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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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12.13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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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36

황톳길

-김지하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밤마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대숲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 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든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 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며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저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하자, 유다인들이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하고 말하였다.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하고 되물으셨다.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하고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28-28) 

70년대의 시인과 혁명가, 김지하

김지하(프란치스코)는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목포중학교, 강원도 원주중학교, 서울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재학중 한일회담 반대투쟁 과정에서 있었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발표하고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후 그는 1969년 《시인》이라는 잡지에 <서울길>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때부터 ‘김영일’이라는 이름 대신에 ‘김지하’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1970년 4월 《사상계》에 <오적(五賊)>이라는 시를 발표한 것이 반공법 위반으로 걸려 구속되었으며 얼마 후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72년 3월 19일 《가톨릭시보》에 신춘수상 <경칩>을 게재하여 문제가 되었다. 그해에 접어들어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3월 29일 보안사령부는 1972년 교회잡지인 《창조》 5월호에 실린 시 <비어(輩語)>를 다시 문제 삼아 김지하를 입건하였다. 정부는 8월 3일 ‘8·3조치’를 발표하여 영세민에게 불리한 조치를 취하고, 10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헌정을 중단시키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11월 21일에는 ‘유신 헌법’을 만들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한편 김지하는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발표하자 1973년 11월 5일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민주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문’을 많은 민주인사와 더불어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1974년 전남 흑산도에서 체포되었는데, 비상군법회의는 김지하에게 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7월 20일 국방부 장관의 형 확인 과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75년 2월 15일 형 집행정지 처분으로 출감하였다. 당국은 형 집행정지 처분으로 김지하를 일시 석방하였으나 그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고행, 1974년>의 내용과 작품구상을 위해 메모해 두었던 이른바 ‘옥중 메모(장일담, 말뚝)’에 반공법을 적용하여 재투옥하고 인혁당 사건과 연루시켰다.

옥중 메모에서 김지하는 간절히 기도했다.

“몇 달이 계속되는 똑같은 기구를 하느님이시여, 실현시켜 주소서. 내 마음의 칼을 예리하게 하여 주소서. 통곡 속에 가슴이 찢어질망정 끊고 아득히 싸움터로 나가게 하소서. 고통뿐인 외로운 피투성이의 싸움의 길, 헐벗은 민주혁명으로서의 독한 삶의 길만이 나를 구원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만이 나의 시는 핏빛을 얻고 통곡과 해방에서 진실된 절규가 되나니 부디 나를 그 고통의 길로 가게 하소서. 애착을 끊어버리게 도와주소서. 일그러지고 병든 육신이 되어 어느 거리에선가 쓰러지리라. 그러나 내 가슴엔 한 편의 맑은 시를 품게 하소서. 내가 찾아 헤매는 것은 안락이 아니며 행복이 아닙니다. 진리의 불기둥이며, 산맥을 뒤엎는 폭풍이며, 파도입니다. 그로부터 태어날 ‘대지의 시’ 한 편 내 육신을 제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나의 생은 성공입니다. 밑바닥에서만 저는 행복합니다. 고통 속에서만이 저는 평화롭습니다. 외로움 속에서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향한 손길이 뻗어가고 피투성이 싸움 속에서만이 참된 자비의 미소가 피어오릅니다. 아아! 나를 떠나 보내주십시오. 나를 저 소시민적인 안락의 작은 꽃무덤 속으로, 마취 속으로 끌어들이는 유혹으로부터 끊어버리도록 도와주십시오. 끊어버리고 미칠 듯이 아픈 각성의 저 매운 겨울 새벽의 별빛 찬 벌판으로 보내주십시오. 홀로 기도하고 결단하고 대중 속의 밑바닥에서 오직 이들과 더불어 상처받고, 오직 그들과 더불어 썩어 문드러지고, 그리하여 끝끝내 그들과 더불어 서로 머리를 곧추세우고 붉은 아침의 저 대지 위에 꿋꿋이 솟구쳐 오르도록 하여주십시오.”

 

예수냐 마르크스냐

사형선고를 받은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위해 하마오(相馬) 주교의 이름으로 일본천주교회 정의평화위원회가 제일 먼저 1974년 7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 전세계 교회를 향하여 탄원하였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가 김지하와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하고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현 정부를 타도하려고 획책했다는 조목으로 구속되면서, 한국천주교회는 김지하 사건에 대한 구체적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을 계기로 발족한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김지하의 석방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1975년 3월 21일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우리 교우 김지하 시인은 또다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냐 아니냐가 김지하 시인의 구속 사유였습니다. 우리는 김지하 시인이 조속히 석방되어 천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때 권력에 의하여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에서 인혁당 관계 사건에 대한 흑백이 명명백백히 밝혀질 것을 촉구”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인천교구 최기복 신부는 <예수냐, 마르크스냐>라는 글을 통하여 김지하의 저항의식을 박해받는 순교성인들과 견주었다.

