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거룩한 투쟁
상태바
영혼을 위한 거룩한 투쟁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11.21 2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33

천장호에서

-나희덕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요한 18,1-11)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지혜로운 사람은 제 죽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을 미리 아는 것일까. 우리 옛말에 다 늙은 노인들이 불현듯 마당을 쓸고, 방을 정돈하고, 몸단장을 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면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 짐작했다고 한다. 짐승도 제 죽을 때를 알아 제 살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인들 그런 예감을 하지 못하란 법이 없다. 예수님도 자신이 고난 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을 미리 아셨다. 그리고 이 순간에는 자신을 숨기기를 거절하고 당당한 모습을 취하셨다.

예수님은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늘 다니곤 했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결국 유다는 대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과 함께 미리 그곳으로 와서 일일이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을 들고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는데, 예수 일행은 다른 길로 피해갈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런 참에 예수님은 먼저 그들 앞에 나가서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묻기까지 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내가 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때 행한 유다의 역할을 크게 부각시켰다. 유다가 예수님을 보고 달려가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는 것으로 예수를 원수들 손에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에서는 유다의 역할이 단지 예수님이 잘 다니시는 장소를 일러준 것뿐이었다. “유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요한 18,5)라고만 되어 있다. 오히려 병사들은 예수님이 “너희가 찾는 사람이 바로 여기 서 있는 나다.”라고 나서시는 바람에 기세가 꺾인 채 움찔 놀라며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이 순간에 제자들 중에서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뺨마저 내밀라던 예수님의 적극적인 저항, 공개적인 의사 표시를 떠올린 자가 있었을까.

저항 없이 불의에 포박 당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불의를 만천하에 드러내시는 분이 그분, 예수님이시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안녕을 걱정해주신다.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18,8) 그런데 예수님의 당당하고 의연한 저항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한다. 예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다고 전하는 베드로가 순간 당황하여 칼을 뽑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칼로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하기야 그 종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 잘못이 있다면 그 주인에게 물어야 한다.

이를 두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엄중히 말씀하신다.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18,11) 성서에서는 자못 담담하게 이 장면을 그리고 있지만,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님은 진리를 소유한 자답게 의연하게 체포당한다. 어쩌면 그 순간은 유다와 경비병들이 오히려 죄의 사슬로 결박당하고 있는 때인지도 모른다. 이 장면에서 예수는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유다에게마저도 원망을 보이지 않는다. 유다와 경비병의 배후에 있는 악의 세력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 선포의 대가로 마신 독배(毒杯)

진리와 양심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폭력에 대하여 폭력으로 맞서지 않는다. 그는 다만 진리를 온몸으로 증거할 뿐이다. 진리의 사람은 다른 많은 이들의 숨어 있는 양심과 어진 마음을 믿는 까닭에 자신의 사명은 숨겨진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길 따름이다. 진리의 스승인 소크라테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생 ‘영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영혼의 건강이란 ‘도덕적 순결’이며, 곧 ‘불의한 것,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은 결코 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내면에서 들리는 양심의 소리, 그 가슴속에 살아 있는 거룩한 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았다. 이런 사람이었기에 그는 당연히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문화에 대하여 복종하기를 거절했다. 아테네의 정치가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지혜로움을 자랑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찾아가 대화를 통하여 그들이 사실은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정치가·군인·예술가들을 만나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주려 했고, 이 일을 신이 내린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무지가 드러난 많은 아테네의 저명인사들은 화가 났으며, 결국 소크라테스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반대자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내리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뜻을 변론하였다. 만일 그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 우리는 아뉘토스의 말을 듣지 않고 너를 석방하겠다. 단 너는 다음의 조건을 지켜야 한다. 너는 지금까지 해온 탐구나 철학을 그만두어야 한다. 만일 그런 일을 계속하다가 잡히면 그때는 사형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만일 이런 조건으로 그를 석방해준다 하더라도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저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보다는 신께 더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숨을 쉬고 힘이 있는 한 지혜를 추구하고 여러분을 권고하며 만나는 사람마다 진리를 말해주기를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평소처럼 말할 것입니다. 나의 훌륭한 친구여, 그대는 지혜와 힘에 있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명성이 높은 아테네 시민이면서, 진리와 사려 깊음과 영혼의 완성에는 조금도 관심이나 생각을 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좋은 평판과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기울이니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런 연설을 듣고 당연히 시민들은 격분하여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의 권유로 감옥을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는 한사코 이를 거절하고 독배를 마시고 죽음으로써 아테네 시민들에게 ‘죽음보다 강한 진리’가 있음을 알렸다.

