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에 대한 갈망 때문에 생기는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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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에 대한 갈망 때문에 생기는 외로움
  • 마크 H. 엘리스
  • 승인 2021.08.14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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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공동체에서 보낸 1년-3월 17-18일

3월 17일

코네티컷 주에서 돌아온 후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당신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집 당번일 때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이곳에 가야 할까?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실제로 나는 어떤 말을 하거나 지도하지 않으면서 일꾼 집에 돌아오고 싶었다. 나는 정말로 침묵을 추구하고 있다. 나는 다시 부드러워지고 싶다.

샤론이 3가에 와서 나와 함께 얘기했다. 우리는 가톨릭일꾼 운동에 대하여, 우리의 자원봉사 위치에 대하여 그리고 그런 위치의 결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평화에 대한 나의 갈망과 자원봉사자로서의 책임이 가져다주는 부담의 내용에 대하여 얘기했다. 그러나 샤론의 깊은 연민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합리적인 정리를 불가능하게 한다.

샤론은 모든 것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부르스와 같은 사람의 외로움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외로움에 대해 얘기했다. 샤론은 외로움이란 하느님에 대한 갈망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샤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인에게서 충족되기를 바라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마가렛은 얼마전에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대중 음악에 대한 얘기를 하였었다. 대부분의 팝송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구세주를 찾는 상실된 사람들에 대한 것들이다. 마가렛에게 있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중요하게 만들고 또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이라고 한다.

샤론은 내가 성찰해 봐야 할 흥미 있는 구분을 한가지 제시하였다. 그에게 있어 종교적인 질문은 다양한 전통이나 분파 중의 하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물질적인 혹은 영적인 실재를 확인했는가의 문제라고 한다. 그는 두 가지 감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물질 재화의 감옥이며 다른 하나는 기존 문화의 감옥이라고 했다.

 

3월 18일

다른 모든 문화처럼, 우리의 문화도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내용의 세계관, 인간관 그리고 사회 체제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들의 경제 체제가 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는 교육을 받았으며, 핵무장은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이러한 이해에 도전하는 것이다. 정부의 조사에 따라 2천 5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가난한 이들이라고 규정되며 또다른 1천 5백만 명이 가난의 벼랑에 서 있다면 우리의 경제 체제는 누구를 섬기고 있는가? 우리의 군사 체제가 전적인 파괴를 겨냥하고 있다면 마지막에는 결국 우리 자신도 보호받지 못하고 더욱 더 위험에 처할 것이 아닌가?

샤론과 다른 봉사자들은 이러한 문화적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은 묻는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인가? 다른 사람들도 살아야 할 길이 바로 그 길인가? 이러한 가정들에 대한 질문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투신과 그들의 종교적인 신앙으로부터 나온다. 이 시점에서 교회는 우리의 문화를 지지할 것이 아니라 심각하게 질문을 제기하며 이 가정들을 연기 속에 날려보내지 말고 더 솔직하게 그 가정들의 내용을 노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이 갖고 있는 결단의 연속성은 지나간 일꾼 신문들을 보면서 추적할 수 있다. 1933년에 시작된 이 신문은 지난 수십 년간 일꾼 운동의 관심 주제들을 보여준다. 노동조합을 지지하고 (물질적인 진보만큼이나 노동의 존엄성을 인정하면서), 흑인과 인디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전쟁의 조짐을 예상하며 반대하는 운동을 조직화하고, 지방화된 마을 경제 체제를 주장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보호하는 등 이 모든 주제들은 1975년뿐만 아니라 1933년에도 다루어졌던 것들이다.

초기에는 특별히 내용이 탁월하고 힘이 있는 글들이 많이 다루어졌다. 그러나 돌아다보면 일꾼 신문의 가장 놀라운 점은 사회정치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이며 해로운 생각과 행동에 대하여 살아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찍이 1934년에 일꾼 신문은 2차대전의 발발을 예견했고 세계 분쟁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문제들에 대하여 해결책을 호소하였다. 또한 60년대 초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처음으로 반대한 것도 가톨릭일꾼운동이었다.

미래를 예견하고 그것을 공공연히 말하는 능력의 이유를 꼭집어 말하는 것이 어렵다. 물론 그러한 능력은 신앙에 뿌리를 둔 비전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가톨릭일꾼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회 정책을 지지하고 기성 문화에 타협한다. 아마도 가톨릭일꾼 사람들에게 반대하는 능력을 주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일상의 활동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 우리 사회의 희생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어떠한 거짓도 거부한다. “경제적 상승”과 “상황의 안전을 위한” 무장은 이 일꾼 집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희생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모든 초점을 기본적인 것에 돌리며, 삶의 가장 비참한 차원에까지 다다를 것을 요구한다. 착각할 여지가 거의 없는 것이다.

 

마크 H. 엘리스 / <피터 모린; 20세기에 살다 간 예언자>의 저자. 엘리스는 미국 텍사스 베일러 대학에서 유다학연구센터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유다학을 가르치다 은퇴하였다. 그는 스무 권 이상의 책을 쓰고 편집했다. 그의 대표작은 <해방의 유다신학>, <거룩하지 않은 동맹>, <우리시대의 종교와 포악성>, <예언의 미래: 고대 이스라엘 지혜의 재현> 등이 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극우주의의 강력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으며, 이스라엘의 미래를 팔레스티나와의 평화로운 연대에서 찾고 있다. 최근에는 <불타는 아이들: 가자지구 전쟁에 대한 유대적 관점>(2014), <추방과 예언: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이미지>(2015)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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