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퍼센트의 평신도에게 부는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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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퍼센트의 평신도에게 부는 성령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9.1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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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25

축 복

-김지하

원주역 바로  앞엔 해방촌
해방촌 바로 뒤엔  법원
법원 바로 옆엔 주교관

어느 그믐밤
은발의 주교님이 길을 가셨다
'할아버지 놀다가세요'
'놀 틈 없다'
'틈 없으면 짬을 내세요'
'짬도 없다'
'짬 없으면 새를 내세요'
'새도 없다'
'새도 없으면 탈나세요'
탈나도 할 수 없지
옜다 과자나 사 먹어라'

어느 보름밤
은발의 주교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하라고 악쓰는 세상
놀다가라니 이 무슨 축복!'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자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래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하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요한 13,2-9)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나누고자 하셨다. 이 식사를 두고 사람들은 ‘최후의 만찬’이라고 말한다. 공관복음서는 한결같이 예수께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며, 이는 내 몸과 피라고 선언하시는 장면을 돋보이게 만든다.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도 이를 기념하여 스스로 쪼개지는 아픔을 견뎌야 하며, 나눔을 통해서 세상의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 교회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 저자는 성만찬이 종교예식의 하나로 전락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최후의 식탁에서 만찬례를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이야기만 전하고 있다. ‘기념’은 곧 ‘실천’으로 계승되어야 한다는 뜻일 게다.

식사 전에 마땅히 먼지투성이 손과 발을 씻는 것은 상례(常禮)이다.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신 다음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정성껏 닦아 주신다.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위는 가히 스캔들이라고 부를 만했다.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윤리에 의하면, 제자들은 스승의 그림자조차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이런 예법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신다. 오죽하면 베드로가 “안 됩니다. 제 발만은 결코 씻지 못하십니다.” (요한 13,8) 하며 손을 가로저었겠는가. 어리석은 베드로였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극진한 제자였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는 말씀을 듣고서야 베드로는 그렇다면 온몸을 다 씻어 달라고 조른다. 성급한 베드로, 그러나 열정적인 제자였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본보기는 “섬기는 이가 다스린다.”고 하시던 말씀 그것이었다. 제자 직분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 ‘봉사’였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가 서로를 섬김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일치하고, 형제적 사랑을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유언(遺言)은 ‘사랑 계명 선언’에서 절정을 이룬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예수께서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위는 세례갱신식(洗禮更新式)을 연상시킨다. 모든 영혼이 세례를 통하여 거듭 태어났듯이, 이제 스승이 떠나가는 마당에 다시 세례를 주되 서로가 서로에게 섬기는 마음으로 일치하라는 뜻일 게다. 이제부터 이 세례를 제자들도 다른 이들과 나누게 될 것이다. 이왕에 세례받은 이는 주님의 사도로서 똑같은 봉사의 직분을 나누어 갖는다. 그리고 봉사의 직분을 나눠 가진 이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랑의 증거가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할 것이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거룩한 겨레, 이제는 어리석은 백성이 된 평신도

바오로 사도는 ‘교회에 …, 공동체에게 …, 뽑힌 이들에게 …, 사랑받는 이들에게 …,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다. 이 모든 이가 마땅한 은혜를 받아 가르침을 선포하고, 예언자적으로 발언하고, 영들을 식별하며, 병자들을 치유하고, 공동체를 지도하고 그러는데 이 모든 은혜가 똑같은 성령으로부터 온다고 확신한다(1고린 12,4-11).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기금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전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분의 자비를 받게 되었습니다.” (1베드 2,9-10)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인간의 지배가 아니라 복음의 섬김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그렇게 형제 자매적 관계 안에서 서로 권고와 격려를 해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별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오히려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루가 22,26)고 하였지만, 콘스탄틴이 교회를 인준한 뒤에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차별로 발전했다. 그러니까 교회의 봉사자들(Ministry)은 지극히 공경하올 자애로운 나으리 · 각하 · 전하로 불리게 되었으며, 저택 안에 알현실과 고문실을 두었고 평신도들은 배척당했다.

평신도(Layman)란 유다교에서는 ‘사제도 레위도 아닌 사람들’이라는 뜻이며, 헬라 문화권에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성직자(Clergyman)는 위계(hierarchy), 즉 신성한 지배계급이라고 일컬어졌다. 결국 성직자들은 교회 안의 모든 직무를 독점하여 교회와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평신도들은 힘과 품위를 잃고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 걱정이나 할 뿐 달리 교회 안에서 발언권이 없었다. 그들이 할 일이란 그저 늘 ‘기도하기와 복종하기, 헌금하기’일 따름이었다. 이런 상황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턱에까지 계속되었다 (왈벗 뷜만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분도출판사, 81-92쪽 참조).

99.9퍼센트의 평신도에게 부는 성령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부활절 아침처럼 지진이 일고 성령 강림날처럼 영의 바람이 불었다. 특히 ⌜교회헌장⌟에서는 교회를 우선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언하고, 성직위계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는 위치에 있다고 밝혔다.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는 모든 신자가 사제직 · 예언직 · 왕직에 참여한다고 확인하였으며, 이는 성직위계의 연장된 팔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결합에 힘입은 사도직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평신도 본연의 책임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그릇될 수 없는 성령의 역사’ 덕분이므로 감사할 일이라고 강조했다(평신도 1항).

