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바티칸에 찾아든 요한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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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바티칸에 찾아든 요한의 봄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9.0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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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24

귀가(歸家)

-구광본

하루가 한 생애 못지 않게 깁니다
오늘 일은 힘에 겨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산그림자 소리없이
발 밑을 지우면
하루분의 희망과 안타까움
서로 스며들어 허물어집니다

마음으론 수십 번 세상을 버렸어도
그대가 있어 쓰러지지 않습니다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0-26)

새로움 · 새로움 · 새로움

1969년 12월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추계정기총회를 마치고 나서, ‘한국의 모든 사제들에게’라는 편지 형식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사제들이 웃으면서 농담하는 말을 가끔 들었습니다. 즉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공의회이고, 제 2차 공의회는 주교들의 공의회라면, 제 3차 바티칸 공의회, 즉 사제들의 공의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고. 농담이지만 일리있는 말입니다. … 아마도 누구의 말대로 본당 신부들의 위치가 지배하는 위치로 확립되었을 때는 수사 · 수녀 · 평신도들은 무시당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현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현 사제의 위치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새 교육 · 새 연구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을 대신하여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습니다. 이 불이 벌써 타올랐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루가 12,49) 라는 성서구절을 인용하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만큼 한국교회의 쇄신에 큰 파장을 일으켜 왔던 것이다.

특히 1969년, 젊은 김수환 신부를 최연소 추기경으로 발탁했던 바오로 6세 교황은 진작 한국교회에 신선한 봄바람을 불러일으킬 속셈이었던 모양이다. 바오로 교황은 미국 보고타에서 새로 서품된 사제와 부제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주여, 여기 있는 새 사제와 부제들을 보셔서 … 우리는 주께 기도드립니다. 그들의 봉사와 그들의 모범으로 이 지방에 가톨릭 신앙을 보전하시고, 새로운 빛이 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이 빛이 활동적이고 너그러운 사랑으로 반사되게 하소서. 그들의 증거는 주교들의 증거를 따르고 동료들의 증거를 강화하며, 하느님 백성의 참된 신앙생활을 길러줄 줄 알게 하소서. 명철하고 용감한 정신으로 사회정의를 진작시키며, 빈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며, 복음적 힘과 어머니요 스승인 교회의 지체로서 현대사회의 요구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사목⌟ 1968년 11월호)

 

요한의 봄

1958년, 교황선거가 있었다. 당시에는 추기경 70명 중에서 53명만이 생존해 있었는데 그 절반은 당시 77세였던 론칼리 대주교보다 나이가 많았다. 결국 주교들은 론칼리 대주교를 과도기 교황으로서, 살아 있을 몇 해 동안만 교황직을 맡기기로 했다. 선거에 참석한 주교들은 권위주의적인 시대를 마감하고 싶었던 것이다. 비오 9세 교종은 1864년 ⌜유설목록 (謬說目錄 Syllabus)⌟을 내놓아 세속에서 생겨난 모든 근대 이념들을 대화도 해보지 않고 모조리 단죄하였다. 비오 12세는 이브 콩가르 · 세뉘 · 드 뤼박 등 선구자적인 프랑스 신학자들을 가차없이 파면시켜 버림으로써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 걸었다. 이젠 새로운 교황, 사목적 교황이 나와야 했다.

결국 11번째 투표에서야 안젤로 론칼리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선출되자 그는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묵은 약속의 시대를 마감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하느님 나라를 한껏 맛보았던 사도 요한을 기념하여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취했다. 지금까지 263대에 걸친 역대 교황 가운데 두 분은 대 교황(대 레오 교황, 대 그레고리오 교황) 이라는 칭호가 붙여졌으며, 66명은 복자 또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는데, 그뒤에 가톨릭 교회는 성인(聖人) 다운 늙고 뚱뚱하고 키 작은 교종 요한 23세를 맞이하게 된다. 베르가모 근처의 소토 일 몬테의 소박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20세기에 와서 교회의 중세기를 끝냄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디딤돌을 놓았다.

그는 수도자적인 영적 수행에 몰두하였으며, 관대함에 대한 현대적 감각과 비판의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베르가모 신학교의 젊은 교회사 교수였던 그는 교회를 맹목적으로 예찬하지도 않았고, 교회의 적(敵)들을 비방하지도 않았으며 진지하게 ‘순결한 창녀인 교회’의 인간적인 면을 살피고자 했다. 교수로 봉직할 때 이러한 그의 태도는 즉각 ‘문제 사제’로 낙인찍히게 되었는데, 열성파의 한 사람이던 마졸레니 신부가 밀고를 한 탓이었다. 나중에 교황이 된 론칼리는 교황청성의 서류철에서 자기 신상에 관한 쪽지를 가져오게 하였다. 과연 거기엔 ‘안젤로 론칼리, 근대주의의 혐의가 있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요한 23세는 대관식 강론에서 자신을 “여러분의 아우 요셉입니다.”하고 소개했다. 즉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여러분과 같은 한 사람,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 하느님의 굽어살피심과 사랑을 받는 인간 중의 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모든 이에게서 벗의 모습, 형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교회에는 바야흐로 ‘요한의 봄’이 찾아왔다.

