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닭이 울기 전에 깨달은 눈물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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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닭이 울기 전에 깨달은 눈물과 사랑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11.2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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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34

부패의 힘

-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하자, 베드로가 “나는 아니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하고 물었다. 베드로는 “나는 아니오.” 하며 부인하였다.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요한 18,12-18. 25-27)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신 지 겨우 3년, 그간에 세상의 모든 권세 있는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원망을 많이도 받으신 모양이다. 급기야 유다의 지도급 인사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세상에서 격리시키기로 작정하였다. 이 길은 예수님이 이미 예감하고 계셨던 일이었으며, 이 수난은 예언자의 길 끝에 언제나 마련되어 있었던 결과였다. 그러나 죽음을 통하여 부활이 온다는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당황하였고, 저마다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마저 예수님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결국 전직 제사장 한나스의 집에서 서성거리던 베드로는 첫닭이 울기 전에 “당신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오?”라는 질문을 받고 세 번이나 “아니오.”라고 답변함으로써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첫 제자가 되었다.

만일 그가 다른 제자들처럼 도망쳤다면 예수님을 배신하는 죄는 짓지 않았을 텐데, 그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배신의 위험을 감당하였고 스스로 아픈 상처를 입었다. 스승을 세 번이나, 그것도 스승이 이미 예고한 그대로 비껴가지 못한 채 죄를 짓고 말았던 것이다. 베드로가 한나스의 집에 머문 것은 예수님이 과연 어떻게 될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을 그만큼 사랑했던 것이다. 단지 그의 나약함이 눈앞의 위험에 굴복했을 뿐이었다.

그 사랑 때문에 베드로는 목 놓아 울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의 나약함을 함께 나누어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의 박해와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약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 약함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이 나약한 현실을 인정하고 참회함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예수님은 훗날 베드로에게 당신의 양떼를 돌볼 사명을 맡겨주셨는지도 모른다.

그의 죄가 그를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고, 죄 짓기 쉬운 약한 영혼들을 구제하는 데 적격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어부의 기질이 몸에 밴 베드로는 단순한 겸손으로 말미암아 특유한 방식으로 ‘봉사하는 일’, 타인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 되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되살려 낸 뒤, 자기 발아래 무릎을 꿇은 백인대장 고르넬리오에게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였던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베드로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역시 사람입니다.”(사도 10,26)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죄를 저지를 수 있는 한낱 사람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사도가 된 바오로 앞에서도 겸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함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는 많이 용서받음으로써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든지 매일 큰소리로 또는 공적으로 참회하는 자세로 외쳐야 한다. “나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교회를 세우고 배교한 사람

우리 교회사에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鏽)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던 인물 중의 하나로, 초대 명도회 회장이던 정약종의 동생이며, 그 유명한 <상재상서>를 쓴 정하상의 작은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로서 정조시대의 실학사상의 대가이며, 《목민심서》 등 그의 저작은 아직도 세상을 울리는 목탁 역할을 하고 있다. 아울러 정약용의 신앙은 배교(背教)라는 그물에 얽혀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에 대한 묵상을 돕고 있다.

정약용은 조선 천주교회의 대부(代父)라고 할 이벽과 교제하는 친한 사이였고, 1783년에는 <중용강의> 80조에 대해 이벽에게 문의하기도 했다. 정약용의 형수, 즉 정약현의 아내는 이벽의 누이였는데 1780년에 사망했다. 이벽은 1781년에 그의 누이의 기제(忌祭) 를 맞아 마현(馬峴)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정약전·약용 형제와 함께 서학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약용은 감화를 받고, 이벽으로부터 《천주실의》와 《칠극》을 얻어 보고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84년 9월에 이승훈이 이벽의 집에서 영세를 주기 시작했는데, 이벽·권일신·정약전·정약용·최창현 등이 제일 먼저 세례를 받았다. 당시 교회에서는 세례를 준 사람을 신부(神父) 로 부르고, 세례를 준비시키기 위해 교리를 가르친 사람을 대부(代父)라고 불렀는데, 정약용의 대부는 권일신이었다.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양반만이 아니라 김범우·최인길·지황·김종교 등 중인(中人)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승훈을 영수(領首)로 삼아 종교의식을 행하거나 교회의 중대한 일을 의논하기 위해 자주 모였다. 그런데 1785년 봄에 김범우의 집에서 모임을 하다가 형조의 관리들에게 들켜 취조를 받게 되었다. 이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중인출신 김범우는 유배당하고, 나머지 양반 신자들은 훈방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태학생(太學生) 들이 통문(通文)을 돌려 천주교 신자를 가진 부모들은 자식들과 인연을 끊으라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을 배교시키고자 닦달하였다. 그 결과 이승훈은 아버지와 아우의 설득에 굴복하고, 천주교 서적을 불사르고 천주교를 배척하는 글까지 발표하였다. 이벽 또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굴복하였다. 정약전·약용 형제도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쉽게 굴복하지는 않았다.