“재판정은 마치 천주교 포교론장과 같다. 한마디로 ‘예수냐 마르크스냐’ 하는 재판이다. 피고의 해박한 문학적·신학적 지식에 누구나 혀를 차며 더욱 불굴의 신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정에서 그의 태도는 너무나 떳떳하고 밝고 명랑하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로마 14,22)는 말씀대로이다. 또한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실감난다. 종종 우리의 선조 순교자들의 재판 광경이 연상된다.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나라에 사신다면 무슨 죄목으로 처형되실까 생각해본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시인 김지하가 법정에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가톨릭의 ‘해방신학’의 입장에서 학대받는 자들의 해방을 원한 데 지나지 않는다.”라고 반론하자,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김지하 신앙 보증운동’이 일어났다. 일본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그의 ‘양심선언’ 등에 나타난 사상의 신학적 감정을 예수회 상지대학 신학교수 니콜라스 신부 등에 의뢰하는 한편, 김지하의 신앙보증을 위해 국제적으로 신학자들의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구미와 제3세계에 걸친 15개국의 200여 명이 호응하였으며, 김지하가 ‘양심선언’에 인용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메츠와 몰트만도 가담하였다. 일본에서는 하마오 주교(동경)를 위시한 성직자 54명이 서명하여 1974년 12월 29일에 기자회견에 공표하였다.

한편 예수회 이한택 신부는 ‘옥중 메모’에 관한 감정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김지하는 그의 메모와 진술에서 해방신학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해방신학이란 ‘현재의 불의를 타파하고 하나의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여 지금 탄압받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네 운명의 주인공이 되게 하려는 신학의 한 조류’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이 현대신학의 주류로 되어가고 있음은 물론이다. 즉 크리스천은 자기의 형제, 특별히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위해서 산다는 것, 철저히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세적 투신이 불가피하며 그 속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지하의 신학적 배경이 이러한 해방신학에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김지하의 모든 메모 또는 행위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에서 한 치도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철저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는 그 사회에 대한 진단과 인식이 요청되는데 그를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과 비판방법을 채용하고 그것을 기초로 사회 정의, 이웃 사랑의 실천에서 나자렛 예수의 활동 모범이 채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무신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그리스도교가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1978년 3월 ‘김지하 구출위원회’가 결성되고, 김지하 수감 3주년을 기념하는 특별미사와 기도회가 있었다. 이날은 평소 그를 아끼던 문인·친지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와 신자 300여 명이 모였다. 사제단의 합동미사에서 안승길 신부는 “진정한 민주투쟁의 불꽃 속에 살고 있는 그는 비록 감옥에 있지만 그의 영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가 버림받고 억눌린 이웃을 위해 투신했던 모습은 본연의 크리스천의 자세이며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인권을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는 현대의 순교자이다. 또한 그의 투철하고 강인한 복음정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불러오고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김지하 구출위원회’는 1978년 12월 22일 서울 동대문성당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한 것을 필두로 하여, 1979년 1월 원주와 전주, 2월에는 인천·대구·광주·목포·마산·부산 등 16개 도시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다. 여기서는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유명한 시가 낭송되었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도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며, 급기야 1975년 6월에 ‘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이라고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김지하에게 수여하며 “한 시인으로서, 가톨릭 신자로서, 그리고 그대의 시를 통해 민주주의와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싸움에 강력한 지지를 표명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해 왔다.

또한 정의평화위원회는 “바야흐로 민주주의가 성취 발전되려하는 이 역사적 단계에서 시인 김지하도 세계를 향해 내세울 수 있는 ‘민주 한국의 자랑’이다. 그를 감옥에 가둔 채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주의 새 정부를 세우기에 분주해야 한다는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정직하지 못하다.”라고 천명하였다.

너희의 법대로 처리하라

빌라도는 정직하기는커녕 교활하고도 잔인한 총독이었다. 26년에 총독으로 취임한 빌라도는 카야파를 대사제로 다시 임명하고, 헤로데가 죽은 뒤에 계속된 유다 땅의 소요를 휘어잡기로 마음먹었다. 빌라도의 실험은 대단했다. 밤에 몰래 카이사르의 형상이 그려진 군기를 예루살렘에 들여왔다. 이튿날 유다인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율법이 짓밟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시 빌라도에게 찾아가 군기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유다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도록 꼬박 닷새 밤낮을 간청하였다. 다음날 빌라도는 이들을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고 카이사르의 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러자 유다인들은 일치된 동작으로 땅에 엎드려 목을 길게 빼고 율법을 지키겠노라 항변했다. 이를 보고 기가 질린 빌라도는 그 군기들을 즉각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빌라도는 수로 공사를 하면서 ‘코르반’이라는 이방신의 제물을 사용하였다. 예상한 대로 분개한 유다인들이 빌라도의 법정을 에워싸고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빌라도는 미리 군중 사이에 들여보낸 병사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때리도록 지시하였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맞아 죽고, 어떤 사람들은 저마다 도망치다가 떠밀리고 밟혀 죽었다. 그후 유다인들은 희생자들의 처참한 광경을 보고 잠잠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집에서 빌라도에게 데려갔을 때 유다인들 사이의 종교적 문제에 끼어드는 것을 꺼리다가, 곧 이어 법에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님이 소요를 일으킬 불순분자인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빌라도는 한 가지 질문만을 반복해서 묻는다. “아무튼 네가 왕이냐?”(요한 18,33.37) 언제나 지배자의 관심사는 권력에 도전하는 자를 색출해내고, 갖은 이유를 들어 그의 목을 매다는 일이다. 오죽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지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겠는가? 이런 속셈을 꼼꼼히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해줄 수 있는 말씀은 오로지 이것뿐이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18,37)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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