요한 교종은 시대의 징표를 읽는 눈이 밝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공산주의자에 대한 태도 변화였다. 비오 12세가 온 이탈리아에 내렸던 엄명이 아직까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때였다. 고백소에서는 모든 고해자(告解者)에게 공산당에 가담했는지 물어보아야 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사죄(赦罪)를 거절해야 했던 것이다. 요한 23세는 나중에 회칙 ⌜지상의 평화⌟(1963년)에서 제시하였듯이, 마르크스의 유물론 이데올로기가 오류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오류를 범한 인간 또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흠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존중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뜻밖의 행동을 취했다. 모스크바에 갈 예정이었던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토글리아티(P. Togliatti)에게 사람을 보내어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에게 권하여 교황인 자기에게 80회 생일축전을 보내게 해 달라고 당부를 했다. 이 부탁은 즉시 이루어졌고, 세계는 깜짝 놀랐다. 2년 후에는 ‘신앙교리성’의 오타비아니 추기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흐루시초프의 사위인 아주베이를 그의 부인과 함께 접견하였다.

 

성령의 날인을 받은 공의회 소집 선포

요한 23세 교종은 고민하였다. ‘교회가 현대세계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가 교황이 된 지 3개월 만인 1959년 1월 25일에 상파울루 수도원에 모인 추기경들 앞에서 공의회 소집을 공고하였다. 이는 1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린 지 100년 만에 열리는 공의회였다. “현 시점에서 하느님 백성의 필요에 응답해서 세계 공의회 개최를 공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공의회는 갈라져 나간 공동체들과 일치를 모색하는 공의회여야 합니다.” 교종은 이 소집 결정이 “성령의 급작스러운 이끄심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추기경들은 숨을 죽였다. 공의회, 참으로 거창하고도 위험스런 행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의회를 ‘아조르나멘토 (aggiornamento 현대화 · 쇄신)로 이끌려는 요한 교종의 뜻을 그대로 관철시키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수구(守舊)적이며 제도적 권력을 누리던 교황청 관리들은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요한 23세가 노망이 났다고 생각하여 고집을 꺾으려고 했다. 국무성 추기경이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교황청의 다른 추기경들은 한 사람이 열 개의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로마 학파‘ 출신으로서 문서의 초안을 작성했으며, 이 보수적인 내용을 담은 문건들을 공의회에서 일사천리로 읽고 채택해 버릴 속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교종 요한 23세는 “이제 공의회는 시작되었으니 일은 이미 착수된 것이요 잘 되어갈 것”이라고 태연히 말했다. 1960년 6월 5일 ’그리스도인 일치 사무국‘을 설치하고 베아(Augustinus Bea) 추기경을 사무국장으로 임명했다. 이 성서 전문가는 그리스도교의 다른 공동체들과 서둘러 대화를 해나갔으며, 결국 공의회에 46명의 개신교 등 다른 그리스도교회 참관인들이 참석할 수 있었다.

한편 요한 23세는 로마의 주교로서, 공의회에 앞서서 한 차례 로마 주교회의(Synod)를 가졌다. 요한 교종은 여기서 쇄신을 꾀했지만, 교황청 당직자들에 의해 조작되어 조만간 이뤄질 공의회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다. 참석자들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안건에 대해서 박수나 치고, 옛법규를 새삼 다시 인준하는 구실만 했던 것이다. 성직자는 반드시 수단을 입을 것, 공산주의에 대한 신랄한 경고, 영화관이나 해수욕장에 가는 일의 금지 등등. 성령강림 같은 새봄의 시원한 산들바람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라틴어를 모국어로 바꾸자는 전례개혁안이 들먹여지자 교황청의 보수파들은 선수를 쳐서 요한 교종으로 하여금 라틴어가 교회의 공식언어로 계속되어야 하며, 온 세계의 신학강의도 라틴어로 계속해야 한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나중에 휴지쪽이 되어버릴 이 문서에 서명하면서 교종은 웃음을 지었다.

요한 23세는 공의회 소집 서한에서 이번 공의회에서는 교리나 교회법을 다루지 않고 먼저 세계의 문제와 교회를 바라보되, 시대의 징표에 제대로 응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공의회는 교리논쟁이 아니라 사목적 대안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공의회 개회사에서 요한 23세는 “교회의 가르침이란 박물관의 보물처럼 보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이제 교회는 교사로서 가르치고 단죄하기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갖고 어머니다운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제 모든 신자가 일치하고, 다른 모든 교회와 일치하고, 모든 종교와 일치하려는 희망을 가져야 했다. 이 연설문은 추기경 베아 · 수에넨스 · 몬티니 등이 초고를 준비한 것이지만 결정적으로는 요한 23세의 메시지였다.