그래서 교회 안에서 99.9퍼센트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교회의 삶에 참여할 기회가 열렸다. 본당 사목협의회,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등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렇게 신명나는 바람도 얼마 후 교회법에 의해 족쇄가 채워졌다. 평신도들은 마음대로 논의하고 제안할 수는 있어도 결국 교회 안에서 내리는 중요한 결정은 성직자들에게 맡겨졌으며, 평신도들은 협력자에 머물렀다. 한껏 부풀어오르던 평신도들의 의욕은 점차 사그라져 갔다. “교회는 어쩔 수 없어.”라는 체념이 늘어났다. 체념(Resignation)이란 말은 라틴어 시그눔(signum)에서 유래한다. ‘표지’라는 뜻인데 로마 군대의 ‘깃발’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므로 체념은 깃발을 돌려준다는 뜻이다. 이는 누구도 해선 안될 일이다. 성령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1987년 ‘교회 안의 평신도들’에 대한 주교 대의원 회의가 열렸다. 주교 232명과 평신도 남자 32명, 여자 28명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새로운 견해와 제안을 쏟아내었다. 그러나 최종 메시지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하느님 백성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제들, 수도자들과 함께 동등한 품위를 가진다고 밝혔다. 그러나 스무 줄 다음에 “어떤 신자들은 신품성사를 받는 이들이 있는데 이 성사는 ‘특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결국 성직자가 특별한 신분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바른 표현은 ‘특별한 봉사’여야 했던 것이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젊은 교회들의 아래로부터의 사목자 평신도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는 제3세계의 젊은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메데인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1968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적용하여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교회 밑바닥 공동체(BCC)의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이 공동체들은 교회를 뿌리로부터 바꾸어 가기 시작했다. 브라질에선 3백만 명이 밑바닥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다. 평신도들은 여기에 모여서 자기들의 생활 조건을 분석하고 기도하고 찬미를 드리고 성서를 읽으면서 빛과 힘, 기쁨과 용기를 얻으며 조금씩 일상생활을 가꾸어 가고 있다. 전에는 ‘사목’이란 위에서 내려오는 사건이었다. 사제의 독점물로서, 사제가 1년에 몇 차례씩 유성처럼 나타나서 세례를 주고 고백을 듣고 미사를 거행하고는 다시 유성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제는 ‘아래의 사목’이 진행되고 있다. 평신도 자신의 지휘로 일년 내내 교회가 움직이며 복음에 따르는 삶을 서로 격려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사제 없이 예배를 거행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친척과 친지들을 초대하며 오는 사람들은 자진하여 예비신자로 등록하고 2년 후에 세례를 받게 된다. 여기서는 사제가 모자란다는 사실이 오히려 하느님의 백성들이 어른으로 자라기 위해 ‘다행한 일’로 입증되었다. 기니에서는 1967년 세쿠 투레 대통령이 두 주교와 모든 유럽인 선교사들을 추방했으며, 토착민 치딤보 대주교마저 추방했다. 그러나 5만 명의 신자들은 수동적인 소비자 역할을 하던 신앙을 버리고 능동적으로 선교사들이 되어 본당단체를 재조직하고 활성화시켜, 전에는 천주교인 신자 비율이 인구의 1퍼센트 밖에 안 되던 것을 지금은 6퍼센트로 끌어올렸다.

한편 “성찬의 제사에 참여함이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절정” (교회 11항)일진대, 자격있는 평신도들이 성찬례를 거행하는 등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을 딱딱한 교회법으로 아예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평신도 가운데는 다년간 신학교육을 받은 이들도 많이 있으며, 그들은 ‘능히’ 성찬례를 거행할 수 있으나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감히 그래서는 안 되게 되어 있다. 특히 사제가 크게 부족한 나라에서는 많은 공동체들이 미사참례를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는 성찬례를 거행할 권리가 있으며, 이를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종신부제직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나라에서는 고민이 많게 마련이다. 라틴아메리카 주교들은 거듭 이러한 제안을 한 바 있으며, 아시아 출신 주교 99명도 1987년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 이런 주제가 논의되도록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안건으로 채택되지도 않았다.

봉사는 사도적 직분의 참모습

설사 상황이 이렇다 해도 실망하거나 체념할 필요는 없다. 이에 반항할 필요도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평신도로서 귀감을 보여주는 일이다.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으며 복음적으로 열성을 다해 살다 보면 좋은 날도 기대할 수 있다. 성령은 마음대로 어느 때 어느 장소에나 계시지만, 제도가 바뀌는 것은 더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적 열성을 앞당겨 사는 사람이 없다면 그 제도 역시 바뀌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존중심을 유지하면서도 남을 섬기고 발을 씻겨주려는 자세를 갖는 데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봉사 직분에 대한 자긍심을 먼저 갖는 데서 우리는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서의 사도적 직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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