의 노래인 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그곳에서 김동규는 “살았고 싸웠고 죽어간 이들을 애도하는 성호를 그었다.” 이런 것을 두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아직 성취되지 않은 혁명은 ‘기다림’을 동반하기에 아름답고, 어쩌면 아직 성취되지 않았기에 다행이다. 중요한 것은 혁명 자체보다 혁명을 갈망하는 자의 목마름이겠다. 그 목마름이 자신을 혁명적으로 다그친다. 내 삶의 초점을 ‘나’에서 ‘너’에게로 옮기라고 재촉한다. 내 사랑의 확장을 요구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형제애’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인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하는 동안에 정작 구원받는 것은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우리 몸이 가벼워져야 천국에 다가서기 때문이다. 결국 김동규는 <사람이 온다>라는 책에서 내가 사랑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이 곧 ‘나’임을 확인하라고 다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오.
이 들판을 누볐다오.
내 발등에는 흙이,
내 혀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얹혀 있다오.
(자카리아 무함마드)

 

* 이 글은 <공동선> 2022년 5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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