 

세상을 향해 열린 교회

공의회는 성령의 바람에 이끌려 갔다. 공의회는 언제나 회기(會期)를 시작할 때마다, 세비야의 성이시도로(619년)가 지은 다음 기도문을 바쳤다.

“오! 성령이시여,
당신의 이름으로 특별히 결합되어 모인
죄많은 우리에게 오사
우리와 함께 하소서.
우리 행동의 인도자가 되사
우리가 나아갈 길을 밝혀주시고
해야 할 바를 일러주소서.
당신의 도우심을 입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당신 뜻에 들게 하소서.
우리 머리를 당신의 영감(靈感)으로 채우사
우리가 의도하는 바를 바로잡아 주소서.
당신은 홀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빛나는 이름을 지니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끝없이 정의로우신 분이시니,
우리로 하여금 정의를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무지로 말미암아 악으로 기울지 말게 하시고
아첨으로 인하여 동요되지 말게 하시고
물욕에 더럽혀지지 말게 사소서.
우리 마음을 강한 힘과 은총으로 당신과 하나 되게 하사
무슨 일을 하든 진리에서 벗어나지 말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결합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자비와 정의를 따라 판단함으로써
오늘도 우리의 행동이 당신 뜻에 맞갖게 하사
영원히 끝없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공의회가 개막되자 공의회 교부들은 충원되어야 할 위원들을 교황청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선임하였다. 2천 5백 명의 주교들은 회기마다 모여서 토론하고, 의안을 수정하였으며, 수백 명의 신학자 · 서기 · 번역가들이 능력을 발휘하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의제를 꼼꼼히 검토하고 사목대안을 연구하였기에 정신적 · 육체적으로 몹시 피로했다. 성베드로 대성당의 회의장에서 거의 매일같이 그 전날에 서거한 주교의 이름이 불려져, 모두 일어나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이에 참석자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바티칸 궁정 앞에서 또는 성당의 돌계단에서 숨을 거둔 주교마저 있었다. 공의회 기간중에 서거한 주교의 수는 253명에 달했다.

첫 회기에 공의회 교부들은 솔직한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노예근성과 이기적 책략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그들은 어떤 특권도 권력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인류에게 봉사하는 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요한 교종이 서거하고 나서, 몬티니 주기경은 교회 역사상 가장 짧은 추기경 회의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어 바오로 6세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새 교황은 요한 교종과 같은 정신으로 공의회를 계속할 의지를 밝혔다.

두 번째 회기 개막연설에서 바오로 6세 교종은 공의회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교회의 깨달음과 본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교회 안의 쇄신을 꾀하며, 그리스도교계의 일치를 추진하고, 현대인들과 더 많이 대화하자는 내용이었다.

요한 교황의 공의회 개막연설은 처음부터 자애로운 배려가 깃들인 것이었다.

“이때를 맞이하여 가톨릭 교회는 이 공의회로써 종교적 진리의 빛을 높이 비추면서 교회가 모든 사람들의 자애로운 어머니, 자상하고 참을성 있는 어머니,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도 동정심과 친절이 넘치는 어머니임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는 전인류가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에 참여하도록 초대의 손길을 뻗친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의 지위를 하느님 아들의 존엄성에까지 들어높임으로써 한층 더 인간 존엄성에 합당한 생활을 보증하고, 그 생활에 참여할 최후의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는 현대화되어야 했다. 만일 교회가 오래 묵은 제도를 가지고 버티고 서서 현대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일상생활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신자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난의 시간을 빛 속에서 걷다

한 세상이 또 다른 한 세상을 맞이하는 데는 아무래도 커다란 진통이 필요한 법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래 묵고 낡은 봉쇄교회에서 젊고 발랄한 개방교회로 나가려는 교부들의 결단이었다. 이 결단을 내리기까지 교회는 기존의 특권을 포기해야 했다. 특히 교황은 그 독점적 종교권력을 온 세계의 주교들에게 나눠주어야 했으며, 사제들은 그 권력을 평신도들과 나눠야 했다.

이제 교회는 봉건적인 독재체제가 아니라 주교회의와 사목협의회 등의 토론문화 속에서 성장해야 한다는 시대의 징표를 수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권력이 죽어 생명을 낳았다. 회칠한 무덤처럼 무기력했던 교회 안에 젊은 기운이 솟아나고 교회가 세상과 대화하며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거둔다. 그 과정에서 ‘걷잡을 수 없는 마음’ (12,27)이 일어나지만 이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나면 ‘하느님의 영광’ (12,28)이 드러날 것이다.

교회가 기존의 특권을 십자가에 높이 매달아 버릴 용기를 가질 때, 그래서 교회가 ‘세상의 통치자 됨.’ (12,31)을 포기할 때 교회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12,32) 주님께 오게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빛이 세상에 머물 때, 우리는 부지런히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 걸어가야 한다(12,35-36 참조).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종교권력 또는 민중의 아편이라 부르지 않고 인류의 미래요 희망이라 이름지을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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