천주교 신앙과 임금에 대한 신의, 그리고 배신 사이에서

그런데 1787년에 이승훈과 정약용이 반촌에서 과거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다시 서학서(西學書)를 공부하다가 친구였던 이기경에게 들켜 또 한 번 곤욕을 치렀다. 이기경은 이승훈과 정약용을 만나서 논쟁을 벌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후로 이들 사이는 멀어져 버렸는데, 이기경은 두고두고 서학 반대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한편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처음으로 천주교인이 사형에 처해지는, 이른바 ‘진산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그동안 교회 일을 주도해오던 양반학자들이 거의 모두 교회를 떠나고 중인들이 교회 일을 맡게 되었다. 그 뒤로 정약용 및 다른 양반신자들도 교회활동에 마음을 끊은 것 같다.

정조
정조

한편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포교활동을 전개한다는 첩보를 제공받은 한영익이 이철을 통해 채제공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채제공은 이 사실을 임금에게 은밀히 알리고,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으나 주 신부는 놓쳐버리고 최인길·윤유일·지황을 체포하여 죽였다. 이 사건으로 당쟁이 일어나 이가환·이승훈·정약용은 궁지에 몰린 채 구설수에 휘말렸다.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 임금마저도 끊임없이 올라오는 상소 때문에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시키고,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조 임금이 충주·금정·예산을 구태여 이들의 유배지로 선택한 이유는 그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 천주교인들의 마음을 돌려보라는 뜻에서였다. 이가환·정약용·이승훈은 임금의 뜻대로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천주교를 배척하고 신자들을 괴롭혔다. 그 덕분에 정약용과 이가환은 같은 해에 다시 중앙으로 불려 올라왔으며, 이승훈도 유배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특히 이런 조치에는 정약용이 교회 지도자 이존창을 체포하는 데 협조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다시 조정에 올라오자 반대자들이 계속 비방하는 바람에 견딜 수 없어서, 1797년 정약용은 임금에게 ‘자명소’를 올렸다. 여기서 정약용은 천문과 역학에 매혹되어 천주교에 빠지게 되었으며, 서학의 사생관(死生觀)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지만, 이색적인 학설을 듣고 싶어 하는 성격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신해년 이후부터는 완전히 천주교에서 손을 떼고 뉘우치게 되었다고 밝혔다. 정조 임금은 이 자명소를 가상히 여기고 그해 6월에 정약용을 곡산부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병조참의로 임명했다. 이 무렵 정조는 더욱 정약용을 신임하고 보살펴주었으며, 그만큼 반대자들은 더욱 정약용을 미워하였다. 그후 정약용이 고향에 내려가 있는 사이에 정조 임금이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신앙, 다산의 배교

정조 임금의 죽음은 곧 천주교회에 대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정순왕후의 수렴첨정으로 천주교를 반대하던 벽파가 득세하자, 천주교도들을 역적으로 다스리는 정부 방침이 선포된 것이다. 게다가 1801년 벽두에 책롱(册籠)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약종이 포천의 홍교만에게 맡겨놓았던 책을 궤짝에 넣어 서울의 황사영 집으로 옮기던 중 한성부의 관리에게 발각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간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책롱에는 천주교 서적과 성물, 주문모 신부의 편지와 함께 정씨(丁氏) 집안의 편지들도 들어 있었다. 이 때문에 이가환·정약용·이승훈은 감옥에 갇히고, 권철신과 정약종·약전 등도 붙잡혀 취조를 받았다. 이때 정약종은 이 책들이 자기 집에서 나온 것임을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정약용은 이를 극구 숨기려 하였다. 그리고 황사영과 이승훈을 원수로 여긴다고 말하며, 천주교도들을 체포하는 방법으로 천주교에 깊이 물들지 않은 머슴들을 잡아다가 문초할 것을 건의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형벌을 받지 않았다.