 

사티아그라하 아힘사

마하트마 간디는 구조악에 저항하는 불복종의 정신과 방법을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을 현실적인 정치 상황에 적용하여 성공을 거둔 최초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그라지지 않는 불복종(不服從) 정신은 구도자와 같은 간디의 삶에 온통 배어 있는 것이었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부단히 진리를 갈구했듯이, 그 또한 언제나 진리를 붙잡고 살려고 모든 힘을 쏟았다. 이러한 정신을 간디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고 불렀다. 곧 ‘진리를 꽉 붙잡는 다(真理把持)’는 뜻이다.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당연히 불의한 현실에 눈을 질끈 감고 복종할 수 없었다.

진리를 살기 위해서 간디는 항상 ‘아힘사(ahimsa)’라는 원칙을 내세웠다. 아힘사는 ‘비폭력’ 을 뜻하는데, 이는 단순히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태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아힘사는 증오와 미움과 원망 같은 부정적이거나 공격적인 감정을 깨끗이 정화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아힘사의 원칙은 예외 없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치영역도 예외일 수 없고, 시민 불복종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간디는 조금이라도 미움의 감정이나 분노가 남아 있을 때에는 시위나 시민불복종운동에 결코 참 여해서는 안 된다고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겨레와 동포들을 잔혹하게 짓밟는 사람들이라도 결코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간디와 그의 공동체는 불복종 행위에 들어가기 전에 언제나 단식과 기도를 통하여 마음속의 모든 분노와 미움을 없애곤 했다.

아힘사는 어느 누구도 단죄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마음이며, 오히려 자신을 괴롭히는 권력자를 측은히 여기고 사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법과 명령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불복종의 정신’을 나타내면서도, 그러한 악한 법과 명령을 내리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간디의 정신에 따라서 반제국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인도의 민중들은 영국 군인들에게 몽둥이와 채찍으로 맞으면서도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비폭력으로 저항하였다. 이런 모습을 본 서방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제국주의는 인도의 숭고한 비폭력 정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영혼을 위한 거룩한 투쟁

칼집에 도로 칼을 꽂아두라는 예수님과 간디의 ‘비폭력’ 주장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세상에서 법마저 부당하다면 믿을 건 주먹밖에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잔인한 폭력 앞에서 자신을 무기력하게 드러내놓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대 해서 간디는 “증오와 분노로 저항하고 불복종하는 이는 결국 자신의 영혼마저 파괴시키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설사 사회구조가 변화된다 하더라도 영혼과 맞바꾼 사회구조의 개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말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폭력적인 불복종 저항운동은 개인적으로는 힘들다. 간디는 자신의 불복종운동을 철저히 공동체적으로 행했다. 남아프리카에서 유색인종의 인권을 위해 싸웠을 때나, 인도에 돌아와 영국제국주의와 싸웠을 때나, 아니면 민중을 착취하는 기업가나 대지주와 싸웠을 때 그는 항상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하였다. 만일 간디를 돕고, 간디와 함께 감옥에 가고, 간디와 함께 지혜를 모았던 헌신적인 공동체 식구들이 없었더라면 간디의 불복종운동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이 믿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일이다.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부당한 제도적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이 체제를 고분고분 따라 살거나, 절망 속에서 불행한 일상을 보낼 것이다. 그러므로 간디에게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우리가 ‘진리 앞에 계산 없이 단순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인가? 진리이면 가고 진리가 아니면 가지 말아라.”라는 정신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