한편 이승훈은 정약용이 그를 원수로 여긴다면 자기도 그를 원수로 여길 것이라며 정약용이 자신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실을 폭로하였다. 더구나 당시 “신부가 누구냐?”는 질문에 다른 교인들은 한결같이 입을 다물거나 이승훈을 신부로 불렀다고 말했으나, 정약용은 주문모 신부의 존재를 밀고하였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얼마간 보석(保釋)이 되었다.

결국 이승훈과 정약종 등 6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특히 정약종은 대역죄(大逆罪)로 선고되었다. 그리고 이가환과 권철신은 그 사이 옥사(獄死)하였는데, 정약전·약용은 유배형을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여 약전·약용 형제가 다시 취조를 받았으나 혐의가 없다 하여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교회재건운동과 배교자의 회심(回心)

그 결과 정약전과 정약용 일가는 가족의 생명과 재산만은 구할 수 있었으나, 정약종의 가족은 가장(家長)을 잃은 데다 집과 재산까지 몰수당하여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집안에서 교회를 재건할 인물이 나왔으니 곧 정하상이다. 정약종의 둘째아들 정하상은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마음으로 무산에 유배중인 조동섬을 찾아가 한문과 교리를 배우고, 선교사 영입을 위해 준비하였다. 이여진·신태보·홍우송 등이 교회재건운동 에 참여했는데, 정약용도 이때부터 심경에 변화가 일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약용이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한 것은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지 몇 년 후였다.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에는 이렇게 전한다.

“정약용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난 지 2,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진리는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다. 그는 늘 외딴방에 들어박혀 소수의 친구밖에는 만나지 않았고, 속죄를 위해 자주 단식과 그 밖의 고행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몹시 고통을 주는 띠를 늘 매고 있었고 또한 몸의 여러 곳을 작은 쇠사슬로 감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묵상을 하곤 했다.”

정약용의 새로운 신앙생활은 1822년 회갑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는 건릉 임오년에 태어나 지금 도광(道光)의 임오년을 맞았으니 갑자(甲子)가 한 바퀴를 돈 60년의 돌이다. 무엇으로 보더라도 죄를 회개할 햇수이다. 수습하여 결론을 맺고, 한평생을 다시 돌려 금년부터 성실하게 몸을 닦아 실천한다면 명명(明命)을 살려서 나머지 인생을 끝마칠 것이다.”

이 무렵부터 정약용은 과거를 되돌아보고 죽음에 대비하고자 자신의 묘지명(墓誌銘)만이 아니라 권철신·이가환· 이기양 등 선배와 신앙 동료들의 묘지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의 기원과 초기 교회사에 관한 책을 쓰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다블뤼 주교가 그의 《비망기》에 인용하면서 <조선복음전래사>라고 이름붙인 글이다. 그리고 1835년 조선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중국인 유방제(柳方濟)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은 뒤 선종하였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착해진다는데 정약용도 그와 같은 것일까. 아니면 정약용은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단지 정치적 모략을 피해 가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배교했던 것일까. 진실은 알 수 없으나, 그가 청년기에 깨달았던 천주교 진리가 평생 동안 다산 정약용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는 강진에서 귀양살이하면서, 원시유학(原始儒學)에 바탕을 두고 백성들의 처지를 살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많은 글을 지었는데, 그 근본적인 사상이 서학과 구별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정약용이 만년에 들어서라도 신앙을 회복한 것은 아마도 진리의 한 끝을 평생 놓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만이 인간의 영혼을 회심으로 이끌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도록 만든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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